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이담 Apr 16. 2021

동대문 최 사장님의 피 말리는 하루

09 할머니도 나처럼 워킹맘이었다


오늘 할머니 컨디션이 좋으시다. 인터뷰할 거리들을 미리 생각하셨는지 앞에서 이야기를 다 못했던 것들을 꺼내 오신다. 인터뷰 몇 번 만에 많이 익숙해지신 모습이다.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며칠 전에 할머니 교회 친구분께서 돌아가셔서 할머니가 좀 속상해하시는 것 같다고. 그래서 전화를 하기 전에 좀 걱정을 했는데 할머니 목소리가 그래도 밝다.



할머니: 40대 때 엄마랑 이모랑 삼촌이랑 삼 남매가 대학 생활을 하는데, 돈이 없어서 너무 힘들고 어려웠어. 할아버지 월급만 가지고서는 셋을 다 가르칠 방법이 없었지. 그래서 동대문 시장에 상가가 있어서 거기서 장사를 시작했어. 마침 할아버지 친구가 원단 사업을 하는데 그 물건을 대준다고 해서 내가 그 물건을 갖다 팔아서 등록금을 갚고 갚고 했어. 그때 조금씩 가게가 커 가지고, 사람 셋을 둬서 운영을 하게 됐어.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 어느 날 빌라에서 넘어져서 크게 다쳤는데 입원했는데도 일은 해야 하니까 전화로 어떻게 어떻게 하라고 일러줘 가면서 장사를 했어. 또 퇴원해서는 차가 없어서 목발 짚고 동대문에 다니면서 장사를 했지.


엄마는 강하다. '자식 뒷바라지'라는 목적이 없었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할머니: 그때 빚 안진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어. 그때 돈을 받고 주는 일이 너무 힘들었어. 물건은 잘 나갔는데 월 말 되면 외상값 받느라 고생했던 생각이 나. 돈이 제대로 들어오질 않으니까 마감날이면은 물건 값을 줘야 할 텐데 피가 마르는 것 같은 그런 심정으로 살았어. 날짜는 부득부득 마감일이 오는데 돈이 안 들어와서 걱정이 돼서 나도 외상값 받은 사람들한테 독촉을 하지. 물건 가져간 집으로 전화를 하면은 어떤 집은 말이 없는 거야. 그러고서 돈이 잘 들어와야 다음 날 갚을 텐데 그러질 못하니까 혼자 애를 타다가 집에 가는 거지.


나도 회사에서 영업 부서에 있었기 때문에 자영업자의 심정 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그 심정을 안다. 그 피 마르는 심정을. 돈이 안 들어오는 것도 문제고, 돈이 나가야 하는 것도 문제다. 사실 물건 파는 일에서 그런 것들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간이 웬만큼 크지 않고서는 버티기가 힘들다. 할머니도 그때 나보다 더 힘든 마음으로 버티고 또 버텼으리라.


할머니: 그 날 저녁에는 밤에 잠도 안 자면서 기도를 하는 거여. 하나님한테 왜 나한테 이렇게 힘든 일을 시키냐고 원망도 하면서 그렇게 밤을 거의 새우다 시피 하면서 기도를 했어. 그 다음날 죽으라면 죽으라는 시늉도 해야겠구나 하면서 출근을 하지. 가게에 가서 기도 간~절하게(정말 간-절한 말투로 이야기를 하셨다) 하면서 돈 줘야 하는 원단 공장으로 전화를 해. 그리고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이 미안하다고 돈이 안 들어왔다고 먼저 전화를 하니 원래 같으면 길길이 날뛸 사람인데 "할 수 없죠 뭐." 하면서 넘어가게 됐어. 그리고 다음 달 초순에 돈이 들어오는 대로 공장에 대금을 갚았어.

 

잘 되는 날은 또 잘 되는데, 안 되는 날은 그렇게 피가 마르는 느낌이 들 정도로 힘들었어. 그때 그래도 할아버지 월급에다가 내가 조금 보태 가지고 삼 남매 대학 공부를 시켰어. 내가 대학은 안 나왔어도 우리 애들은 공부 잘 시켜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일을 했거든. 그래도 다 지나 보니까 내가 바랐던 것들이 다 이루어졌어. 그래도 세 놈들 다 남부럽지 않게 제 구실 하면서 사니까 지나고 보니 그게 다 하나님의 은혜더라.


