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문득> 출간 기념 가수 조규찬 인터뷰
가수 조규찬이 6년 만에 책을 갖고 나왔다. 누군가는 앨범이 아니라 의아해하겠지만, <달에서 온 편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그의 앨범만큼이나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거리에서 문득>은 조규찬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음악과 가족, 일상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에세이로, 여기서 평소 보지 못했던 조규찬의 면면을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거리에서, 문득>은 뮤지션으로서, 한 여자의 남편과 아이의 아빠로서, 또 대학생들의 스승으로서 살아가는 조규찬의 눈으로 세상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
책은 마치 그와 카페에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듯 말을 걸어온다. “나 요즘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라며 말을 건네는 그의 이야기는 참으로 푸근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 밤의 천둥소리에 놀라서 깨어났을 때
내 곁을 지켜주시던 아버지처럼,
나를 들여다 봐 주려는,
나의 말을 들어주려는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거리에서, 문득> 중에서
우리가 오늘 하루 어땠느냐고 묻는 그 ‘다정함’을 찾는 것처럼 조규찬 역시 책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닐까?
Q 6년 만에 두 번째 책을 내셨어요. 이번 책을 내신 계기는요?
살면서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많잖아요. 제가 워낙 동굴 속에서 제 음악만 하다 보니까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얘기를 많이 하진 못했어요.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과 단절됐던 통로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제가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할까요?
Q 첫 독자는 누구였어요? 반응은?
아내였어요. “책 예쁘다” (웃음) 그 다음에 “우리 아이에게 정말 좋은 추억이 되겠다”고 하더라고요.
Q 책 중간 중간에 있는 사진들은 누가 찍은 거예요?
사진은 대부분이 제 아내가 찍은 것이고요, 학교에서 찍은 것 2장은 미국에서 프로로 활동하시는 분이 찍어주셨어요.
Q 강의로 서울과 대전을 오가는 기차에서 글을 쓰셨다고요. 지금 우송정보대학의 전임교수로 계신데, 가르치기 시작한 건 얼마나 되셨어요?
겸임교수로 동덕여대, 경희대에서 강의한 것부터 보면 10년 정도 됐어요. 유학기간 중 휴학하고 한국에 왔을 때 전임교수 제의가 있었고 2013년 12월에 돌아오고 2014년 1학기부터 시작했어요. 1주일 중 강의가 풀로 있는 날은 사흘이에요. 수업 외 업무로도 학교에 자주 가죠. 또 ‘미스틱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하게 되었는데 학교와 회사 양측에서 배려를 해주고 계세요. 양쪽 일을 하기 위해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개인시간을 희생하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Q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요즘 학생들은 어떤 것 같아요?
보람 있는 일이지만, 그만큼 무겁죠. 우리 학생들에게 어떤 결과가 맺어질 것이냐에 대해 생각하면서 교육을 해야 하니까요. 요즘 세대는 빠른 결과를 지향하고 있어요.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트렌드를 보면서 길게는 2년 짧게는 6개월 안에서 결과가 나오길 바라더라고요.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오는 보컬리스트를 보면 정말 감각 있고 재주가 있어요. 그럼에도 ‘이 친구들이 음악을 위해 얼마나 아카데믹한 공부를 해 왔을까?’에 대해선 의심이 들 때가 있어요. 실제 계약을 하고 보면 코드도 모르고 독보(讀譜)도 안 되는 분들이 꽤 있거든요. 기초가 탄탄하지 않은 거죠.
Q 그렇다면 강의하시면서 학생들에게 가장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혹은 강조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먼저는 보컬학생들에게 이론을 많이 강화했어요. 그리고 몇 년을 할지 결정하라고 해요. 트렌드가 빨리 바뀌는데 3~4년 하다가 사라질 것인지, 더디더라도 소양을 단단히 해서 10년이든 20년이든 음악을 업으로 살아갈지 선택하라고 하는 거죠. 그리고 진짜 음악을 하고 싶으면 스텝으로서 역량이 강해야 한다고 강조해요.
