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섭 지음, 『대리사회』, 와이즈베리, 2016
오래 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친구와 그의 아내를 얼마 전에 만났습니다. 몇 년만에 만난 그들 부부 역시 저처럼 일상의 무게에 짓눌린 얼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대로 치더라도 오랜만에 벗을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마음만은 즐거웠습니다. 서로의 근황과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시간은 금새 흘러버렸고 술잔은 마르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국밥으로 해장을 한 다음, 근처 카페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수 년만에 한국을 방문한 그들 부부에게 한국의 변화는 꽤나 생소한 정도였다고 합니다. 특히 한국에서 '먹방'이 유행하는 것에 대해 놀라움과 궁금증이 있던 차였습니다. 그냥 원하는 것이 있으면 먹고 말지 왜 남이 먹는 것을 화면으로 보며 좋아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한국을 떠난 것이 수 년이 넘었으니 생활양식과 환경이 미국식으로 바뀌었을테지요. 사고의 폭과 방식도 바뀌었을 수 있구요. 그런 친구부부에게 한국의 먹방이 대리만족의 병리적 현상으로 분명히 느껴졌다면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친구부부의 말처럼 원하면 구해서 먹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먹지 못하고, 아니 먹지 않고 누군가가 먹는 것을 훔쳐봅니다. 그리고 만족합니다. 그런 방송은 단순히 인터넷방송에 머물지 않고, 케이블채널과 지상파채널에도 넘쳐납니다. 그런 수요가 충분히 있다는 말이지요. 먹을 것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왜 남이 포식하는 화면만 쳐다보게 되었을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최근에 읽었던 김민섭 작가의 『대리사회』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대학원 과정생 시절에 논문을 쓸 때면 항상 배가 고팠다. 그래도 연구실에서 치킨을 시켜 먹을 수는 없으니 남이 즐겁게 먹는 것이라도 대신 보고 싶었다. 인터넷에 '치킨 먹방'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누군가가 치킨을 먹는 영상이 등장했다. 그들은 복스럽게 잘 먹었고, 나는 그것에 적당한 만족을 느꼈다. 그런데 새벽의 연구실이라는 특수한 시공간에서나 보던 그러한 방송이 이제는 케이블 방송을 넘어 공중파로까지 진출했다. 이것은 정상적이거나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없다.
타인의 즐거움을 보며 대리로써 즐거워야 한다면, 역설적으로 나는/우리는 지금 그만큼 즐겁지 않다는 것이다. 현실이 만족스럽다면 남들이 먹고 노래 부르는 것에 지금처럼 필요 이상으로 열광할 이유는 없다. 결국 많은 이들이 새벽에 연구실에 앉아서 기약 없는 논문을 써 내려가는 것만큼이나 외롭거나, 아니면 절박한 심정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 김민섭 지음, 『대리사회』, 와이즈베리, 2016, 457p.
경제적 사정을 고려해서, 시간에 쫓겨서, 몸매관리를 위해 등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지요. 하지만 그 역시 본인들의 의지가 좌절된 나머지 기형적으로 나타난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치킨을 시켜먹을 수 있을 만큼의 소득을 그들의 고용주가 지불하고 있지 않거나, 치킨 한마리 시켜먹을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없을 만큼 일을 시켜대거나, 치킨을 먹음으로써 생기는 1mm의 피하지방도 용납받지 못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죠. 타인의 의지가 본인의 기본적인 식욕마저 통제할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에 '대리만족'을 모니터 화면에서 찾는 병리적 방식으로 욕망이 해소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김민섭 작가가 지적한 부분은 바로 그 대목이었습니다.
