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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스토랑 Jun 30. 2020

유아인의 Flex, 왜 겸손이 미덕일까?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 그리고 약자의 도덕


<나 혼자 산다> 중 한 장면 (출처:MBC)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한 유아인. 나는 과연 유아인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80억짜리 집에서 살면서 1억 5000만 원짜리 차를 끄는 35살 성공한 배우는 부를 마음껏 뽐내며 자신의 성공을 과시할까? 아니면 생각보다 검소하고 소소한 일상을 보여주면서 겸손한 모습을 보여줄까?


당신이 유아인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자신의 부를 과시하면 건방지고 오만한 젊은 배우라고 욕을 먹을 것이고, 또 지나치게 소소한 모습을 보여주면 가식이라고 또 욕을 먹을 것이다. 게다가 배우는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직업일진대, 어떤 쪽을 선택하든 가시밭길이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 따로 없다.



유아인이 보여준 창의적인 답안


<나 혼자 산다> 중 한 장면 (출처:MBC)

그런데 방송에 등장한 유아인은 현명하게 이 어려운 문제를 풀어냈다. 값 비싼 집에서 명품 식기들을 가지고 골뱅이 무침을 해 먹고, 비싼 차를 타고 명상 운동을 하러 간다. 집 곳곳에는 예술작품들이 일관성 없이 여기저기 놓여있고, 비 오는 밤에 뜬금없이 혼자 산책을 나가 고독을 씹는다. 유아인은 자신의 부를 굳이 숨기지도 그렇다고 과시하지도 않으면서 예술과 명상의 세계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는 이 문제를 멋지게 해결하면서 신비로운 이미지를 얻는 데 성공했지만, 그를 보고 있자니 어딘가 불편해 보인다. 자신의 노력과 재능으로 막대한 성취를 이뤄낸 그가 왜 마음껏 자신의 부를 자랑해서는 안되는가? 왜 우리는 겸손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비판과 비난을 할 준비를 하고 있을까? 왜 겸손은 미덕이고 상식이 된 걸까?


그 상식에 물음을 제기해보자. 왜 인간은 겸손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자신의 성취를 마음껏 뽐내며 더욱더 높은 성취를 위해 전력투구해서는 안되는가? 왜 우리는 혹여나 박탈감을 느낄지 모르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나의 성취에 충분히 기뻐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해야 하는가?



우리가 믿는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


어떻게 겸손은 현대에서 와서 미덕이 되었을까? 이에 관해 니체는 흥미로운 분석을 한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도덕의 변천사를 분석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누군가가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도덕적인 사람을 뜻하고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라고 말하면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을 뜻한다. 현대에서의 좋음과 나쁨은 도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니체에 의하면, 처음에 좋음과 나쁨이라는 단어에 도덕적인 의미는 없었고 원래는 기능의 좋고 나쁨을 뜻하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좋고 나쁨은 좋은 칼 = 예리한 칼, 나쁜 칼 = 무딘 칼 정도의 성능에 초점이 맞춰진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계급 사회에서는 학문이든, 기술이든, 무술이든 귀족이 아니면 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능을 잘한다는 의미에 좋음이라는 뜻은 귀족을 뜻하게 되었고, 그 반대로 나쁨은 주인에게만 복종하며 아무것도 잘하는 것 없는 노예를 뜻하게 되었다. 래서 좋음(Good)'귀족적인', '기능을 잘하는'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나쁨(Bad) '천민의', '기능을 못하는'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계급사회에서는 '좋음'이라는 뜻은 용맹한 귀족 기사를, '나쁨'은 아무것도 역할도 하지 못하는 노예를 연상시키는 단어였다. 민주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 전쟁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용맹한 귀족 기사는 능력을 갖춘 좋은 사람, 노예는 허드렛일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쓸모없는 나쁜 사람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도덕성은 빠져있었다.



권력을 잃은 성직자들의 반란


종교가 인간을 지배했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쟁에서의 승리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시대가 오면서 아무 힘도 없는 성직자들은 찬밥신세가 되었다.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진 성직자들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야심 차게 도덕에서의 가치 반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도덕의 가치를 정반대로 전복시켰다. 그들이 내세운 구호는



"비참한 사람만이 오직 좋은 사람이다!"



성직자들은 귀족들을 강하고 실력을 갖춘 좋은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나쁜 사람들로 만들었다. 그리고 노예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귀족들의 온갖 핍박을 견뎌내고 인내한 좋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사자가 토끼를 잡아먹는 것이 당연하듯, 귀족이 노예를 부리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에서 성직자들은 강함과 약함에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민 것이다. 성직자들은 좋고 나쁨의 기준을 '성능'에서 '도덕성'으로 갈아치웠다.


