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한다.'라고 합니다. '함함하다'는 '털이 보드랍고 반지르르하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까칠한 털을 가지고 있어도 자기 자식은 귀여워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도 제 방귀 냄새에 후각을 곤두세우고 즐겨 맡아본 시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올해 초 코로나에 감염되었을 때입니다. 코로나가 후각세포를 마비시킨다는 말을 듣고 처음 사흘 동안 사경을 헤맨 사흘을 제외하고는 계속 코를 킁킁거리며 집안을 다녔습니다. 다행히 저의 후각세포는 회복되었고 지금도 냄새는 잘 맡습니다. 일부러 나의 방귀 냄새를 맡지는 않지만 싫지 않은 것도 인정해야겠습니다.
저는 코로나를 무사히 넘겼지만 곤란을 겪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아이가 기저귀에 싸 놓은 것을 알지 못해 방치했다는 신혼부부도 있었고 가스불에 올려놓은 냄비가 타는 냄새를 맡지 못해 큰 일을 당한 뻔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음식을 먹어도 향을 맡지 못하니 식욕이 줄었다는 사람은 부지기수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리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후각세포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인간을 멸망시키려는 계략이 분명합니다.
어느 날 시청 앞 광장을 지나고 있는데, 십여 명의 중년과 노년이 일제히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작은 포클레인으로 커다란 나무를 파 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포클레인 작업하는 게 재미있나, 하고 얼굴 표정을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모두 코를 앞으로 내 밀고 뭔가에 취한 듯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냄새, 흙냄새였습니다. 오랫동안 맡아보지 못한 기억 속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냄새였습니다.
조그만 포클레인이 아름드리 느티나무 주위의 흙을 파내고 있는 중에 주변에 흙이 널브러졌습니다. 흙냄새는 어르신들의 후각 신경을 타고 뇌의 감정 세포와 기억 저장소를 헤집고 다니는 듯했습니다. 행복한 기운이 광장에 퍼졌습니다. 제게도 어린 시절, 흙마당에서 장난감 하나 없이 손으로 성을 쌓고 때로는 입에 넣기도 했던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갔습니다.
냄새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불가피성입니다. 보고 싶지 않으면 눈을 감고, 만지기 두려우면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군침이 돌지 않으면 맛보지 않아도 됩니다. 후각은 다릅니다. 냄새 맡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호흡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고 호흡은 코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 냄새를 맡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표현 불가성입니다. 시각이나 미각에 비해서 후각에 대한 표현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후각을 표현하기 위해 시각과 미각의 묘사를 빌려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매끄럽고 따뜻한 돌의 냄새, 마르거나 젖은 지푸라기 냄새, 갓 구워낸 빵 냄새'(소설 <향수>에서 인용) 같은 표현입니다. <열린 감각>의 저자 '다이언 에커먼'은 시인을 평가하는 한 가지 방법은 후각을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냄새의 즉각성입니다. 시각으로 말하자면, 내가 본 게 맞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하고 눈을 흐릿하게 뜨고 사물을 파악하기도 합니다. 손으로 더듬거리기도 하고 귀를 쫑긋 세우기도 하지만 후각은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후각은 즉각적으로 우리 뇌를 자극하고 신체가 반응합니다. 먼지가 많은 곳에 들어가는 즉시 재채기를 하고, 최류가스를 인식하기 전에 눈물이 흐릅니다.
저는 마지막 특징이 가장 두렵습니다. 냄새가 저의 이성이 작동하기 전에 행동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땀에 흠뻑 젖었다가 집에 들어오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지 못할까 봐, 떼 국물 흐르는 해진 옷에 소주병을 안고 있는 노숙자 옆을 눈살 지푸리고 지나칠까 봐 두렵습니다. 이성이 후각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 냄새나는 인간이 되어야겠습니다.
냄새에 대한 가장 뛰어난 소설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입니다.
“18세기 프랑스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혐오스러운 천재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천재적이면서도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이 책은 바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세 개의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부분은 소설 <향수>의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먼저, ‘18세기 프랑스’는 고전적 질서가 무너지고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천재적’이라는 것은 소설의 주인공이 태어날 때부터 세상의 모든 냄새를 분리하여 인식할 수 있으며, 그 모든 것을 조합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가장 혐오스러운’이라는 말은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인공 이름은 ‘장바티스트 그루누이’입니다.
파크리크 쥐스킨트의 장편소설 <향수>의 주인공, 그루누이는 파리에서 가장 악취가 심한 시장의 생선 좌판 구석에서 태어났습니다. 보모의 손을 거쳐 성인으로 성장한 그루누이는 자신의 재능을 살려 파리에서 최고의 향수 제조 기술자가 됩니다. 세상에 있는 재료를 섞어 최고의 향수를 만드는 수준을 넘어 ‘향수의 창조자’가 되려는 그의 야심은 궁극의 향을 찾아 나섭니다.
