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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한 삶에도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까뮈의 시지프 신화

우리는 평화로운 일상이 지속되길 기대하고, 힘과 권한을 가진 사람일수록 더 수준 높은 책임감을 보여주길 기대합니다.


하지만 한순간의 되돌릴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은 소중한 생명을 앗아가고, 우리는 또다시 힘과 권한을 가진 이들의 무책임하고 경솔한 행태를 반복해서 목격합니다.


또 우리에겐 착하게 살면 행운이 따르고, 나쁘게 살면 벌을 받을 거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진 빚을 갚기 위해 밤낮없이 일한 사람은 빚을 다 갚고도 고된 삶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사기를 쳐 다른 사람의 피눈물로 돈을 번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떵떵거리며 삽니다.


인간은 어떻게든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하지만 이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로 꽉 차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세계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한 합리적 질서가 있을 것이고, 인간 삶에는 주어진 의미가 있을 거란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도덕과 종교 그리고 지식을 추구하면서 세계를 이해의 틀 안에 집어넣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선과 악은 서로에게 기생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고, 신을 앞세워 살아가야 할 의미를 말하던 종교는 오늘날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종교의 자리를 대신한 과학 역시 세계의 현상에 대해 논할 순 있어도 그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하지 못합니다.


블랙홀이 실제 있다는 발견은 블랙홀이 "거기 있다"라는 사실만을 말해줄 뿐 블랙홀이 "왜, 무슨 이유로" 거기 있는지는 설명하지 못하죠.


이 세계에서 합리성과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인간의 시도는 언제나 좌절로 끝납니다.


인간이 아무리 절박하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는다고 해도 이 세계는 불안에 빠진 인간에게 아무것도 줄 게 없습니다. 고요한 세계는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이죠.


이렇게 인류의 지적 역량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볼 수 있을 만큼 증대하면서 이제 인류는 이 세계는 인간의 기대와 달리 합리적이지 않고, 인간 삶에 부여된 특별한 의미도 없다는 불편한 사실에 다가갔습니다.


이렇게 명확함에 대한 미칠듯한 열망이 가진 인간이 철저한 무의미의 세계를 마주할 때 이 둘의 대비에서 부조리는 생겨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드릴 <시지프 신화>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카뮈의 철학은 이렇게 부조리를 느낀 인간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삶의 의미가 없다는 걸 진정 받아들이고도 살 수 있을까?"




카뮈가 묻고자 하는 건 하나입니다. 그건 "삶의 의미가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죠.


20세기에 이르러 키르케고르,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 많은 현대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세계는 비합리적이고 무의미하며 이곳에서 인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 위에서 자신들의 철학을 펼쳐나갔습니다.


언뜻 생각해 보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문제인가?", "그냥 철학자들에게나 중요한 문제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는데요.


문제는 인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아주 중대한 질문을 동반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의미가 없다면 왜 죽지 않고 살아야 하지?"



하는 질문입니다.


정말 철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삶의 의미가 없다면 당장 오늘 죽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요.


카뮈의 말대로 "지구가 도냐? 태양이 도냐?"와 같은 문제 때문에 사람이 죽진 않습니다.


갈릴레이 역시 화형 당할 위기에서 자신이 발견한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진리를 재빨리 포기했으니까요.


하지만 "삶의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질문은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합니다.


삶의 의미를 못 찾아 죽는 사람도 있고, 또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의미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카뮈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그 어떤 질문보다 인간에게 더 중요한 질문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삶의 부조리함을 드러낸 사상가들은 많지만 이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상가들은 많지 않았는데요.


특히 실존주의 철학은 부조리함을 느끼는 인간의 경험을 잘 설명하지만 동시에 오해하고 있다고 카뮈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부조리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고 다른 것으로 도피하는 길을 찾는데 고심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키르케고르는 신에게 의지하는 삶을 통해 부조리한 삶으로부터 도피를 종용한다고 카뮈는 지적합니다.