그래서 귀족들에게 핍박받으며 살아가던 민중들은 귀족들보다 도덕적으로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면서 거꾸로 좋은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악한 인간과 다른 존재가 되도록 하자, 즉 선한 존재가 되게 하자! 그리고 선한 인간이란 능욕하지 않는 자, 그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는 자, 복수를 신에게 맡기는 자, 우리처럼 자신을 숨긴 채 사는 자, 모든 악을 피하고 대체로 인생에서 요구하는 것이 적은 자, 즉 우리처럼 인내하는 자, 겸손한 자, 공정한 자이다”  -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프리드리히 니체, 홍성광 역, 책세상, 2011, (p.379)




귀족은 좋은 사람 -> 나쁜 사람

노예는 나쁜 사람 -> 좋은 사람으로!  


노예들은 힘이 없어서 귀족들에게 지배당했던 것이 아니다. 단지 노예들은 평등과 사랑, 인내와 겸손의 미덕을 갖춘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참고 왔던 것뿐이다.


성직자들이 전복시킨 도덕으로 인해 이제 귀족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 폭력적이고 난폭한 나쁜 사람으로, 노예들은 인간이 지켜야 할 미덕을 갖춘 좋은 사람이 되었다. 이제 노예들은 귀족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과 싸우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평화를 사랑하고, 당신의 폭력마저 용서할 수 '착한 사람'이니까요"



힘이 없고 유약했던 노예들은 모든 타인을 사랑하는 고귀한 존재로 거듭났다. 본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이제 싸움을 회피하고 평등을 사랑하는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 된 것이다. 시나브로 강한 귀족은 나쁜 사람이 되었고 비참한 노예는 좋은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민주주의적 질서가 자리 잡은 후 부터 잘난 척과 과시는 나쁜 행동이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평등해지는 것을 추구하게 되었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며 우뚝 서려는 행동은 금기시되었다. 겸손과 인내는 곧 미덕이 되었고, 타인을 위험에 빠트리는 이상은 더 이상 꿈꾸지 않게 되었다. 자신이 뭔가 대단한 성취를 이뤄내도 그것을 뽐내선 안되고 적당히 감추며 겸손한 모습을 보여야했다.


이렇게 약자의 도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타인의 희생이 있더라도 인간성을 고양을 위해 나아가자는 강자들은 모두 처형되어 사라졌다. 강자들을 처형한 민중들은 약자로 남는 것을 미덕이라고 여기며 점점 더 왜소화되고. 평준화되었으며, 무기력해져가고 있다는 것이 니체가 본 민주주의의 실상이었다.


니체는 좋고-나쁨이라는 도덕 가치의 전복으로 인해 자리 잡은 '약자의 도덕'으로 인해 인간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니체가 그렇게 기독교를 미워하고 민주주의를 비판했던 주요한 이유였으며, 노예 도덕을 무너트리고 등장할 초인(위버멘시)을 애타게 기다렸던 이유이다.  



착한 사람 좋다, 그렇다면 경쟁은?


수능이 끝나고 난 뒤 교실에서 성적표를 받으면 몇 십분 간 조용한 분위기가 유지된다. 누군가는 평소 자신의 실력보다 못 본 학생도 있을 것이고, 시험을 굉장히 학생도 있을 것인데 모두가 다 침묵을 유지한다. 수능이 끝난 고등학생들은 비록 자신이 좋은 성적을 받아 기쁘면서도,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평소보다 수능을 잘 보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침묵을 유지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래야 '착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을 위해 마땅히 지켜야 할 매너처럼 보일 수 있지만, 어차피 수능이라는 것은 모두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적자생존의 경쟁이 아니었던가.


왜 그 치열한 경쟁에서 모든 노력을 쏟아서 승리한 학생들이 자신들의 성취를 충분히 기뻐하지 못하고 다른 학생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가? SKY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왜 더 많은 기회를 얻으면 안 되는 것인가? 왜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더 많은 기회를 누리고 경쟁에서 실패한 사람은 도태되서는 안 되는 것인가? 경쟁에서 승리한 자들은 왜 더 높은 곳을 쳐다보며 더 많은 전리품을 얻지 못하고 평범한 사람들과 비슷비슷한 삶을 살도록 재단당해야 하는 것인가?



약자의 도덕을 믿지만 강자가 되고 싶은 우리들



니체는 우리에게 날카롭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부자들을 고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비판하지만 부자가 되는 것을 동경하면서 자본주의적 삶에 자신을 내던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집으로 재테크를 하는 사람을 투기꾼이라 비판하지만 어디에 집을 사야 집 값이 오를 수 있을지 매일같이 두리번거리고 있지 않은가? 또한 평등과 평화를 추구하는 약자의 도덕을 믿으면서도 '을'이 아닌 '갑'이 되기 위해 열심히 경쟁하고 있지 않은가?


현대의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그 속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이렇게 모순적인 것들이 많다. 그렇기에 상식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하나씩 거부해보는 시도만으로도 우리는 삶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겸손은 미덕이 아닐 수 있다. 도덕적인 것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니체가 제기한 민주주의 문제점은 100년이 넘게 지난 이 지금에서도 고민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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