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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 Mar 23. 2020

생명의 흔적

캣맘일지

귀염이

길고양이에게 밥을 준 지 1년 반 정도가 되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밥을 먹으러 왔던 고양이들 중 반 정도가 나타났다 없어졌다. 한 생명이 그렇게 휙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힘들 텐데. 그들은 그냥 그렇게 사라졌다.


그중 많이 기억에 남는 귀염이 와 꿈뻑이.


귀염이는 내가 밥을 주게 만든 두 마리의 고양이 중 한 마리로 세상 귀여운 얼굴에 세상 똑똑이였다.

새끼를 가진 줄도 몰랐는데 서너 마리의 새끼를 낳았고 그 새끼들이 2-3개월 무렵이 되자 새끼들과 함께 사라졌다. 몇 개월을 늘 비슷한 시간에 밥을 먹으러 와 날 기다렸었다. 캔보다 사료를 좋아하고, 내가 준 고인 물보다 벽에서 흘러내리는, 겨울에도 얼지 않던 물을 먹던 똑똑이.

사람 무서운 줄도 알고 차 무서운 줄도 알던 똑똑이.

어디로 자리를 옮긴 걸까, 그냥 어디선가 외롭게 사라진 걸까. 살아있다면 한 번만 더 보고 싶은데.



꿈뻑이

꿈뻑이는 처음 봤을 때 쳐진 젖을 보고 아 새끼들을 키우고 있구나 싶었다. 혹시 나하고 닭가슴살을 줬더니 냅다 물고 1-2분 거리에 있는 새끼들에게 물고 갔다.

물어다 주고 다시 오고 물어다 가고를 4-5번을 하던 녀석.

새끼들이 점프를 할 수 있는 시기가 되자 새끼들을 다 데리고 밥자리로 왔다.

그 새끼들이 4개월쯤 되었으려나. 독립할 시기가 되자 새끼들에게 밥자리를 알려주고 자기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 건지 그렇게 그냥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 새끼들 중 내 밥자리에서 밥을 먹는 거를 본 아이가 세 마리 정도. 그중 한 마리는 중성화도 해줬다.


깡 말랐던 끔뻑이는 캔을 좋아하던 아이였는데 어디서 밥은 먹고 있으려나. 꿈뻑이며 눈 맞춤을 길게 해 주던 아이였는데.


밥을 주며 정 주기 싫어서 사진은 잘 찍어두지 않았는데 사라지는 아이들을 보며 한 장씩이라도 찍어두어야지 싶어 요즘은 좀 남겨보고 있다.


너를 기억하는 한 사람이 있다고.

그게 너에게나 나에게나 큰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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