서울을 떠납니다

시골로 떠난 만보네 이야기

by 김영
우리 바닷가로 이사 가자.


남편한테 뜬금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우리는 정말 바닷가 근처 시골 마을로 이사했다. 꿈같은 일이었다.




국내 코로나 첫 번째 환자가 발생한 날, 만보가 태어났다. 산부인과에서는 면회가 자유로웠지만, 조리원 입소날부터 모든 면회가 금지되었다. 갑작스러운 고립이었다. 조리원에 가면 보러 온다던 가족들, 친구들을 만날 수 없었다. 물론 몸이 엉망진창이 되었던 지라 외롭기보다는 아팠다. 외로움은 집으로 돌아와 한 달이 더 지났을 때 문득 찾아왔다. 코로나가 무서워서 신생아를 데리고 집 앞 편의점에도 갈 수가 없었다. 현관 밖을 나가면 바이러스가 아기를 해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현관을 빼꼼 열고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기띠를 메고 아기와 함께 복도 산책을 할 수 있었다. 남편 외에는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집 안에서 SNS 속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과 공허한 소통을 하는 것 말고는 대화 상대도 없었다. 우연히 만난 동네 아기 엄마는 나와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코로나는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가족들 간의 모임도 금지되었다.


시간이 흘러 코로나 유행이 점점 사그라들었는지, 사람들이 적응을 한 것인지 길거리에 마스크를 쓴 채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아기에게 마스크를 씌워서 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작은 얼굴에 마스크를 씌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북적이지 않은 곳을 찾아다녔다. 차를 타고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는 곳으로 짧은 여행을 다녔다. 주로 독채 펜션 같은 곳이 적당한 여행지였다. 산골에 있는 엄마의 집도 좋았다. 아마도 그쯤 아기를 키우던 집들은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


육아 휴직을 종료하고 복직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회사는 재택근무와 사무실 출근날이 지정되어 있었고, 출근하는 날에도 회사에서 곧바로 집에 오기 바빴다. 아기를 돌봐야 하는 일이 바쁘기도 했지만, 망할 놈의 코로나. 코로나 때문에 누구를 만날 수도 어디를 자유롭게 나다닐 수도 없었다. 이게 다 코로나 때문이었다. 아기는 어린이집에 들어가면서부터 자주 아프기 시작했다. 게다가 무슨 전염병이 그렇게나 많은지. 누가 수족구에 걸렸다거나, 독감에 걸렸다거나, 장염에 걸렸다거나, 폐렴에 걸렸다거나 하는 일로 어린이집에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아기가 병을 옮아와 아픈 날들도 여러 날이었다. 재택근무로 버티고, 남편과 휴가를 번갈아 쓰며 가정 보육을 버텨냈다.


이쯤 되니 심신이 지친 것은 두말할 것이 없고, 인생에서 로그아웃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육아도, 일도 이대로 계속해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바다가 보이는 아파트를 발견했다. 집에서 바다가 보이다니? 당장 남편을 불렀다.


“여기 봐! 베란다에서 바다가 이렇게 보인대!”


남편도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 고성에 신축 아파트를 분양받아 귀촌했다는 사람의 게시물이었다. 우리가 사는 서울 강동구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가 속초, 고성이라 자주 여행 갔던 곳이라 더 관심이 갔다. 나와 남편의 인생 막국수 식당이 있는 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파트였다. 남편은 당장 부동산 앱인 호갱노노를 켰고, 그 아파트의 시세를 읊었다. 당장에라도 이사를 갈 것처럼 말이다. 아마 그날이 시작이었을 것이다.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이사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우리 부부는 그날부터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내가 그날에 그런 결심을 했다. 서울에 더 이상 살지 않겠다는 결심. 그리고 반드시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이사를 가겠다고 생각했다. 낭만적인 생각이고, 결정이었다. 낭만만 있는 현실적이지 못한 그런 결심. 그러나 나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질지니‘라고 생각했다. 어떤 이의 인생 한 조각이 나의 낭만에 불을 지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