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걷는다. 바쁘게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왠지 나만 불행한 것 같고 모두 다 행복해 보인다. 나는 왜 불행한 걸까. 가족 때문에, 일 때문에, 사랑 때문에, 돈 때문에... 저마다 이유들이 다르다. 하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어떤 이유 때문에 지금 힘들고 불행하다는 것이다.
지금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유, 그것만 없다면 참으로 살 것 같다. 하지만 그 이유가 없어진다면 정말로 행복할까. 오한숙희 씨는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이유가 사라지고 난 후에는 또 다른 불행의 이유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삶이란 지금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되는 것이므로.
어떤 이유 때문에 행복하다가 어떤 이유 때문에 금세 불행해지는 롤러코스터 같은 우리네 인생. 어지러운 희비의 쌍곡선에서 벗어나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감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없을까. 여성학자이자 방송인 그리고 베스트셀러로 활발하게 활동해오다 어느 날 사라진 오한숙희. 5년 간 ‘잠수’를 탔다가 돌아와 “사는 게 참 좋다”고 외치는 오한숙희에게 그 비밀을 들어본다.
오한숙희를 떠올리면 시원시원한 말솜씨와 호탕한 웃음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여성학자로서 뚜렷한 주관을 갖고 있으면서도 날카롭기보다는 옆집 아줌마처럼 푸근해 걱정이라고는 없을 것 같았던 그가 심한 우울증으로 자살까지 생각했을 줄 어떻게 짐작이나 했을까. 하지만 빨리 달릴수록 넘어졌을 때 상처는 더욱 큰 법이다. 유명해질수록 더욱 바빠지는 사회 활동, 이혼, 자폐성 장애를 가진 딸, 대가족의 가장... 보통 사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도 씩씩하게 앞만 보고 질주하다가 한 번 넘어지니 쉽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앞만 보고 그때 그때 닥치는 일 해결하며 바쁘게 살면서 삶의 내면을 잃었다고 할까요.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속으로는 병이 깊을 대로 깊었는데 느끼질 못한 거예요. 몸이 자꾸 아프고 아무리 좋은 걸 먹어도 낫지가 않았어요. 그럴수록 자신감은 더욱 떨어지고 사는 게 무의미해져서 죽음의 문턱까지 내려갔어요. 일종의 블랙홀 같은 거였죠.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더욱 깊어지는. 누구나 인생에 한 번쯤 그런 시기가 오는 것 같아요.”
약을 먹어도,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공기 좋은 시골로 내려가 큰언니 부부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먹고 노는 생활을 해도 병은 낫지가 않았다. 남들 눈에는 힘들어 보이는 조건에서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난 행복해요”라고 대답하던 그가 누가 봐도 늘어진 팔자인 상황에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행복은커녕 매일매일 새롭게 아픈 곳이 늘어났다. 보다 못한 가족들의 권유로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 등으로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너만의 북극성을 따라라> 이후 5년 만에 펴낸 책 <사는 게 참 좋다>는 전국을 떠돌다가 제주도 서귀포에 정착하게 된 그의 ‘힐링 방황기’다.
“5년이 금방이죠. 그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어요. 서귀포에서의 1년은 매일매일 누구를 만나서 어디를 갔고 뭘 했는지, 내가 뭘 보고 뭘 느꼈는지가 또렷이 기억나는데 그 이전의 약 3년 간의 시간들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졌던 듯해요.”
그렇게 떠돌다가 멈춘 곳이 제주도 서귀포였다. 제주 이주 바람이 한창 불 때도 그는 제주도에 대한 매력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지리산 쪽에서 살아볼까 하고 여기저기 알아보던 중이었다. “그런데 좋더라구요. 제주도에 갔을 때 몸이 치유되는 게 느껴졌어요. 바다 앞에 앉아 있으니 몸이 이완되면서 마음이 놓이는 거예요. 우리가 마음을 놔라 놔라 하지만 놔지지가 않아요. 그런데 자연 환경이 나로 하여금 놓게 한 거죠. 그러면서 깨달았죠. 사는 게 의도적으로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삶은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거라는 걸.”
오한숙희는 자신의 책을 가리켜 “방랑길에서 만나 나를 회복시켜준 사람들의 신의 한수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한다. 살기 위해 떠난 길 위에서 그는 사람들을 만났다. 말끝마다 입이 얼굴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하하하하’ 웃는 ‘하하’ 여사, 낮에는 손녀를 돌보고 밤에는 세헤라자데 복장으로 인생 천일야화를 꽃피우고 있는 소피아 할머니, 죽지 않으려고 매일 두부를 만들며 30년 희망을 이어온 형부, 식당을 열고 매일 새 반찬을 만들어 1년 반 동안 손님을 기다린 송희 씨, “콜” 한마디면 모든 의사소통이 가능한 태권도 사범.... 이들에게는 저마다 신의 한수가 있었다.
“사는 게 좋다고 늘 웃는 그들에게 고통의 시간이 없었을까요. 속내를 들여다보면 누구보다 복잡하고 힘든 일들이 많아요. 하지만 이들은 사는 게 좋고 행복하다고 말하거든요. 이들의 행복은 달달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어요.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며 찾아낸 삶의 지혜, 그것이 바로 이들의 신의 한수였어요. 식당 문을 열고 매일 새로운 반찬을 1년 반 동안 만든 송희 씨의 신의 한수는 바로 ‘기다림’이었어요.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모든 식당이 다 잘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송희 씨는 1년 반을 하루같이 기다렸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거죠.”