금요일 저녁에 이 책을 잡았다면 주말은 온전히 이 소설에 받쳐야 할 것입니다. 저도 손에 잡힐 듯, 눈에 보일 듯, 금방 코에 닿을 듯한 묘사와 빠른 이야기 전개에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장편소설 <향수>는 전 세계적으로 2천만 권이나 팔리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저자는 <좀머 씨 이야기로> 잘 알려졌지만, 저는 몇 년 전 읽었던 <깊이에의 강요>라는 책을 좋아합니다. 아는 사람에게 책을 권할 일이 있으면 추천하는 책 중 하나입니다. 특히 누군가로부터 ‘넌 깊이가 없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심란해진 친구가 있으면, <깊이에의 강요>라는 책의 줄거리를 이야기해 줍니다.
다시 향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는 동안 ‘향수 또는 냄새’의 두 가지 특징에 사로잡혔습니다. 첫 번째는 냄새는 경계가 없다, 는 것입니다. 저자는 ‘위대한 것, 끔찍한 것, 아름다운 것 앞에서도 눈을 감을 수는 있다. 달콤한 멜로디나 유혹의 말에도 귀를 막을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냄새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냄새는 호흡과 한 형제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영화 <기생충>(2019)의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동익(이선균)은 ‘선’을 중요시하는 사람입니다. 운전기사인 기택(송강호)은 자신이 ‘동익과 동행하고 있다.’ 라거나 ‘부인을 사랑하느냐’고 물어보면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합니다. 그러나 기택의 말과 행동은 결코 선을 넘지는 않습니다.
냄새는 다릅니다. 반지하에 사는 기택은 좋지 않은 냄새를 풍깁니다. 땀이 오래 밴 속옷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불결한 행주로 식탁을 한번 쓱 훑고 나면 바닥에 낮게 가라앉았다가 서서히 피어오르는 어떤 것처럼 말입니다. 이 냄새는 운전석에서 뒷좌석으로 사정없이 넘쳐흐릅니다.
모든 인간은 냄새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바티스트 그루누이만 빼고. ‘체취’라고 불리는 고유의 냄새는 향수를 이용해 잠시 숨길 수는 있어도 끝내 어디선가에서 퍼져나갑니다. 경계 없이 공기 중으로 흩뿌려지는 나의 냄새를 어떻게 가꾸어야 할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냄새가 인간의 정신을 지배한다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인간의 가슴속으로 들어간 냄새는 그곳에서 관심과 무시, 혐오와 애착, 사랑과 증오의 범주에 따라 분류된다. 냄새를 지배하는 자, 바로 그가 인간의 마음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저자는 ‘인간의 가슴’ 속으로 냄새가 들어간다고 했지만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후각세포를 통해 뇌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후각 신경세포는 감정을 관장하는 뇌의 ‘편도체’를 자극하여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소설 속에서 그루누이는 직접 제조한 인간의 향수를 사용하여 만나는 사람에게 동정심을 일으키게 하거나 상대방을 굴복시키기도 합니다. 오직 향수만으로 관심과 애착, 사랑을 만들거나 무시와 혐오, 증오를 유발합니다.
냄새로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부제)는 소설에 불과하지만, 냄새가 사람의 감정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냄새로 판단하는 행위는 이성의 판단보다 한 발 먼저 일어납니다. 사람 냄새뿐만 아니라 공간이나 음식, 물건에서 나오는 향은 나의 감정과 기억 세포를 헤집고 다닙니다. 제가 냄새에 의해 편향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씩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장바티스트 그루누이가 어느 날 밤, 제 침실에 침입하여 몽둥이로 목덜미를 내리치는 상상을 합니다. 그루누이는 가위로 잠옷을 잘라내고 포마드를 바른 수건으로 제 몸을 빈틈없이 싸맬 것입니다. 한참을 그대로 두었다가 새벽이 오기 전 수건을 벗겨내고, 몸에 남은 포마드는 나의 속옷으로 깨끗이 닦아내어 한 조각의 향기도 놓치지 않고 담아 갈 것입니다. 작업실에 돌아온 그루누이는 몇 번의 증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손톱만 한 병에 저의 향기를 담습니다. 저의 영혼은 몇 방울의 향기로 변했습니다.
그가 제 영혼을 몸에 뿌리고 거리로 나가면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대할까요? 동정심 어린 눈으로 그 가여운 남자를 도와주려 할까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피할까요? 아니면 친근감으로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할까요? 지금 제 삶의 모습에 그 향기가 달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