반항의 외침을 열광적인 동의로 바꾸어 버림으로써 그는(키르케고르는) 바야흐로 지금까지 자기의 의식을 비춰 주던 부조리를 무시하기에 이르고 앞으로 그가 갖게 될 유일한 확신, 즉 비합리를 신격화하기에 이른다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김화영 역, 민음사, 2022. P.63



이 지점이 부조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카뮈가 실존주의 철학자들과 구별되는 점이고, 또 그가 스스로를 실존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했던 포인트이기도 한데요.


그렇다면 삶에 부여된 의미가 없다는, 부조리를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카뮈는 부조리를 받아들인다는 건 경험의 '질'을 '양'으로 바꾼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이 자신이 경험한 것에 좋고 나쁨을 가르는 건 그 사람이 어디에 삶의 의미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성취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에게 워커홀릭으로 살아가는 건 가치 있는 삶이지만, 휴식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에게 쉴 틈 없이 일하며 살아가는 건 불행한 삶인 것처럼요.


따라서 삶의 의미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부조리를 받아들인다는 건 경험의 질적 차이를 나누는, 예를 들면 좋음과 나쁨, 이익과 손해, 명예와 불명예 등의 기준들이 함께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이에 따라 모든 경험에 대한 가치 평가는 무의미해지고, 모든 경험이 동등한 가치를 갖게 됩니다. 이때부터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밖에 셀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부자의 삶을 치켜세우고 거지의 삶을 모욕적이라 느끼는 건 돈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돈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복권에 당첨되는 것과 재산을 탕진하는 것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냥 두 개의 사건일 뿐이죠.


마찬가지로 명예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대통령이 되는 것과 노숙자가 되는 것에도, 영웅이 되는 것과 범죄자가 되는 것에도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삶의 의미 없음을 받아들인다는 건 경험의 질을 양으로 바꾼다는 것을 뜻하죠.


하루하루 성실히 사는 삶과 무기력한 삶이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걸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삶의 무의함을 마주해 부조리를 느낀 인간은 이것을 해소하려고 하는데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삶의 무의미함 앞에서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다른 것에 자신을 내맡기거나 자기 분수에 맞는 세계관을 만들어 그것을 세계라고 믿으며 사는 겁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방법은 모두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닙니다.


부조리는 세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인간이 비합리적인 세계를 이해하려고 할 때, 그 양자의 사이에서 생겨납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죽이거나, 이해하지 못할 세계를 없애버리는 건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임의대로 해소시켜버리는 것이죠.


자, 이제 카뮈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는 의미 없는 삶을 끝내는 자살과 세계를 자신이 가진 이해의 틀 속에 꾸겨 넣는 비약 이외에 다른 삶의 방식은 없는지를 묻습니다.


다시 말해서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걸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즉 부조리를 그대로 주시하면서도, 우리는 당당히 살아갈 수 없을까?"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죠.


이 질문에 대한 카뮈의 대답은 그가 재해석한 '시지프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 봐야 한다"




시지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입니다.


어느 날 그는 제우스가 강의 신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를 납치해 가는 걸 보는데요.


시지프는 도시에 물을 내주겠다는 아소포스에 약속을 받고 그의 딸을 제우스가 납치해 갔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이 사실을 안 제우스는 분노해서 시지프에게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보냅니다.


하지만 대담한 시지프는 죽음의 신이 올 거라는 걸 예측하고 타나토스를 납치해 지하실에 묶어 놓죠.


행방불명된 죽음의 신 때문에 전쟁터에서 병사들이 죽지 않는 혼란이 생깁니다.


이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제우스는 아레스를 보내 타나토스를 구출하고 시지프를 저승으로 보내죠.


그런데 자신이 저승에 갈 거란 사실을 미리 예측한 시지프는 아내에게 절대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고 말한 뒤,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아내가 장례식을 치러주지 않았다며 거짓 눈물로 호소합니다.


하데스는 가서 아내를 벌하고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라고 시지프를 이승으로 다시 보내주지만, 시지프는 약속을 어기고 자신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삽니다.


저승에 간 시지프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산 정상에 올리면 다시 떨어지는 바위를 끝없이 다시 정상으로 올리무의미한 노동하는 반복하는 형벌을 받습니다.