스포트라이트가 영원할 수 없거든요. 그것만이 음악이 아니고요. 백업을 하는 앙상블 밴드라거나 스튜디오 세션도, 흔히 말하는 코러스도, 편곡도, 감독도 음악 하는 사람들이고 함께 이룰 수 있는 것이 엄청나요. 이런 것을 설명해주고 선택하라고 하죠.
1집 앨범 녹음작업을 하며, 나는 세션으로 참여한 선배 뮤지션들로부터 이런저런 음악적 조언을 들었다. 거기에는 음악적 문맥에 부합하는 적절한 코드 선택법, 그리고 리듬 편곡을 위해 고려되어야 하는 연주 메커니즘에 관한 충고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고집대로, 내가 원하는 코드와 리듬을 사용했다. 거기에는 “음악에 정답이 어디 있어. 내가 느끼는 걸 담아내면 그게 답인거지.”라고 말하는 나의 내면이 우뚝 서 있었다.
(중략)
지금의 내가 그 당시의 나를 만난다면,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보다 더 훌륭할까. 다른 건 모르겠지만, 2015년의 조규찬은 1집 앨범을 녹음하고 있는 ‘청년 조규찬’을 부러워할 것 같다.
Q 책을 읽다 보면 자신이 옛날에는 음악에 대한 결과물이 나왔을 때 별다른 영향력이 없을 것에도 예민했었다고 하면서 그때의 나를 다시 그리워하시더라고요. 옳고 그름을 떠나 그립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제가 갖고 있던 야망이라든지, 날카로운 날이 무뎌지고 줄어든다고 표현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게 과연 인생에서 얼마나 높은 가치인지도 생각해보고요.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기회가 있을 여지가 있다는 거고요. 그러다 보니까 조급함은 좀 누르게 되는 것 같아요. 조급해한들 인생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까 하는 것이죠.
영화 ‘원스 어폰 어타임’은 갱으로 성장해서 다른 인생의 행로를 걷게 되는 친구들의 이야기예요. 이 영화에서 전반적으로 흐르는 정서가 ‘향수’인데, 거기서 보면 친구들이 그렇게 착하게 살진 않았어요. 못된 일을 많이 했는데 그럼에도 나이가 들어 다시 마주치게 되는 친구들이 그 시간을 그리워하거든요. 그런 눈빛이 다 느껴져요. 인생을 꼭 옳았다, 잘못됐다고 평가하기에는 많은 변수가 작용하고 있어요. 평가도 그 시절이 주는 평가 기준이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나는 젊었노라, 철이 없었노라, 독선적이었노라 하지만 그게 저였고, 그게 그립고 아쉬워요. 저를 지배하는 정서인 것 같아요.
물론 제가 어른스러워져서 좋은 것도 있어요. 제 아내와 TV를 보다가 젊은 친구들이 농담도 하고 장난을 치는 것을 보면서 “아이고, 젊음이다” 그렇게 말하거든요. 젊음은 뭘 해도 예뻐요. 그런 어여쁨이 있어요. 너무나 서툴고, 그럼에도 성숙한 척을 하는 그런 젊은 시절의 치기(稚氣)가 보기 좋아요.
정중히 부탁 올립니다. 조규찬의 ‘기교 없이 알맹이로 채워진’ 10집은 기대하지 말아주세요. 왜냐하면 그는 <Remake>, <달에서 온 편지>, <9집>을 만드는 내내 그의 안에서 우러나온 ‘알맹이’를 이미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찾지 못하셨다면 앞으로도 힘드실 겁니다.
칭찬만 해달라고 투정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음악에 관한 실체 없는 칭찬-실제로는 그 음악인의 음반, 음원이나 공연은 전혀 찾지 않으면서 하는 인사치레-은 그도 이제 원치 않을 테니까요.
Q ‘규찬닷컴’에 올라왔던 ‘알맹이가 사라졌다’는 내용의 비평 글에 단호한 입장을 밝히셨어요.