먹방을 가지고 이 정도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작가의 책 제목처럼 '대리사회'의 면모는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관찰됩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식당 하나를 생각해 볼까요? 누군가가 먹을 식재료를 대리하여 생산하고, 그 식재료로 누군의 식사를 대신 마련하고, 그 식사를 대리하여 차려주고, 먹은 자리를 치우고 설거지를 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자의 신분으로 자신의 노동을 팔게 됩니다. 소위 월급쟁이가 되는 건데요. 월급쟁이의 말과 행동은 부득이 월급주는 사장님, 그러니까 갑이 규정하는 그 선을 경계로 제한됩니다. 노동자의 몸은 근무시간 안에서 사장에게 철저히 통제당하죠. 노동의 주체는 노동자 자신이 아니라, 임금을 댓가로 노동자의 몸을 통제하는 '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장님들이 하나같이 '주인의식'을 강조합니다. 노동자에게 사업장에서 일할 때 '네가 사장처럼' 일해달라고 주문합니다. 하지만 노동자에게 그런 권리가 없다는 것은 노동을 팔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습니다. 내 것처럼 일하려고 나의 의지를 개입시키는 순간, 사장의 불호령이 떨어지겠지요. 사장의 의지를 대리하는 노동을 해야할 직원이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인다는 것은 임금을 주는 사장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일테니까요. 노동자의 주체성을 빼앗고서는 주인의식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모순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매장의/학교의 주인처럼 일하라'는 수사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이것은 정말이지 파렴치한 역설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탈하는 동시에 그 빈자리에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자신을 주체로 믿는 대리가 된 노동자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열정 착취'보다도 한 단계 진화한 방식이다. 노력뿐 아니라 행복과 만족까지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영혼 착취'라고 규정하고 싶다.
- 김민섭 지음, 『대리사회』, 와이즈베리, 2016, 371p.
이런 모순을 깨닫는 노동자도 있지만 대부분의 대리인간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삽니다. 재래식 화장실에 너무 오래 있다보면 어느 순간 구린내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중독돼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회사의 방침(이라고 쓰고 오너의 독단이라고 부른다)을 내면화하여 대리인간의 주제를 망각한 사람들 많이 보시지 않았는지요? 대감마님의 어심을 읽고 스스로 아랫것들 앞에서서 불호령을 내리는 마름을 현대사회에서는 이사, 부장, 차장 이런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10년이 넘는 근속기간을 자랑하는 사람 치고 주체로서의 자아를 보여준 이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앵무새처럼 회사의 방침과 조직의 이익이란 레토릭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었죠. 확신범이 돼서요. 이런 대리인간들, 독자님들 곁에도 몇 명은 있지 않습니까?
나름 열심히 사는 것은 좋지만 착각은 곤란합니다. 주인의식을 가지라고 해서 당신이 주인이라는 뜻은 아니니까요. 주인은 엄연히 따로 존재하며 노동자는 단지 그 주인의 의지를 대리하고 있을 뿐이죠. 대리기사를 불렀을 때 차주가 "편하게 운전하시구요, 집까지 안전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운전석에 앉은 대리기사가 차의 주인은 아닌 것처럼요. 이 간단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가슴은 허전하고 삶은 외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희망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깨닫고 주체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습게도 직급이 높고 월급이 많은 사람들보다는 고용이 불안정하고 대우가 나쁜 일에 종사하는 분들이 더 많습니다. 노동의 치열한 경계면에 서있는 분들의 경험에서 우러난 직관이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사람보다 예민해서 그런가 싶습니다. 대학이라는 사회의 일부분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김민섭 작가가 생업의 전선으로 나와 치열하게 살아가며 남긴 기록이 더욱 예리해진 것과 같이 말입니다.
『대리사회』에서 김민섭 작가의 성찰은 노동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개인의 감정과 (인간 혹은 가족)관계 등에 대한 대리사회의 영향을 세심하게 성찰합니다. 이전 작인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에서 보여준 것처럼 작가의 성찰은 솔직하고도 담담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 역시 그의 글이 가진 이 솔직함과 담담함에 매료돼서 내용 안보고 사서 읽었습니다. 김민섭 작가 때문에 작가 편애가 심한 제 성향을 고스란히 고백하게 되었군요. 어쨌든 이 솔직한 작가의 글은 제가 쓴 것처럼 비장하거나 날이 서있지 않습니다. 편안하게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다 읽고 책을 덮고 나면 가슴에 조용한 파동이 울리지요. 자연스럽게요. 노동자로서의 자아를 고민하는 독자시라면 한 번쯤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