이렇게 시지프는 신을 속인 죄로 영겁의 벌을 받는 존재로 묘사되고 끝나는데요.


카뮈는 상상력을 더해 뒷 이야기를 써내려갑니다.


힘겹게 올린 거대한 바위가 떨어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또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는 건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에겐 너무나 끔찍한 일입니다.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노동을 멈출 없다는 건, 육체보다 정신이 먼저 피폐해지는 고문이니까요.


하지만 여기서, 만약 시지프가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는 부조리를 전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부조리를 받아들인 시지프는 무한한 자유를 얻습니다.


정해진 삶의 의미가 없다면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현상들을 동등하게 평가할 수 있죠.


부조리를 받아들인 시지프에게 돌을 올리는 것, 예술을 하는 것, 정치를 하는 것 사랑을 하는 것은 모두 같은 가치를 갖습니다.


따라서 무거운 바위를 반복해 들어 올리는 일 역시 더 이상 형벌이 아니게 되는 것이죠.


이제 그는 자신의 자유를 발휘해 자발적으로 돌을 끌어올립니다.


자신의 자유를 발휘해 바위를 들어 올릴 때부터 그는 형벌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제우스는 무의미한 노동이란 형벌을 내렸지만 부조리를 받아들인 시지프는 신을 이 세계로부터 추방하고 형벌의 바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죠.


올린 바위가 다시 떨어지는 그 모습을 응시하며 산꼭대기에서 한걸음 한걸음 내려올 때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한 존재로 거듭난다고 카뮈는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고된 노동에 지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보다 다른 신에게 제우스에 대한 저주의 기도를 퍼붓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반항이죠.


이런 점에서 카뮈는 의미 없는 노동에서 신음하는 시지프가 아닌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삶에 의미가 없음에도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



사실 생각해 보면 떨어지는 바위를 무의미하게 다시 올리는 일을 반복하는 시지프의 삶은 지금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카뮈 역시 <시지프 신화>에서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그날을 똑같은 직업을 하며 사는데 그 운명도 시지프에 못지않게 부조리하다"라고 말하기도 했고요.


누구나 크고 작은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느끼죠.


하지만 하나의 목표를 이룬 다음 우린 또 다른 목표를 필요로 합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면 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야"라는 기대감은 정상에 오른 돌이 다시 떨어져내리듯 목표 달성과 함께 금방 사라져버리고 말죠.


그렇게 우리는 어딘가 있을지 모르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또 다른 목표를 세우며 반복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는 시지프의 삶에 못지않게 부조리합니다.


이때 우리는 "에이 의미도 없는 인생 살아서 뭐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카뮈가 말한 대로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하면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무한히 반복되는, 의미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우리는 삶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합리성을 뛰어넘은 결심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뛰어난 외모와 능력을 갖춘 사람을 사랑하는 건 합리적이고,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생기발랄한 했던 모습을 잃어버리고 가진 재산을 모두 잃었을 때도 여전히 변치 않고 사랑하는 건 비합리적이면서도 동시에 위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매번 승승장구하며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온 사람의 도전을 믿어주는 건 합리적이고 또 쉬운 일입니다.


이건 사실 그 사람을 믿어주는 게 아니라 합리적으로 판단한 것뿐이죠.


하지만 실패를 거듭하고 나서 또다시 실패할 것 같은 사람의 도전을 조건 없이 믿어주는 건 비합리적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믿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삶의 무의미함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는 것은 합리성의 그 너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삶의 의미를 말해주지 않는 무심한 세계에서 한 명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위대한 반항인 것이죠.


이것이 카뮈가 말하고자 했던, 삶의 부조리를 그대로 주시하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이자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 봐야 한다는 카뮈의 말속에 담긴 의미입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딛고 실천적인 삶을 살다가 비극적인 자동차 사고로 46살에 요절해버린, 자신의 삶 자체로 삶의 부조리를 보여준 카뮈, 오늘은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중심으로 그의 부조리 철학에 대해 말씀드려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에리히 프롬의 텍스트를 통해서 '집착하지 않는 사랑의 기술'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생활밀착형 철학도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북스토랑이었습니다.



참고문헌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김화영 역, 민음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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