이렇게 만난 사람들을 통해 그는 대단한 사람들만 신의 한수가 있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신의 한수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희망을 낚아 올렸다. 그는 밖으로만 향해 있던 에너지를 온전히 자신에게 쏟았다. 그리고 자신의 신의 한수를 발견했다. 그것은 ‘말’이었다. 그가 삶의 의미를 잃었던 것은 말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한때 그는 장애를 가진 딸에게 ‘올인’하기 위해 남은 생을 엄마 노릇을 하며 살겠다고 아이와 둘이 낯선 생활을 시작했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말하는 게 지겨워 말을 안 하고 조용히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 삶이라 믿었다. 하지만 지겨울 정도로 익숙했던 일과 단절돼 다른 일을 해보니 지겹다고 여겼던 것이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추동해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돌아보면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은 ‘말무당’이었고 여성학과 여성운동은 ‘현대판 굿’이었어요. 책을 쓰면서 ‘말무당’이란 표현이 떠올랐을 때 온 몸이 감전된 것처럼 전율을 느꼈어요. 무당이 신 내림을 거부하면 죽음과 같은 고통을 느끼잖아요. 저 또한 말을 떠나서 다른 일을 하니 여기저기 아프고 살 수가 없었던 거예요. 이전에는 일과 가정을 병행하느라 힘든 20~30대 여성들의 한풀이를 위해 물꼬를 텄다면, 이제는 갱년기라는 인생의 대혼란기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들 안에 삶을 이끌어왔던 뭔가가 있어요. 어느 날 힘들어 주저앉을지라도 그게 당신들 삶을 다시 추동할 거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라고 말해주는 게 나의 미션이 아닌가 하는 데 생각이 미쳤어요.”
그는 사람에게는 딱 그것을 해야만 행복하도록 타고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 그게 바로 신의 한수. 그 한 수로 자아를 실현하고 보람을 느끼며 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의 비밀임을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제주, 마침내 제주에서 나는 행복과 만났다. 연로한 어머니, 딸의 장애, 생계를 책임진 가장, 삶의 조건은 여전했지만 나는 다시 행복해졌다. 내가 누구인지,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나니 나를 둘러싼 그 모든 조건들을 다시 감당할 용기가 생겨났다.”
- <사는 게 참 좋다> 프롤로그에서
오한숙희는 누구에게나 “딱 그걸 해야만 행복한 신의 한수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만의 신의 한수는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쉽게 떠오르지가 않았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는데 어디서 물을 찾겠어요. 사람들이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지겹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걸 할 때 가장 행복하기 때문에 선택한 경우가 많아요. 다만 인정 안하고 몰랐을 뿐 이미 신의 한수가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안으로 들어가서 이미 작동하고 있는 걸 만나려면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주도에서 내가 한 거라고는 서귀포라는 아름다운 자연에서 혼자 지낸 것밖에 없어요. 그 과정에서 인생의 새로운 지점을 본 거죠. 제가 어떤 면에서는 조기에 대박 출세한 사람이잖아요. 특별하게 스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 잘하는 사람은 나 말고도 많은데 말이에요. 밖에서 만들어지는 조건들 속에서 내 삶이 채워진 건데 몸이 아프고 자신감이 떨어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거죠. 온 신경을 밖으로 향한 채 정작 내 안은 텅 비워 두고 있었던 거예요. 제주도에서 비로소 오랫동안 멈춰 있던 책의 한 페이지가 비로소 확 넘어간 느낌이랄까요. 지금은 바깥에서 일이 주어지느냐 아니냐,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냐 못하냐 상관없이 나를 믿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겼어요. 힘이라기보다는 내가 나를 믿고 살아가라는 걸 깨달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네요. 누구나 신의 한수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자신감을 갖고 살아가길 바라요.”
제주에서 정착한 지 1년 3개월. 개인적으로 혼자 놀고 싶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재능기부 형식으로 조금씩 활동을 넓혀나가고 있다. 조만간 ‘숙희야놀자’라는 점방을 내고 상담소를 운영할 계획도 갖고 있다. 하지만 특정한 장소를 고집하지 않고 자유롭게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면서 놀아준다는 컨셉이다. 책 <사는 게 참 좋다>는 일종의 장난감. 이 장난감을 갖고 놀다가 이거 만든 사람을 만나서 놀고 싶을 때 연락을 해오면 만나는 방식이다.
“전에 책을 쓸 때는 여성학자로서 뭔가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욕구가 컸어요. 그런데 이번 책은 내가 나에게 보내는 내 인생의 책이었어요. 내 삶을 돌아보고 치유하는 책이에요. 세상에 보내는 일기 또는 안부 편지라고 생각하며 내내 이 글을 썼어요. 손석희 씨가 추천사에서 ‘제주 입도를 신고하는 편지’라는 표현을 썼는데 핵심을 정확히 짚어서 깜짝 놀랐어요. 오늘 제 안부 편지의 내용은 모아놓은 돈도 없고 그달 그달 살아가지만 그런데도 참 재미있다는 거예요.”
사진 : 기준서(스튜디오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