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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희 북노마드 Jun 01. 2021

소진된 인간



다 귀찮다. 그저 놀고 싶다. 뭘 하고 놀까. 그 생각이 귀찮다. 여기를 갈까 저기를 갈까, 이걸 먹을까 저걸 먹을까, 이 사람을 만날까 저 사람을 만날까. 생각이 귀찮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검색’이 귀찮은 거다. 여하튼 모든 게 귀찮다. 결국 혼자서 하루를 보낸다. 좋은 선택이다. ‘편집자 놀이’로 돈을 벌어왔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이 책 저 책 만들어왔다. ‘강사 놀이’로 부수입을 챙겼다. 철학을 말하고 미술을 말하고 출판을 말하며 돈을 벌었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책을 만드는 일과 강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책을 읽어주는 독자가 존재해야 하고, 강의를 들어주는 청중이 자리해야 한다. 어디 일뿐인가.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만남을 갈구하고 실행하고 복기한다. 기왕이면 좋은 만남을 기획하려고 한다. 좋은 만남이란 무엇일까. 당연히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좋은’이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에게 ‘좋은’이란 만남으로 소진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꼽는 최우선적인 좋음이다. 그가 아무리 밥을 사고 술을 사고 나를 좋아해도 소진되는 만남은 피해야 한다. 좋지 않은 만남이다. 잘못된 만남이다. 


그렇다면 ‘소진’이란 무엇일까. 피곤함이다. 철학자 질 들뢰즈도 만년에 이 주제에 관심이 갔나보다. 소진된 인간! 생의 마지막까지 자신의 관심사를 철학적으로 사유한 사람. 철학은 그를 소진시키지 않았던 것 같다. 


다행히 국내에서도 『소진된 인간』은 번역 출간되었다. 출판사도 훌륭하다. 문학과지성사. 들뢰즈는 이 책에서 베케트 작품을 철학적으로 재해석했다. 철학자가 베게트를? 뭘 걱정하는가. 들뢰즈는 살아가며 한 번도 기존 생각을 답습한 적이 없다. 자신의 주 전공인 철학은 물론 소설, 시, 영화, 회화 등 다른 장르를 교직할 때에도 철저히 ‘다른’ 시각을 고수했다. 철학으로 예술을 바라보고 예술로 철학을 재해석했다. 


『소진된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는 베케트의 작품에서 ‘소진’이라는 특이성을 끌어낸다. 책에는 베케트의 네 편의 텔레비전 단편극이 등장한다. 「쿼드」 「유령 삼중주」 「한갓 구름만……」 「밤과 꿈」에 들뢰즈의 사유를 덧붙인 식이다. ‘텔레비전’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1970~80년대의 텔레비전은 지금의 스마트폰이 만들어내는 플랫폼의 변화와 같다. 베케트는 텔레비전 스크린이 송출하는 ‘이미지’의 물질적 가능성을 통찰했다. 동시대 최첨단 매체의 실험을 간파한 문학가의 실험작이다. 


텔레비전은 기본적으로 영상이다. 베케트의 극에서 카메라의 존재감이 두드러진 이유다. 기존의 단편소설은 등장인물이 끌고 간다. 네 편의 텔레비전 단편극은 다르다. 텍스트 속에는 시공간을 다시 설정하는 카메라의 시선이 존재한다. 영상은 결국 시간예술이다. 영상을 찍는 순간 시간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매체의 도구적 속성에 주목해 미디어 아트라 부르지만, 프랑스에서는 시간의 프레임을 중시해 ‘타임 아트’로 부르는 이치다. 베케트는 과거 그 어느 시대보다 강력한 시간의 프레임을 만들어내는 텔레비전의 속성을 알고 있었다. 텔레비전이 만드는 시간-이미지를 문장으로 생성해냈다. 


들뢰즈는 여기에 베케트의 또 하나의 시선을 찾아냈다. ‘소진’이다. 베케트의 단편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진이라는 공통의 지점에서 만난다. 들뢰즈는 말한다. “소진된 인간은 피로한 인간을 훨씬 넘어선다”고. 소진이 피로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피로’는 더 이상 무언가를 ‘실현’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다. 그러나 무언가 가능성은 남아 있다. ‘소진’은 다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은 상태,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상태다. 


