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관악산 시지프 Nov 29. 2022

MZ를 향한 혐오

나는 94년생, M과 Z의 경계에 있는 세대다. 그래서 일을 하다 보면 '나는 요즘 친구들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는데 최선생을 보면 다시 생각하게 돼.'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나를 좋게 봐주는 선배의 마음은 고맙지만 왠지 개운하지 않은 칭찬이다. 선거철이 되면 'MZ'는 젊은 층의 표심을 사로잡기 위한 캐치프레이즈로 활용되고, 티브이 프로그램에서는 요즘 젊은 사람들을 풍자화하기 위한 단어로 사용된다. MZ는 어떨 때는 자라나는 나무였다가, 어떨 때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



최근 SNL 코리아에서 방영한 '피꺼솟(피가 거꾸로 솟는) MZ 신입' 영상의 썸네일
SNL 코리아에서 풍자하는 MZ들은 직장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사소통이 어려울 정도로 문해력이 약하다. 위 방영된 영상에서는 MZ신입들이 보이는 것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취하며 직장 동료들을 곤란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상사가 "앞으로는 제가 ㅇㅇ님을 전담할 거예요."라고 하면, MZ 신입이 "전담이요? 직장에서 담배를 강요하는 게 말이 되나요?"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사람들은 영상을 보고 웃으며 '현실 고증'을 너무 잘했다던지, 우리 직장에도 저런 MZ가 있다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함부로 일반화하지 말라는 댓글도 몇몇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아는 내 주변의 또래 친구들은 대부분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스타트업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 하나는 부단히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가며 세 명의 다른 친구들과 오피스텔에서 합숙생활을 하고 있고, 같이 일했던 다른 친구는 젊은 세대주로서 부모님의 생활과 본인의 생활까지 책임지기 위해 사장님의 변덕을 참아가면서도 혹시 잘리지는 않을지 염려하며 매일 출근을 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런 성실한 젊은 친구들도 있지만 같이 일하기 힘든 친구들도 많다는 이야기를 한다. 사실이다. 빌런은 어딜 가나 존재한다. 모든 팀원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빌런이 있고, 어떻게든 자기 일을 줄여보고 싶어 하는 빌런, 너무 미숙해서 어디부터 가르쳐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빌런도 있다. 그러나 사실 내가 사회생활을 하며 경험한 많은 빌런들은 MZ세대가 아니었다.



나는 젊은 세대가 혐오의 대상이 될 만큼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모든 분야의 사회생활을 경험해본 게 아니라서 어떤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젊은 노동자가 사업주의 골머리를 썩이는 시장의 현황을 다 보지 못한 걸 수도 있다. 그래서 만약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젊은 사람들이 사업장에서 무책임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하면, 그 세대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도 괜찮은 걸까.



영화 '호텔 르완다'의 장면
영화 호텔 르완다는 실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1994년 발생한 '르완다 학살'사건을 반영하고 있다.

벨기에는 르완다를 식민 통치하며 민족을 분열시키기 위해 코 크기나 안면 특성 등의 기준으로 '후투족'과 '투치족'을 구분한다. 이 분열은 식민통치 이후에도 계속돼 94년에는 후투족을 해방한다는 명목으로 4월부터 7월까지 3개월 동안 50만에서 80만 명이 학살당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위 영화 장면은 두 명의 르완다인이 한 명은 자신이 후투족이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이 투치족이라고 소개하자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는 외국 기자의 반응을 보여준다.

우리는 지금도 이유 없이 누군가를 혐오하고, 그런 빈약한 혐오로 감히 폭력을 정당화한다.



말도 안 되는 혐오를 위한 혐오는 여전히 우리의 세계에서 진행 중이다. 얼마 전까지는 코로나가 중국에서 발생한 것을 이유로 아시아인 전체를 향한 혐오가 자행돼 아시아인들의 외국 대학 입학이 제한될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폭력까지 가해졌다. 젊은 사람들을 향한 혐오도 하나의 폭력이다. "에이, 그냥 웃고 넘기는 건데 무슨 폭력까지, 왜 혼자 극대노함?"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만약 이 웃고 넘김이 '젊은 사람은 게으르다.', '젊은 사람은 멍청하다.' 같은 편견을 확산했다면 그건 분명한 혐오이자 폭력이다.



혐오에는 혐오로 맞설 수 없다. 내가 "꼰대들이 더하지, 어떻게든 싼 값에 더 많이 못 부려 먹어서 안달이잖아?"같은 논리로 어린 동료들을 보호할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MZ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사회에는 일단 젊은 사람들을 깔보고 시작하는 꼰대들이 분명 있지만, 내 가치를 알아봐 주고 그걸 키우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른들도 있다. 우리 세대에 빌런과 능력자가 모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를 도와주고 키워줄 수 있는 스승들을 찾아야 한다. 괜히 내 가치를 폄하하는 어른에게 에너지를 쏟지 말고 나를 알아봐 주는 스승과 좋은 신뢰관계를 만들어두자.



다음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건 흔히 알고 있듯이 책임과 권리는 상응한다는 거다. 상사가, 직장이, 또는 누군가가 나에게 책임을 요구했다면 그에 맞는 권리를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 내게 합당한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합의를 통해 책임과 권리를 조정해 볼 수도 있다. 반대로 내가 권리를 챙겼다면 그에 대한 책임이 생기는 것도 인지해야 한다.



내가 글을 조금 끄적이는 것으로 젊은 세대를 향한 혐오를 멈출 수는 없다.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혐오지만 사람들은 혐오를 위한 혐오를 계속할 테다. 그래서 MZ동료들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과 함께 그들을 향한 혐오와 폭력이 결코 부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



*썸네일은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에 있는 르완다 대학살 박물관(kigali genocide memorial)을 방문했을 당시 찍은 사진이다.

작가의 이전글 편리한 슬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