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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공자는 왜 세상을 평정하려 했을까?

<철학 콘서트>

by 더굿북

동서고금의 철학자 중 가장 불우한 사람이 공자였다. 꽃다운 나이의 처녀, 열여섯 살의 안징재와 칠순 노인 숙량흘이 야합(野合)하여 낳은 아이가 공자다. 야합은 요샛말로 정식 결혼을 치르지 않은 동거다.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짱구여서 이름을 구(丘, 언덕)라고 지었다. 공자를 낳고 3년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자란 소년.


“아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로 시작되는 서정주의 〈자화상〉처럼 공자의 소년 시절은 어두웠을 것이다. 어머니가 무당 일로 공자를 먹여 살렸다고 한다. 주검을 수습하고 그 영혼을 달래는 무당 일은 분명 천직(賤職)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마저 공자의 나이 열여섯에 돌아가신다. 공자는 사실상 고아였다. 공자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을 것이다.

왕자로 성장한 석가와 어둠의 자식으로 자란 공자는 그 출발부터 너무 대조적이다. 명문 귀족의 자제였던 플라톤과도 너무나 대조적이다. 아버지가 목수였던 예수와 공자는 출신이 비슷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울타리 안에서 성장한 예수는 공자보다야 행복한 소년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공자의 소년기는 우리가 만나는 10인의 현자 중 가장 불우했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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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세웠다(吾十有五而志于學).”

불우한 가정환경을 이겨내는 의지의 인물들이 있다. 공자가 그런 사람이었다.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세운 이 소년은 조숙했다. 공자의 학문은 진리를 탐구하는 도량이면서 동시에 소년에게 청운의 꿈을 약속하는 학문일 것이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비참한 환경을 내 기어이 극복하고야 말리라.’ 열다섯 살에 세운 공자의 지학(志學)은 그가 차마 다 드러내지 않은 불우한 삶을 배경으로 읽어야 그 당찬 입지를 느낄 수 있다.

“서른 살에 두 발로 세상에 섰고(三十而立)”

나이 서른에 무엇을 했나 물으니 ‘섰다(立)’라는 한마디로 정리한다. 이것은 자립을 의미할 것이다. 경제적 자립과 함께 정신적 자립, 즉 사상의 일가(一家)를 이루었다는 말일 것이다. 예수도 나이 서른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고 석가도 나이 서른여섯에 득도한 것으로 미루어, 공자도 나이 서른에 나름의 탄탄한 정신적 기반을 확립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공자의 나이 서른 살 전후로 상당수의 제자가 공자의 문하에 들어왔다고 한다. 석가는 기원정사에서 거지 500명과 더불어 수행 공동체를 운영했다. 소크라테스는 청소년과 더불어 길거리 문답을 나누었다. 예수는 문둥이, 앉은뱅이, 벙어리, 장님 등 중증 장애인의 몸을 치유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공자가 일생 키운 제자는 3,200명. 해마다 적어도 100여 명의 학생이 공자의 문하를 출입했다. 노나라를 비롯한 중국의 동쪽 지역에서는 제법 영향력 있는 명사로 발돋움했을 것이다.

“마흔 살에 불혹에 이르렀다(四十而不惑).”

나이 마흔에 이르면 숱한 유혹의 손길이 뻗친다. 마흔의 나이는 사람들에게 젊은 날의 굳센 패기, 높은 이상을 버리고 현실의 이익을 좇게 한다. 공자의 ‘불혹’은 나이 마흔이 유혹이 많아지는 시기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뜻있는 사람들이 부와 권력의 유혹에 휘둘려 자신의 양심과 사상을 접는 시기, 공자는 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자기 수양에 치열했던 모양이다.

나이 70에 이르러 인생을 돌아보면서 그 시절 ‘나는 유혹을 이겼다’라고 공자는 기록하고 있는 것이렷다. ‘이립’이 경제적 자립과 사상적 자립을 아우르는 말이듯, ‘불혹’도 복합적 의미를 내포하는 말인 듯싶다. ‘불혹’은 부와 권력, 명예와 지위 등 현실적 이해관계에 미혹되지 않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 내재한 숱한 난제에 대하여 나름의 성숙한 세계관을 수립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쉰 살에 이르러 천명을 깨쳤다(五十而知天命).”

“하늘을 따르는 자는 살고 하늘을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順天者存 逆天者亡)”라고 《명심보감》은 기록하고 있다. 천명은 하늘의 섭리요, 자연의 법칙이다. 공자가 쉰 살에 이르러 하늘의 섭리를 두루 통찰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 왠지 꺼림칙하다. 《논어》의 이 대목은 자서전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공자의 인생 역정과 연관하여 해석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태어나 무엇을 하고 죽을 것인가’라는 물음이 우리를 괴롭힌다.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세우고 제자를 키우며 나이 50에 이른 공자. 나는 무엇을 하러 태어났는가? 그렇다. 나만큼 학식을 쌓은 이, 있으면 나와봐. 이제 세상을 평정하러 나서야 하지 않는가? 공자의 지천명은 치국평천하의 깨달음이요, 결단이었을 것이다.

가자, 세상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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