메타 비평이라는 것은 비평에 대한 비평이에요. 주된 근거는 그 비평이 갖고 있는 오류를 찾아내는 거죠. 오류라는 것은 팩트에 근거하는 건데, 어떤 비평을 받아들일 때 그 중심에 제대로 된 근거가 제시되어 있느냐가 포인트라고 생각해요. ‘알맹이가 없다’는 글에 굳이 반응 했던 것은 그 글이 사람들에게 던지는 내용자체가 가장 필수로 갖춰야 하는 ‘팩트’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건강한 비판이라면 충분한 근거가 제시돼야 한다는 거죠. 만약 근거가 제시된 비판이라면 재미있게 보고 진심으로 받아들였을 거예요. 전 제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반응에 알러지가 있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비평과 비판을 받는 음악이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단, 비평답게 해주시면 저도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고 건설적인 토론의 장이 펼쳐질 거라고 봐요.
Q 아들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요. 사진으로 보니 많이 닮았더라고요. 아이도 음악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하던데 나중에 음악 시키실 생각 있으신가요?
전 제 아이가 음악을 해야 한다고, 혹은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음악’에 다른 단어를 대입해도 마찬가지예요. 무슨 말이냐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자기 삶에 함께 할 배우자를 만나서 홀로 설 때까지 함께 있어줘야겠다는 거예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외에 바라는 것은 없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교육에 대해 예를 들면 수학, 영어, 태권도, 미술 등이 있는데 아이가 좋아한다고 욕심을 내서 전부다 하게 하면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힘들 거예요. 전 제 아들에게 나이가 좀 많은 형 정도예요. 한 마디로 우리 집에서 저는 큰 아들이죠. 교육에 대한 것은 아내가 잘 해요. ‘아내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하잖아요? 맞아요. 제가 놓치는 게 많거든요.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 아버지는 나와 형들, 누나와 여동생에게 말씀하셨다. “내 안에 있는 음악에 관한 지식을 지금 너희에게 그대로 담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의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분의 눈빛과 음성이 조금씩 잊혀져 갈수록, 그 말씀 안에 담겨 있었을 자식에 대한 애처로움이 점점 더 선명해져 옴을 느끼게 된다. 누군가의 자식이었던 나는, 이제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어 있다. 그리고 늘어가는 흰머리를 보며, 내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나의 자식이 언젠가는 겪어야 하는 아버지의 부재를 걱정하고 있다.
Q 책 곳곳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났어요.
<달에서 온 편지>를 보면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제 삶을 그대로 녹여낸 것들이 많이 나와요. 주된 감정은 ‘어린시절에 대한 그리움’인데 그걸 채색하는 것은 아버지예요. 아버지는 제가 중학교 1학년이던 해 늦가을에 돌아가셨어요. 그 때 수업을 마치고 집까지 걸어가는 스산한 날씨도, 집에 들어갔을 때 유난히 맛있게 차려져 있는 밥상도 기억이 나요. 그걸 혼자 맛있게 먹던 기억도요. 그때 어머니께서 병원에 가셨거든요. 그날 밤 형제들이 모여서 기도하자고 하시는데 직감으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아버지가 건강하실 때 저를 앉혀놓고 피아노를 치시며 노래를 부르게 하고 옆에 누인 후 라디오를 머리맡에 뒀던 기억도 나요. 아버지의 스킨냄새와 호흡 소리… 제게 그것만 남기신 거예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기서 멈췄어요. 편찮으시거나 돌아가신 것은 제게 안 보였어요.
Q 아버지의 부재로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지금 아들이 더 각별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아이를 낳고 홀로 설 수 있게 될 때까지 곁에 있어만 준다면, 그 이상으로 사랑해 줄 방법이 있겠나 싶어요. 슬프게도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은 스스로 결정지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계속 다짐을 하고 기도하는 거죠. 나의 행복,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은 제가 사라지면 없어질 삼라만상이라 그것들을 위해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은 아녜요. 하지만 아이를 만나면서 바뀌었죠.
당연하겠지만 아이들에게는 엄마와 아빠가 필요해요. 물론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순 없겠지만, 아이들은 행복한 시간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러지 못했거든요. 실제로 제 젊은 날들은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래서 우리 아이를 생각하면 대단히 돈을 많이 벌고 그런 것 보다는 조심하자는 생각을 해요. 제가 옆에서 버텨줄 수 있기를 바라죠.
