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 써 봤더니
평생직장이 사라져 가는 시대를 보내고 있다. 1인 기업과 자신의 이름을 브랜딩해야 한다는 외침이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퇴직 후 이제 더 이상 조직에 매이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프리랜서로 일하고 싶을 때 일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책을 좋아하다 보니 책과 관련된 일은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오랜 시간 드문드문 때론 몰입해서 책을 읽고 또 읽어왔다. 그러다 보니 몇 년 전부터 누군가의 책을 읽는 것을 넘어, 나도 책을 쓰고 싶다는 막연한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러나 분주한 일상은 이내 이 마음을 애써 외면했다. 나만의 생각과 감정을 종이에 투영해 내는 일과는 그리 상관없이 살아왔다. 그저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서 글을 쓰는 정도였다. 일기도 꾸준히 써보지 않은 나이기에 무슨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훈련되지 못한 몸은 나에게 쓰지 않아도 될 온갖 핑계를 안겨다 주었다.
퇴직 후 6개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의 일상은 읽고 필사하고 쓰는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거의 나의 몸은 바깥세상과는 담을 쌓고 지냈다. 하지만 또 다른 세상인 온라인은 나를 세상과 연결해 주는 창구였다. 세계 각국의 수많은 사람의 일상 속 사진과 영상들은 나에게 말을 건네 왔다.
여러 모임이 온라인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독서 모임, 습관 모임, 글쓰기 모임, 공구 모임 등등 많은 만남이 이곳에서 전시되고, 코로나로 단절된 서로를 연결 짓고 있었다. 함께 하는 힘은 세기에, 많은 이들이 이곳을 통해 자신들의 관심사를 따라 삶을 세워가고 있었다. 이전에 이미 오프라인 공간에서 비슷한 모임들을 많이 해 왔지만, 해 보지 못한 한 모임이 유독 내 마음을 두드렸다. ‘책쓰기 모임’이었다. 한쪽에 묻어두었던 욕망이 다시 수면 위로 고개를 들었다.
퇴직 후 잠시 은둔의 시간을 보낸 후 나만의 세계에서 나와 세상으로 다시 나가야 함을 알고 있다. 그런데 지나온 길들을 되짚고 내 앞의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해서라도 어떤 정리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무언가 써야 할 거 같은데 나의 게으름과 회피는 수 없는 멈춤을 반복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 책을 쓰기로 결정했다. 지난여름 집중해서 뜨겁게 글을 써 갔다. 부족한 글솜씨, 타인의 시선 이런 것들을 다 내려놓고 그냥 썼던 거 같다.
가을에 첫 책이 나왔다. 책쓰기 책은 여러 권 읽어 이론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책 한 권을 온전히 써내는 일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주제와 목차를 정하고, 기획서를 만들고, 초고를 쓰고 퇴고를 해 출간을 했다. 그러나 책은 쓰기만 하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홍보와 마케팅을 거치며 그 후의 많은 일을 해 가야만 조금이라도 내 책이 드러날 수 있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시간에 나를 노출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는 괜히 책을 썼나 하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
책 한 권 냈다고 삶이 그리 달라지지는 않는다. 유명인이 아니라면 그리고 정말 스테디셀러와 같이 훌륭한 작품이 아니라면 돈도 명성에도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작가들에게 주어지는 인세는 크지 않으며, 대단한 필력과 신선한 소재, 깊은 전문성, 탁월한 마케팅 실력이 없다면 책 한 권은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가닿기도 전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그럼에도 책이 나를 만들어갔듯이 나도 책을 만드는 사람이 된 것에 대한 만족감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내가 계속 책을 먹고 소화하고 되새기는 과정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계속 글과 책을 써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기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SNS로 연결된 수많은 북리뷰어들을 보면 내 주위에는 온통 책 읽는 사람들뿐인데, 통계로 보이는 우리나라 독서 인구는 여전히 낮다. 너무 저조한 수치는 한껏 독서 자극을 가져다 주나, 곧 각자만의 바쁜 일상 속에 매몰되어 읽는 것과 멀어진다.
SNS 속 짧은 글들을 흡입하며 살아가는 시대이기에 긴 글을 읽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인지 ‘문해력’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문자를 읽는 문해력은 100% 가까이 되지만, 글을 읽고 해석하고 창조하는 실질 문맹력인 문해력은 매우 낮다. 이는 종이책을 생산해 내는 출판 시장이 좋지 않다는 것과 연결된다. 읽는 사람보다 책을 쓰는 저자가 더 많아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웃픈 이야기도 들린다.