그렇다고 들뢰즈는 소진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베케트 덕분이다. 성별도 이름도 나이도 없는 익명의 주체. 베케트는 작품 속 인물을 철저히 익명으로 내버려둔다. 그들에게서 가능성의 단어를 거둬들인다. 들뢰즈는 그 익명의 소진됨에서 생명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생명의 가능성이란 무엇일까. 운동이다. 움직임이다. 꿈틀거림이다. 그러나 들뢰즈가 바라본 베케트의 인물의 가능성은 다르다. 그들은 작용도 없고 반응도 없다. 들뢰즈에겐 ‘이미지 만들기’라는 마지막 창조 행위다. 자살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지만 1995년 11월 4일 폐암으로 고통 받던 들뢰즈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스스로 호흡기를 떼고 투신한 것도 그에겐 마지막 창조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들뢰즈에게 이미지는 대상이 아닌 하나의 ‘과정’이었다. 이미지는 느껴지지만 만져지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적 운동이다. 보이지 않을지라도 운동력을 가져서 이미지는 사라짐과 소멸의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 들뢰즈는 말한다. 이미지는 숨, 호흡이지만 꺼져가고 있는, 숨을 거두기 직전의 숨, 호흡이라고. 또 말한다. 이미지는 절멸하는 것, 다 타버린 것, 하나의 몰락이라고. 마지막으로 말한다. 이미지는 자신의 고귀함, 곧 영점 너머의 높이에 의해 그 자체로 정의되는 순수한 강도성, 오직 추락함으로써만 표현되는 순수한 강도성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우리 중 누구도 이미지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그것은 시에서 추출될 수도 있고, 하늘을 흘러가다 사그라지는 구름일 수도 있고, 깊은 밤 보이지 않지만 귓전을 흔드는 새의 울음일 수도 있다. 이미지는 자신의 에너지를 응축시키다가 스스로 소멸한다. 


들뢰즈에게 베케트의 인물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무언가 가능한 것을 실현하거나 실재화하는 능동적 주체’가 아닌 인물들. 실현하거나 실재화하는 의지가 없다는 건 실패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베케트의 인물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무화시키고 소진시키는 데 몰두한다. 무화와 소진이 불가능하면 가능성의 실현을 끊임없이 연기시킨다. 가능성을 가능하지 않게 만드는 자들. 그것이 들뢰즈가 해독한 베케트의 인물이다. 모두가 피로하다고 절규하는 지금, 우리는 소진된 인간을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가능성을 찾아 가능한 일을 찾아나서는 게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모든 가능한 것을 소진시키기. 타인과 시스템에 의해 피곤해지는 삶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소진되기. 


세상은 우리에게 새로움을 요구한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따라붙은 과제다. 우리는 착각한다. 새로움은 우리 삶 너머 초월적인 지평에 자리한 거라고. 그래서 노력한다. 좌초한다. 절망한다. 들뢰즈의 생각은 다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역량은 ‘우리 삶의 기저에 실재하는 생명의 잠재적 평면, 시간의 발생적 차원에 내재’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베케트의 텔레비전 단편극에 등장하는 인물, 즉 ‘소진된 신체들’에 주목한 이유다. 단편극의 등장인물들은 유기체로서 완전히 소진된다. 그 순간 생명에 내재한 창조적 역량이 도드라진다. 우리가 유기체를 생명으로 바라볼 때 들뢰즈는 유물론적으로 접근한다. 유기체는 단지 ‘생명을 가두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내려놓아야 한다. 모든 집착을 손에서 놓아야 한다. 단지 생명을 가두고 있을 뿐인 유기체를 내려놓아야 하고, 삶 너머 초월적인 지평에 자리한 거라고 믿는 새로움의 희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나에게 새로운 것은 누군가에겐 익숙한 것이다. 새로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움이라는, 희망이라는 헛된 꿈을 단념하면 고요한 현재가 눈에 들어온다. 지금-여기에 집중하게 된다. 삶이 풍성해진다. 내려놓으면 알게 된다. 내려놓으면 보이게 된다. 소진된 신체에 내재한 생명의 창조적 역량이. 생의 이치는 거꾸로 돌려놓을 때 드러나는 법이다. 


베케트의 소진된 신체는 텔레비전 단막극 안에 머무는 가상의 실체가 아니다. 내가 스스로 소진된다는 것은 나를 힘들게 하는 자아와 근거를 향한 집착을 경계하게 만드는 가르침으로 작용한다. 소진된 인간은 육체가 죽으면 함께 사라진다고 여겨지는, 그리하여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자아를 넘어선다. 그 자리엔 ‘진아(眞我)’가 있다. 나를 나로 실감하게 만드는 변하지 않는 나. 


『수학의 선물』의 저자 모리타 마사오는 대상으로부터 분리된 ‘자아’가 아니라 대상과 서로 통하는 ‘진아’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을 삶이 더 깊어지는 일에 수학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며 지내는 독립연구자라고 소개하는 마사오는 수학의 본질은 아직 보이지 않는 연구 대상에 관심 모으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마사오에게 수학은 들뢰즈의 이미지다. 수학의 본질에서 간파한 ‘진아’는 우리의 일생이 길고 먼 여행을 하는 과정이라고 여기게 만든다. 들뢰즈가 대상이 아닌 과정으로 파악한 이미지와 겹친다. 생각만 해도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개념을 버리자, 사실 관계를 버리자, 의미를 버리자, 오직 눈앞의 지금에 눈뜨자. 


풍요로움은 말과 개념과 대상과 사실의 바깥에 있다. 말과 개념과 대상과 사실의 내부에 머물러 있으면 피곤해진다. 바깥으로 나가자. 스스로를 소진시키자. 소진 이후의 생명력에 나를 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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