물론 청취자에게 출연자의 근황을 전하는 것은 인터뷰의 당연한 수순이고, 내 가족 구성원의 대부분이 음악인이라는 점에서 가족에 관한 질문에도 아무 문제는 없다고 본다. 단지 대답을 하는 입장에서는 같은 말을 20여년 반복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오늘 내게 들었던 그 ‘묘한’ 기대감의 어딘가에는 어쩌면 색다른 질문을 기다리는 나의 바람이 숨어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낚시에 대한 질문을 받는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거기에 대답하는 나의 눈빛과 목소리는 사뭇 달라질 것이다. 더군다나 그 내용은 생동감 있는 말들로 채워질 것이다.
Q 아들과 함께 낚시하는 사진이 참 예뻤어요. 낚시를 굉장히 즐기는 것 같은데, 언제부터 하셨어요?
낚시를 처음 시작한 건 20대 초반이었어요. 음악 하던 형이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낚시하러 가실 때 절 데리고 갔죠. 강원도 화천 파로호의 별이 쏟아지는 밤이었어요. 뒤는 산이 병풍처럼 서 있고요. 손을 뻗으면 마치 별이 닿을 것 같았는데 그 하룻밤에 낚시를 좋아하게 됐어요. 그 이후엔 음악을 한창 하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서 프로 배서와 함께 아마추어 스포츠 피싱 대회에 나가게 됐는데 2등을 했어요. 매료되어서 그 이후엔 틈나면 가고 있어요.
Q 낚시와 창작이 가지는 연관성에 대해선 질문을 안 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사실 낚시를 좋아하면 음악에 게을러져요. 음악을 덜 듣게 되고 연습을 안 하게 되죠. 음악을 만들 때 생각이 너무 많아질수록 점점 음악은 공감으로부터 멀어진다고 생각해요. 만드는 순간에는 내가 좋아하는 소리를 내야 하거든요. 그런데 낚시를 하면 제가 진정 좋아하는 상황이 되요. 그 동안 묵어있던 때를 비워내고 나면 새로운 것이 제 안에 채워지듯 낚시를 하고 나면 세상에 찌들었던 것이 다 걷힌다고 할까요? 그래서 음악이 좀 더 맑아요.
Q 요즘 TV 육아 프로그램이 많잖아요. 한번쯤 제의를 받으셨을 것 같은데요.
정중히 사양했죠. 다른 분들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아이가 평범하게 가장 어린이다울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TV에 출연하는 순간 특별대우를 받을 것이고 그 경험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전 좋을 것 같지 않아요. 어릴 때는 여백을 많이 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장난감 레고를 혼자 하고 있으면 약간 심심해 보여도 그냥 놔둬요. 저 어릴 때 생각하면 혼자 시간을 많이 보냈는데, 그때 제게 많은 것이 싹 텄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에게는 숨 쉴 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아내와 약속했어요. 가장 평범하게 키우자고요.
아무래도 엄마들은 좀 더 조급함이 있죠. 그렇지만 “피어라, 피어라”한다고 2개월 뒤 필 꽃이 지금 피지 않잖아요. 아이의 삶은 당장 화려하게 번뜩이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꽃이 필 때 까지 적당한 햇볕과 수분과 양분이 있으면 될 거예요. 피어나고 말고의 문제는 그 시점을 직접 체감할 당사자의 몫이죠.
Q 가수들이 가면을 쓰고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현하시기도 하셨어요.
이것도 트렌드죠. 가면을 쓰고 등수를 매긴다든지, 어쨌든 음악 외(外)적인 장치가 있어야 시청률이 나오잖아요. 음악 자체로는 힘들어졌죠. 이걸 꼭 미디어만의 책임으로 돌리긴 힘들고 그렇다고 이런 장치가 있어야 좋아하는 대중을 탓한다면 그건 대중에 대한 모욕이나 결례라고 생각해요.
Q 문학계에선 ‘시(詩)집이 잘 안 나가는 이유가 좋은 시가 안 나오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음악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좋은 음악이 나온다고 해도 그 음악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현재의 과정을 뚫고 나올 수 있을까요?
결국은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그렇게 할리우드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이기는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죠. 음악 하는 사람들의 상황도 대다수가 열악한 상황인 것은 분명한 현실이고 제작도 시청률이라는 것에 매몰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극소수만이 성공하는 것이고요.