그럼에도 나는 뭐하려고 계속 글을 쓰려고 할까? 글을 쓰고 책을 쓰다 보니 작가들에게도 글쓰기는 두려움라는 것을 알았다. 다양한 울림이 담긴 스토리의 문학을 쓰는 타고난 천재 작가든,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담긴 실용서를 쓰는 작가이든 모두가 흰 종이, 또는 흰 화면의 막막한 공포를 직면하고 있었다. 작가들도 종이의 공포를 이겨내고 은유 작가가 표현했듯이 '한 문장 한 문장을 밀고 나간다'라는 것을 알았다. 작가라는 말에 '짓는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들은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의 조합을 수없이 쌓고 무너트리면서 살아간다. 아이가 레고를 하나하나 쌓아가듯 글자라는 조각들을 쌓고 맞춰가면서.
작년에 우연히 들어간 수필 모임에서 수필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 함께 글을 짓고 도서관의 지원으로 책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올해 퇴직의 이유로 슬며시 빠져나왔다. 쉼의 이유도 있었지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그 속에 깊이 박힌 무언가를 끄집어내야 하는 시간을 조금은 회피하고 싶었다. 자신을 대면하는 시간은 쉽지 않고, 자신의 삶을 엿보고 글이라는 정제된 언어로 다듬는 것 또한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마음과 몸의 에너지가 들어가야 하는 노동이다. 글쓰기라는 행위를 앞에 두고, 버릴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경계에 서서 나는 늘 망설인다. 깊숙이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가도,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밀당은 계속된다. 내 안의 욕망을 철저히 숨기고 싶은 마음과 드러내고 표현해서 나를 알리고 나누고 싶은 마음과 늘 싸운다. 한없는 나만의 은둔으로 들어가고 싶기도 하고, 세상 밖 끝까지 나가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소통하고 싶은 욕구로 늘 갈등한다.
무언가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다. 누군가는 글로, 누군가는 그림, 사진, 말, 영상로 자신을 드러낸다. 도구는 다르지만, 인간은 고대 때부터 동굴 속 벽에도 그림을 남긴 존재들이 아닌가.
오스트리아 빈의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기적으로 살아남아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작품을 남긴다. 그는 아무리 하찮은 일에도 숭고한 생의 의미가 있으며, 이것을 찾아낼 슬기와 지혜를 닦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로고테라피’라고 말했다. 인간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그 속에서 한 줄기 의미를 발견한다면 어떤 힘들고 지루한 일상 속에서라도 살아갈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글쓰기는 의미 줍기다. 내 비루한 일상에 의미를 찾기 위해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글을 쓰는 시간은 의미를 묻고 캐내는 시간이다. 그 의미의 힘으로 값없이 주어진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아니 글을 써야지만 속도의 시대에 일상을 잠시 멈추고, 나와 일상, 세계를 들여다볼 시간을 조금이라도 얻는다. 그때 진실이 폭로되고, 수면 밑에 숨겨졌던 의미가 드러나는 그 과정이 시작된다. 이것이 내가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바야흐로 콘텐츠 세상이다. 콘텐츠를 표현하는 플랫폼은 다양한다. 나 또한 주로 머무는 플랫폼이 있다. 플랫폼은 새로운 기술의 생산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콘텐츠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표현하고 저마다의 의미를 나눈다. 그것이 인정을 위한 것이든 돈을 위한 것이든, 그렇게 자신을 표현하고 또 누군가의 것을 소비하면서 의미들은 확장되고 섞이고 재생산될 것이다.
한편 의미를 찾아 콘텐츠 세상을 누비러 다닐 것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저마다의 일상을 살아갈 의미와 힘을 얻는다. 나의 글쓰기 노동은 그 어딘가에서 서성이고 방황하며 또 밀당도 계속될 것이다. 어떨 때는 낯선 이와의 첫 만남과 같이 대면 대면할 것이다. 어떨 때는 자리를 꿰차고 앉아 휘발되어버릴 수 있는 조각조각의 의미들을 주워 담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기대와는 다른 나의 글쓰기 실력에 실망할 것이다. 때로는 생각지도 않던 찬란한 의미를 발견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글 쓰는 사람들 속에 앉아 있다.
공저 <원주수필 2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