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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받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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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 Jerk Oct 15. 2015

후드 구멍 하나

미안하다

어느 날, 렌지후드에 부드덕대는 소리가 났다. 미지는 일단 공포스럽다. 놀란 마음에 일단 후드를 가동시켰다. 대문 틈으로 시선을 빼꼼 던져보니 후드 구멍이 이끼며 나뭇가지를 토해내고 있다. 필시 무언가 우리집 후드를 노리고 있다. 우리집 고양이와 불안한 눈빛을 주고 받았었다.
이같은 불편한 만남은 두어 차례 더 반복되었는데, 오늘 아침은 좀 달랐다. 마침 주방에 있던 차에 후드 파이프가 들썩이는 것부터 시야에 잡혔다. 조심스럽게 대문부터 열어 후드 구멍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게 후드를 켰다(그래도 시끄럽긴 똑같다). 새 한 마리가 총알같이 튄다. 새구나.

잠시 후 옷을 꿰어 입고 집을 나서려는데, 또 후드 파이프가 들썩인다. 문을 벌컥 열고 나서자, 또 놈이 튀는가 했다. 그런데 이놈이 고작 앞집 지붕에 앉아선 꾸륵꾸륵 소리를 지어낸다(오른쪽 아래). 가만보니 짝지도 달고서(왼쪽 위) 어슬렁 댄다.
내 처마 밑 내어주는 건 기쁜 일이지만, 거기에 기거하게 해줄 순 없다. 살 데가 아니야. 나 고기도 구워 먹고 생선도 구워 먹고 해야된다. 짝지 앞에서 쪽 줘서 미안해. 근데 이 미천한 놈이, 눈치도 없이 내가 출근해버리기만 기다리고 있다.

아무렇게나 굴러 다니던 빈 병을 주워 후드 구멍을 막으면서, 이 구멍 하나마저 내꺼 해야만 하는 나의 우악스러움에 소름이 돋았다. 늘 부러워 마지않던 놈이 내게 신세지려 하는데. 그깟 후드 구멍인데.

나 고기 구워 먹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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