그러다 보니 음악 하는 사람들이나 제작하는 분들도 그 극소수를 지향하겠죠. 이미 선례가 있는 것을 따를 수밖에 없죠. 그것으로 대다수의 채널이나 주요 편성시간에 할애가 되고요. 그러면 시청자들은 어떻겠어요. 침묵의 나선 이론의 전형적인 예잖아요. 그분들이 아무리 온라인에서 부정적인 댓글을 달아도 심지어 그것으로 노이즈 마케팅까지 이어진다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싫은 소리를 들으면 싫은 소리를 듣는 만큼 더 붐업이 되고, 좋은 소리 들으면 좋은 소리를 듣는 만큼 붐업이 되죠.
그러니까 결국 그 나선, 소용돌이의 중심에 불특정다수 대다수의 시청자들이 매몰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에요. 그렇다고 그분들이 개개인의 소양이 부족한가 하면 그것은 아니거든요. 아주 다양한 음악을 들으시거든요. 그런데 방송에서만큼은 바뀔 수 없는 것이 여러 주체가 톱니바퀴에 맞물려 들어가는 것처럼 돌아가고 그 현실적인 아웃풋으로 관성이 생기기 때문에 그 관성을 누가 깰 수가 없는 거예요. 깨려고 들어가려고 하면 그 관성에 녹아들 뿐이죠. 그 안에 들어가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게 현실이에요.
그래서 그런 현실을 개탄하면서 선술집 철학자가 되어서 궤변과 함께 독선적인 말을 하면서 나 외에는 모두는 그르다고 이야기 하면서 취해서 밤을 지새는 삶을 살 것이냐, 그것은 또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선택한 것은 그것은 그대로 두되, 나는 역류해서 다시 물이 처음 흘러나온 그 곳까지 가진 못하더라도 밀려나지 않는 제자리에서 역류를 한 번 해볼까? 그런 정도의 마음이에요. 저는 큰 물고기가 아니기 때문에. 흐르고 있는 제가 처해있는 곳에서 그 흐름을 역류해서 제자리에 머무르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어떻게 보면 비겁하지만 그렇게라도 견뎌보자는 생각으로 있어요.
어떻게 보면 질타 받듯이 책 나왔다고 하는데 앨범 언제 나오냐는 이야기 들어요. 냉소적이고 싶지는 않지만, 제가 언제나 마음속으로 외치는 것은 “그럼 앨범을 좀 내게 해주세요”라는 말을 해요. 그 정도로 어느 주체 할 것 없이 제가 앨범을 내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하는 상황이었어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제가 앨범은 만들 수 있어요. 제가 다 할 수 있으니까요. 현실적으로 제작비가 많이 들지 않고요. 그런데 저는 그냥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그늘에 버려지는 메아리 없는 그런 공허한 외침에 되게 하는 음반이 되게 하긴 싫거든요. 나왔는지 몰라서 끝나는 경우가 정말 많아요.
그러니까 저는 제 자식 같은 음악이 천덕꾸러기가 되는 게 싫은 거예요. 그런데 어느 한 주체를 탓하기에는 조심스럽죠. 앨범을 왜 안 내느냐 할 땐 “내고 싶습니다. 평소 작곡 작사 하고 지어놓은 곡도 많아요. 하지만 그걸 담아냈을 때 여러분을 만날 수 있는 충분한 창구를 허락할까요? 제가 또 다시 가면을 쓰고 노래를 해야 할까요?”라는 말이 마음에서 우러나오죠.
Q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제 얘기 들어달라는 말씀 하고 싶어요. 사람이 살면서 진심으로 내 얘기를 말없이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게 쉬운가요? 쉽지 않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활자를 통해서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상태에서 제 얘기를 만나면 좀 더 편안하게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저도 상대가 바로 앞에 있지 않기에 편안하게 써내려 가는 정도고요. 그 외에는 사실 두려워요. 세상에 지혜롭고 박학다식하신 분이 정말 많은데, 그런 분들 앞에서 감히 제가 글을 쓰고 어떤 생각이었다고 말하는 자체가 두려워요. ‘제 얘기를 한번 들어 봐 주실래요?’ 그런 마음이에요.
사진 제공 : 안나푸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