너도 그러니까 믿음 생활 잘하고, 네 아들 믿음 안에서 잘 키워.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면 안 주시는 것 없어. 그때 금방은 안되더라도 지나고 보면 늘 더 주셨었어.


할머니는 또 이렇게 훅 들어오셨다.


할머니: 내가 그렇게 어렵게 장사할 때 엄마가 결혼을 했어. 그때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었어. 얼마나 없었냐면 너희 할아버지가 보너스를 탔는데 그 돈도 물건 값으로 줘야 한다고 말하고 대금을 갚았던 때였어. 그때 시절에는 내가 또 엔간히 장사도하고 할아버지도 교직에 있고 해서 안면은 많은데, 혼수가 큰 걱정이었어.

다행히 마침 그때 한 오백만 원짜리 계를 들었어. 마침 그때 계를 탔어. 그게 나를 살려줬어. 그래서 계 탄 돈에다가 조금 보태서 엄마 결혼식을 치렀지. 그래도 너희 엄마는 시골집에 시집을 갔어서 그냥 우리가 해가는 대로 사돈댁에서 받았어. 그때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 한복을 꽤 고급으로 해 갔었어. 아주 좋아하시더라던 기억이 나.


그렇게 해서 너희 엄마가 결혼을 했는데, 그 다음다음 해인가 또 너희 이모가 결혼을 한대. 졸업하자마자. 엄마는 직장 가진 후에 결혼이라도 했지 이모는 직장도 없었는데. 진짜 그때 어떻게 했는지 내가 모르겠다. 이모가 시집가는 집엔 아들 하나라고 이모 시어머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몰라. 바라는 게 얼마나 많은지 뭣도 해오라 뭣도 해오라 해가지고 그때 내가 아마 살이 몇십 킬로 빠졌을 거야. 사돈이 하도 우리 집을 무시하고 뭐 해오라고 하는 바람에. 해 달라는 거 다는 못해주고 시늉만 내서 너희 이모가 시집을 갔어.


그러고 보니 할머니, 엄마, 나 모두 일하는 엄마였다. 내 아이는 지금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두고 회사에 출근하는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며 육아도 하는 게 체력적으로도 많이 힘들다. 엄마나 할머니처럼 아이들을 가르치고 또 시집 장가보내기까지 뒷바라지하기가 쉽지는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 가게 할 때 다른 추억은 없으셨어요?


할머니: 아, 그때 내 동생이 나보고 집에 들어가서 회고록이나 쓰라고 그렇게 못살게 굴었어. 지가 사장 노릇하고 싶어서. 할 수 없이 옷 가게를 뺏겼어. 사실 달라고 하거나 말거나 내가 하면 됐는데 나도 장사가 재미가 없고 힘드니까 가게를 넘기게 됐지. 그런데 동생이 가게를 몇 년 하지도 못하고 빛에 쪼달려서 (잠시 말 멈춤) 죽었잖아.


내가 맨날 체크는 했지, 빚이 얼마냐 했는데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누나가 하던 대로 하고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하더니. 그러더니 빚이 그렇게. 사실 그렇게 큰 빚은 아닌데. 그게 팔자여. 너무 돈 욕심을 부려가지고.


할머니는 내가 글을 쓴다고 하니 자신에게 회고록을 쓰라고 했었던 남동생이 기억이 나셨나 보다. 자연스레 다른 화젯거리로 돌아갔다. 할머니가 슬픈 기억을 별로 꺼내고 싶어 하지 않으시다는 느낌이 들었다. 동생이 사업에 실패하고 할머니가 자신을 자책하는 날들이 많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죽음, 그것도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나보다 더 많이 겪었을 할머니의 목소리가 씁쓸하게 느껴졌다.


Photo by Jeewoong Kang(instagram @nokchamini)

이전 08화 아파트 동 전체에 흰 떡 돌린 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