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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의 책놀이터 Dec 09. 2015

[서평] 나의 신의 다른 이름은 사랑이시라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깊은 강>, 민음사, 2007

얼마 전 미국에서는 끔찍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약관을 갓 지난 딜런 로프(21)라는 이 청년이 한 흑인교회에 침입해 생일선물로 받은 총기를 흑인 교인들에게 난사한 것이지요. 범행은 철저히 계획적이었다는 점에서 놀라웠고, 더욱이 인종혐오의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경악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피해 유가족들의 용서와 관용이었습니다.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이들이 오히려 가해자인 딜런 로프를 걱정하고 용서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에 깃든 신의 모습을 살포시 엿볼 수 있었습니다. 독자님이시라면 신의 경지에 이른 이 사랑을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문제는 영화 <밀양>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엄연히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뉘고, 피해자는 (앞의 흑인 피해자 유가족과는 달리) 아직 용서하지 못했는데, 가해자는 이미 신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아버린 것이지요. 죄, 회개, 용서, 관용, 구원 등 수많은 단어가 머리 속에 복잡하게 얽힐 것입니다. 잘 정리되지 않는 이들 사이에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사랑이라는 대피소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마음의 안식을 찾아 종교에 귀의하는 것은 바로 이 사랑의 처마 밑을 찾아 분노와 증오, 고통의 장마비를 잠시 피하기 위한 것이지요.

자 여기 네 사람이 있습니다. 성별에서 연령, 학력 등 사회적인 조건들이 저마다 다른 이 넷은 단 하나의 공통분모로 묶여 있습니다. 바로 인도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힌두교의 나라인 인도에 불교유적을 찾아 간다는 것이지요. 이 기묘한 여행을 떠나는 네 명은 각각의 사연을 안고 있습니다. 그 사연을 모르고는 이들의 인도여행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의 유언 "다시 태어날테니 나를 다시 찾으라"를 따라 인도에서 아내의 환생을 찾으려는 이소베, 도무지 세상과 자신이 사랑스럽지 않아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한 미쓰코와 (중심인물에서는 약간 벗어나지만 큰 존재감을 보이는 조연인) 그녀와 대학동기로 신실한 신학생이었으나 미쓰코에게 농락당한 오쓰, 죽을 병을 이겨낸 뒤 인도여행을 결심한 동화작가 누마다, 일제의 태평양전쟁에 참가해 미얀마전선에서 전우들의 시체를 짓밟고 간신히 살아 돌아온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기구치가 작품의 주요테마인 인도여행에 참가합니다. (오쓰는 여행에 참가하는 멤버는 아닙니다)

간략히 살펴본 이들의 과거는 사실 인도여행의 직접적인 이유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소베의 경우에는 그래도 좀 설명이 되지요. 미쓰코의 경우에는 자신이 농락하고 차버린 오쓰의 신앙심, 즉 오쓰의 신에 대한 사랑에 강한 의문과 질투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후에도 오쓰를 잊지 않고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있어 합니다. 프랑스 리옹에서 사제를 하던 오쓰가 인도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오쓰가 궁금한 편 아니면 스스로의 정체를 찾아서 두루뭉실 인도행을 결정합니다. 누마다는 자신이 목숨을 건 수술을 벌일 때 키우던 구관조를 생각합니다. 수술이 성공하고 구관조가 죽자 그는 구관조가 자신을 대신해 죽었다고 생각하고 구관조의 고향인 인도행을 결심합니다. 기구치는 참혹한 미얀마 전선에서 죽어간 전우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정신의 고향이라 불리는 인도로 향하게 됩니다.

대략의 내용은 평탄합니다. 갈등 가득한 전개나 갈등, 극적인 반전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저 네 사람을 중심으로 그들이 살아왔던 이야기와 인도여행의 각 부분이 묘사돼 있을 뿐입니다. 이런 지루한 이야기를 굳이 리뷰하는 이유는 맨처음 언급한 사랑과 신,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엔도 슈사쿠는 일본 가톨릭 문학의 거두로 불리는 작가지요. 그의 작품인만큼 작가의 종교관과 오늘날의 종교의 역할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겠습니다. 우리에게 종교와 신은 무엇인지, 신이 설파한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독자님들께 깊이있게 물어오기도 할 것입니다.

