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

by 마테호른

무엇이든지 깨끗이 지울 수 있는 지우개가 있었습니다. 가난, 절망, 고통, 부끄러움과 같이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물론 지우고 싶은 것은 무엇이건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말끔히 지울 수 있었습니다. 신은 인간이 그 지우개를 이용해서 세상을 행복하고 아름답게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 사람들은 가장 먼저 가난을 지웠습니다. 가난이 사라지자 세상은 온통 웃음으로 가득해졌습니다. 여기저기서 행복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하지만 더는 열심히 일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 사람들은 갈수록 게을러지고 거만해졌습니다. 두 번째로 사람들이 지운 것은 절망이었습니다. 절망이 사라진 세상은 희망만으로 가득해졌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희망만 품을 뿐 그것을 이루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이미 절망이 사라졌으니, 희망 역시 더는 존재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그저 이름으로만 남을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누구 한 사람 그것을 안타까워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사람들은 고통을 지운 후 곧이어서 부끄러움을 지웠습니다. 더는 고통을 느낄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고 법이란 법은 모두 어기면서도 어떤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세상은 권모술수와 부정(不正)이 넘치는 불법 천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신은 결국 사람들에게서 지우개를 빼앗은 후 모든 것을 원상복구 했습니다. 그러자 세상에는 가난과 절망, 고통, 부끄러움이 다시 들끓기 시작했고, 그것들이 사라진 달콤함에 중독된 사람들은 여전히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 채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고 더 많은 거짓말을 하고 더 많이 남을 속이기 시작했습니다. 더러는 빼앗긴 지우개를 찾기 위해 어딘가로 훌쩍 떠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사라진 지우개를 다시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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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했다. 그곳에서 배웠다. 단 한 줄이 사람을 움직인다는 것을. 오늘도 ‘앗’ 하고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한 문장을 위해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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