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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의 책놀이터 Dec 04. 2015

[에세이] 이 어이없는 상황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김진숙, <소금꽃나무>, 2007, 후마니티스

얼마 전 한 가게 앞에 붙은 아래 안내문이 화제가 되고 됐습니다. 간단하게 '무례하고 진상 떠는 손님 안 받겠다'로 요약됩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매장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우리 직원들은 '존중받을 만한 훌륭한 청년이며 누군가에겐 '금쪽같은 자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사진: 김승호 스노우폭스 대표 페이스북

이 고객 안내문 게시를 지시한 김승호 스노우폭스 대표(이하 김대표)의 10월 29일 페이스북 게시글은 '좋아요'가 3만 5천건을 넘었고, 공유는 2,700회를 넘어섰습니다. 한국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은 김대표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11월 2일 방송에 인터뷰이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게시물에 달린) 댓글들은 보셨느냐?"는 질문에 "(게시물을 보고) '울었다'는 댓글을 많이 보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작은 고객 안내문 하나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눈물을 자아내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독자님께서 잘 아실 것입니다. 갑질공화국이라는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인격이 난도질 당하는 일상을 견디며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례한 고객 뿐 아니라 몰상식한 상사, 갑질 거래처 등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쉽사리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 먹기 어렵다는 '남의 돈' 먹는 대가로 우리는 개인의 인격과 자존심을 저당잡힌채 살았던 것이지요. 이 부당함을 당당히 거부하는 조치가 취해졌을 때, 비록 나에게 해당되지는 않더라도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아무리 어렵고 모욕적인 일들도 묵묵히 참고 견뎌냅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뒤에 있는 가족들을 지켜내기 위한 처절한 자기 희생입니다.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수 십년의 세월 동안 가족의 보호막으로 살아온 부모님들의 노고를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지금보다 훨씬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시대를 살아온 분들이니 그 크기 역시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이 고통은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대다수의 자식세대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대물림되는 비극이며 현재진행형입니다.

지속적인 인격적 학대나 모욕적 언사는 단순히 인간을 모독하는 수준을 넘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집안 머슴처럼 부려지는 아파트 경비원은 누군가에게 금쪽같은 아버지이지 않을까요. 화물엘리베이터만 타야 하는 빌딩 청소노동자는 누군가에게 금쪽같은 어머니이지 않을까요. 백화점에서 수시간 동안 서서 억지미소를 지어야 하는 백화점 직원은 누군가에게 금쪽같은 딸이지 않을까요. 경비원도 청소노동자도 백화점직원도 그것 이전에 한 사람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며 딸이고 결국 인간입니다. 소위 '진상'들은 그들의 권리만 챙기느라 상대가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대우를 소홀히 했다는 점에서 비판 받아 마땅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내가 갑질을 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오만 진상을 다 떠는 인간들. 그런 인간들을 '손님은 왕'이라며 두둔하는 경영과 마케팅. 부조리를 외면하는 사회문화. 이런 야만이 계속되면 우리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이 책의 한 대목이 떠오르더군요. 조금 길지만 인용해 봅니다.


알몸이었다.
광자 언니도 영애도 순진이도......
배차 주임이나 기사들 정비사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담배를 꼬나물고 히물거리고 서 있는 것보다 더 이상했던 건, 알몸으로 서 있는 여자들의 무연한 태도였다. 남자들 앞에 알몸으로 선 그들의 표정이나 몸짓들이 하도 심상해서 내 눈에만 저들이 알몸으로 보이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앞의 아이들이 마치 여탕에서처럼 벗을 때와 마찬가지로 옷들을 주섬주섬 입고, 사감은 그날 내가 배치받았던 차 '남바'를 부르고 장부를 보며 입금액을 부른다.
눈앞에서 번연히 벌어지고 있는 적나라한 현실들이 본 적은 물론 들은 적도 없는 비현실이어서 사감이 "모 하노? 버스라!"하는데 웃었던 것 같다.
"니는 입금이 유달시리 짝네. 돈 어쨌노?니는 똥구멍까지 오지게 베끼야겠다. 내가 베끼까, 니가 버슬래?"
옷을 거머쥐고 그냥 서 있었다. 그들의 명령이 부당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이 내가 미처 숙지하지 못한 버스 회사에서만 통하는 일종의 게임 같은 걸 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겡찰 부리까?"하는 사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쟈는 겡찰 불러야겠네. 단다히 꼬불칬는갑다."
"겡찰서 저나하까요? 겡찰서가 멫 번이고?"
"빙시야, 멫 번은 멫 번이고? 일릴리 누질리고 여게 도둑 잡았심니다, 하마 오지."
둘러선 짐승들이 다들 한마디씩 했고 한 마리는 진짜로 전화기를 들기까지 했다. 그때까지 내게 경찰은 순사였다. 울어도 잡아가고 숙제를 안해도 잡아가고 남의 밭에 콩을 훔쳐 먹어도 잡아가는.
내가 삥땅을 안 했다는 결백함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옷을 벗는 일밖에는 없었고, 그래서..... 했다. 씨발. 아무리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해도 변명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고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도 용서되지 안는 일이 있다.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는 게 아니라 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어쩌자고 겨우 열아홉 살이었던 것이다. 순진하고 세상물정을 몰라서라기보단, 무력했다. 무력하기 짝이 없다 보면 타협하게 되고, 타협에 길들여지다 보면 그게 사는 요령이라고 믿게 된다. 인간임을 끊임없이 부정당하다 보면 스스로 부정하게 되고, 오로지 연명하는 일이 지상 과제이자 존재 이유인 이들에게 인간의 품위와 계급적 자존감이란 깨달을수록 성가신 일일 뿐이다.
- 김진숙, <소금꽃나무>, 후마니타스, 2007, 51~53pp.

생계를 볼모로 잡은 폭력 앞에 무력한 개인은 마음에서 피가 철철 흘러도 참고 견딜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상처는 아물지 몰라도 흉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언제까지나 남아서 그 아팠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가장 슬픈 일은 무력한 개인이 힘없는 자신을 탓하며 자신의 권리를 잊거나 혹은 포기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하고 대신 생존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야만으로의 회귀'라고 생각합니다. 수 십년에 걸쳐 어렵게 이뤄온 대한민국의 민주화 발전과 인권신장이라는 가치를 훼손하는 반동이지요. 버스안내양 아가씨들을 벌거벗겨 검사하는 야만과 백화점직원을 무릎 꿇려 사죄하도록 강요하는 야만이 그 사이 수 십년의 시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무척 닮아 있기에 매우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사회생활이 다 그렇지'라며 넘어가는 둔감한 인권적 감수성입니다.

김대표의 게시글에 '보고 울었다'는 댓글을 단 사람은 멀리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내 부모일 수도 있고, 내 형제 자매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나 스스로도 예외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김대표는 인터뷰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묻자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이번 일로 인해 한국의 많은 감정노동자나 필드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이 어이없는 상황에서 해방되는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보람을 느껴요."

사회생활이 다 그런 것이 아니라 어이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나 스스로는 어떤 손님인지, 어떤 상사인지, 또 어떤 거래처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이 어이없는 상황을 강요하는 사람이 있다면 눈여겨 보고 감시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김대표의 용기있는 행동이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이 되어 인권보장과 상식회복의 결단과 변화가 많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많이도 바라지 않습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부터 지키면 됩니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서 해방'되는데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회복하는데서 이미 절반은 성공하기 때문입니다.


*CBS <김현정의 뉴스쇼> 김승호 스노우폭스 대표 인터뷰 전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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