위의 등장인물들처럼 우리는 각기의 사연을 가지고 삽니다. 그 사연은 행복한 것일 수도, 불행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상하게도 인간은 불행했던 상처를 더 많이 안고 사는 것 같습니다. 자녀의 출산이란 행복보다는 자녀의 급작스런 요절이란 불행이 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 큰 것처럼 말입니다. 일시적이고 큰 불행도 있지만 사소하면서도 끊임없는 불행도 많지요. 직장상사의 지속적인 꾸지람, 부부 간의 불화와 말다툼 같은 것을 생각해 보시면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을 외롭게 합니다. 고독한 인간의 심장은 텅비어 있기에 무언가를 채워넣지 않으면 쪼그라들기 마련입니다. 쪼그라든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근원적으로 고독한 인간에게 종교는 말합니다. 인간은 소중한 존재이고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수의 한 마디는 바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가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주말에 예배당에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며 서로 축복하던 이들은 예배당의 입구를 벗어나면 일상인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다들 쪼그라든 심장에 신의 사랑을 가득 채우고 나서 입구를 벗어나자마자 쏟아버리고 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6일 동안 아픈 가슴을 움켜쥐고 살아가지요. 엉뚱한 곳에서 신과 신의 사랑을 찾으면서 말이지요. 누마다가 보았던 것은 그런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매일 밤, 그는 이 구관조한테만 자신의 고민과 후회를 털어놓았다. 바로 소년 시절, 검둥이한테만 자신의 고독을 호소했듯이.
"마누라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너한테만 털어놓는 건데....... 죽는 건 역시 무서워. 살아서 좀 더 좋은 동화를 쓰고 싶어."
"걱정스러운 건, 만약 내가 죽고 나면 마누라와 아이들이 어떻게 생활해 갈까 싶어. ....... 어떡하면 좋으니?"
어떡하면 좋은니? 하고 말했을 때, 누마다는 자신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연극조로 울린 것이 쑥쓰러워졌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도 꾸밈도 없는 진심이었다.
"하, 하, 하, 하."
구관조는 웃음소리를 냇다. 그것은 겁쟁이인 그를 조소하는 웃음 같기도 하고, 격려하는 웃음 같기도 했다. 누마다는 병실의 전등을 끄고, 지나온 인생에서 진정으로 대화를 나눈 것은 결국 개나 새뿐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신神이 무언지 알 수는 없지만, 만약 인간이 진심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대상을 신이라 한다면, 누마다에게 신은 때때로 검둥이이거나 코뿔소새이거나 이 구관조였다.
-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지 옮김, <깊은 강>, 민음사, 2007, 141~142pp.


누군가에게는 강아지나 고양이가 될 수도 있겠지요. 누마다에게는 그것이 마당 강아지나 새장 안의 새들이었습니다. 그것이 쪼그라든 심장을 6일이나 채워주는 대상일까요. 사랑이란 참으로 신기한 것이 마냥 받는다고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많이 나눠줘서 채워지기도 하지요. 사랑을 동물에게 나눠줌으로서 스스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항상 의심하고 경계하고 때로는 증오와 분노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한 번 내려진 인상은 쉽사리 바뀌지 않습니다. 기억력이라는 녀석은 어제 읽은 교과서의 인물명은 금방 까먹지만 이런 증오와 분노는 잘도 보관하지요. 그래서 지속적으로 사랑을 방해합니다. 극단적인 사람들은 '검은 머리 짐승은 키우는 것이 아니다'고 말할 정도지요. 이것은 불행하게도 인간세상의 거의 모든 조직과 모임에서 벌어지는 현상임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대립이나 증오는 나라와 나라뿐만 아니라, 상이한 종교 간에도 이어진다. 종교의 차이가 어제, 여성 수상의 죽음을 낳았다. 사람은 사랑보다도 증오에 의해 맺어진다. 인간의 연대는 사랑이 아니라 공통의 적을 만듦으로써 가능해진다. 어느 나라건 어느 종교건 오랫동안 그렇게 지속되어 왔다.
-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깊은 강>, 민음사, 2007, 411p.


외부에서 증오의 대상을 찾지 못하면 내부에서라도 만들어내지요. 히틀러가 내부에서 유태인을 타겟으로 삼았듯 이 나라에서는 호남과 호남인을 타겟으로 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인간의 조직과 모임을 더욱 강고하게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역사보다 증오의 역사에 더 익숙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런 문화와 분위기 안에서 각 개인 역시 파편화 됩니다. 부당하게 차별받고 상처받는 이들을 보듬는 사랑이 반역으로 간주되고 같이 핍박 받습니다. 사랑의 연대가 받는 불이익과 고통을 지켜본 이들은 겁을 먹고 철저히 안전한 사랑만 실행합니다. 그 덩어리는 가족이라던지, 연인, 친구 정도의 소규모 단위에 그치기 마련이지요. 파편화된 작은 덩어리들간의 갈등만이 남은 세상에서 종교 역시 이를 포교에 이용하고 교세를 불리기에 바쁩니다. 세상을 치유해야 할 종교를 세속 사람들이 오히려 걱정해주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작가의 종교관과 오늘날의 종교의 역할 비교, 종교와 신은 무엇인지, 신이 설파한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충분히 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소개는 참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작가의 작품을 한 번쯤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러시면 보다 깊이있게 종교와 인간, 사랑의 의미를 느껴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미쓰코의 친구였던 오쓰의 편지글 일부를 소개하고 마무리할까 합니다. 고독에 몸서리치는 인간들을 진정 구원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미국 흑인교회에서 피해 유가족들이 보여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세상의 중심은 사랑이며, 양파(주-여기서는 신神을 의미함)는 오랜 역사 속에서 그것만을 우리 인간에게 보여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세계 속에서 가장 결여된 것은 사랑이며, 아무도 믿지 않는 게 사랑이고 비웃음당하고 있는 게 사랑이므로, 하다못해 저라도 양파의 뒤를 우직하게 따라가고 싶습니다."
-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깊은 강>, 민음사, 2007, 2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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