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변시지 그림에 양진건 시

by 양진건

태풍


검은 태풍이 올 때 그대여, 도망치듯 섬을 떠나지 마라

검은 섬은 무서운 시간 속에 태풍이 잉태한 자손이니

오히려 태풍이 없을 때를 분노하라

그것은 사막과 불임의 시간.

검은 태풍이 올 때 섬의 한 가운데 웅크리고 앉아

그것이 오기 전과 후만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그 중심에 들어가 태풍을 받아들여라.

결국 끌려가면 모든 게 엉망이 되니

주인처럼 거친 바람과 해일을 응시하라

주변이 비록 하얀 이를 드러낸 날선 파도뿐이어도

그것은 반역과 잉태의 시간.

그러므로 그대, 봉두난발의 외로운 사내여

지금은 회피하고, 도망 칠 시간이 아니니

끊임없이 통증이 밀려오고, 술과 약으로도 막을 수 없더라도

검은 태풍이 올 때면 섬의 한 가운데를 잔뜩 웅크리고 앉아

주인처럼 어둠과 뜨거운 싸움을 응시하고, 응시하라


태풍 / 변시지


<"폭풍의 화가"라 불리는 변시지는 1926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1945년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 조선인 최초로 일전(日展)에 입선하였으며, 1948년 일본의 최고 중앙화단인 광풍회의 최고상을 수상하였다. 1957년 한국에 돌아와 서라벌 예술대, 한양대 등에서 가르쳤으며, 1975년에 제주대학교로 옮겨 작품활동을 하였다. 2013년 6월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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