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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마음 Oct 27. 2021

어느 새벽의 필사



 어느 날 새벽, 책을 읽다가 손으로 뭔가를 끄적이고 싶었다. 오랫동안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책장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공책 하나를 펼치고, 펜 한 자루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읽고 있는 책의 한 부분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내 손은 한동안 노트북에 익숙해 있었다. 노트북은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일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사람들과 연결시켜 주었다. 그것과 오랜 시간 함께 일하다 보니 내 손의 감각도 그에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말하는 속도에 맞춰 타자도 칠만한 손이 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펜을 잡으니 내 손이 참으로 어색해했다. 뭉툭한 연필을 잡는 감촉이며, 고요한 새벽에만 들리는 사각사각 소리며, 종이의 지면에 손이 닿는 느낌이 온통 낯설었다. 한동안 내 글씨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 글씨체가 이러했었나?” 너무 오랜만에 만난 이웃처럼 반가우면서도 조금은 거리를 둔 채 그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나의 경계심과는 별개로 손은 제 할 일을 해갔다. 그런데 문제는 눈과 생각이 손보다 훨씬 더 빠른 것이었다. 눈은 많은 것을 읽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쓰는 것이 그것을 쫓아가지 못했다. 그 새벽에 잔잔했던 나의 마음은 물결처럼 요동을 쳤다. 마음은 손을 향해 “빨리 따라오라, 왜 이렇게 느리냐”고 다그치는 듯했다. 손은 겨우겨우 쓰면서, 고요한 그 순간을 향유하기보다는 그를 쫓아가기에 급급했다.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 채 손은 이내 지쳐버렸다. 손과 마음의 괴리가 매우 컸던 것이다. 그 거리감과 충돌에 나는 결국 혼미해지고 말았다.





  나는 현대인의 빠른 생활에 물들여 있었다. “시간 없어, 더 빨리, 효율적이어야 해” “좀 더 속도를 높여야 해” “이렇게 해서 언제 끝내겠니, 할 일이 너무 많잖아” 내 마음에 새겨진 무수한 목소리가 생활의 모든 순간에 나를 재촉하며 나를 이끌고 갔다. 아이를 낳고 난 이후에는 일터와 가정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이 매일매일 끝내야 하는 숙제와 같았다. 이러한 일상의 흐름은 잘 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내게 주어진 많은 노동 속에서 이루어진 분별없는 나의 선택들은 나를 효율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 노동들은 내가 꼭 해야 할 것도 있었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었지만, 나의 묵인 아래 허용된 것이었다. 


  그런데, 쓰고 쓰면서 새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의 재촉하는 소리에 피곤해진 손은 구원자가 나타나기를 바란 듯이 이 소리에 귀를 바짝 대었다. 


“괜찮아! 좀 천천히 써도 돼” “빨리빨리 사느라 그동안 고생했다” “그 많은 걸 어떻게 다 하고 살았니? 이젠 좀 속도를 늦춰볼까?” “너만의 속도대로 가도 돼” “슬로우, 슬로우~~”.

 

  어느 새벽의 필사는 그렇게 묻혀 있었던 나의 여러 감각을 깨우쳐 주었다. 날이 밝기 전의 몽롱한 정신이 깨어나기 시작했고, 의무감으로 해내야만했던  일상의 실상이 폭로되었고, 잠자던 영혼이 흔들렸고, 좋은 글이 새겨짐에 마음은 반가워했다. 움직이는 손길을 따라 흔적을 남긴 몸의 한 부분도 좋아하는 듯했다. 


  이제 매일 무언가 읽고 쓰는 것은 나만의 수행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쓰면서 몸과 마음과 생각의 시간이 통합되도록 새롭게 나를 재형성 해가고 있다. 아직은 손과 마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보조를 맞추는 중이다. 마음이 여전히 손을 주도할 때도 있고, 손이 자신의 감각을 믿고, 불필요한 소리를 거절하면서, 당당하게 자신만의 속도를 유지하기도 한다. 언젠가는 어깨동무하며 평화롭게 하나가 되는 순간이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공저 수필집 <울음을 풀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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