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파우스트 속 공간이야기_1

〈파우스트의 서재—인간의 사유가 태어나는 공간〉

by 서수정


파우스트의 서재는 처음부터 무거운 침묵을 품고 있다.
책장이 벽을 따라 질서 있게 서 있지만, 그 질서는 어느 순간부터 파우스트의 욕망과 고독을 감당하지 못한다.
책들은 그에게 지식을 약속했지만, 삶의 해답은 끝내 내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서재는 단순한 공부방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알고자 하는 욕망’과 ‘살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현장이 된다.
서재는 언제나 인간의 내면을 비춘다.
파우스트의 서재가 깊은 어둠과 긴장을 머금고 있는 이유는 그의 영혼이 이미 지식의 끝을 보았기 때문이다.
책을 아무리 펼쳐도 새로운 세계가 열리지 않는 그 순간, 서재는 더 이상 공간이 아니라 자기 한계와 마주하는 벽이 된다.
그런 공간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현실을 탈출하려는 심리적 기제’를 경험한다.
파우스트에게 메피스토가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식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
삶의 의미를 잃는 데서 오는 무력감,
그리고 지금의 공간을 견딜 수 없게 되는 정서적 붕괴.
이 모든 것이 그의 서재에서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서재는 단지 파우스트의 절망만을 드러내는 곳이 아니다.
그 공간에는 또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마지막 안식처라는 성질이 있다.


파우스트가 서재에서 죽음을 결심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 공간이 그의 존재 전체를 정직하게 비추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재는 인간의 고독과 지적 욕망을 동시에 품어내는 모순적 공간이며, 그 모순 속에서 사유는 비로소 깊어진다.
공간심리학적으로 보면, 깊은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내부의 균열을 조용히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파우스트의 서재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였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이루어온 모든 지적 성취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영혼의 허기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서재는 이처럼 인간을 진실로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물건이 아닌 사유의 구조가 공기를 채우는 공간.
그곳에서 우리는 성장하거나 무너지고, 혹은 둘 모두를 동시에 경험한다.




✦ 서재를 꿈꾸는 이들에게


파우스트의 서재는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일깨운다.
서재는 지식을 쌓는 곳이 아니라, 나를 들여다보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
책장의 높이나 테이블의 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이 나에게 어떤 ‘정신적 온도’를 주는지다.
서재를 갖고자 하는 이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 너무 많은 책으로 자신을 압도하려 하지 말 것.
서재는 과시의 무대가 아니라, 머물고 싶은 마음이 깃드는 곳이다.
• 사유가 깊어지는 것들을 가까이에 둘 것.
꼭 책이 아니어도 된다. 오래 보고 싶은 색감, 마음을 안정시키는 빛, 손에 익은 필기구처럼
‘나를 나답게 만드는 물건들’로 서재는 완성된다.
• 서재는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공간이어야 한다.
파우스트처럼 고독에 무너질 필요는 없지만,
그 고독을 잠시 끌어안아 삶을 정리해 주는 공간이 될 때,
비로소 서재는 사유의 방이 된다.
• 서재는 결국 ‘내가 나와 다시 연결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세상의 소음에서 물러나 나의 가장 깊은 곳에 손을 얹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서재다.




공간은 사람을 닮고,
사람은 공간을 따라 변한다.
파우스트의 서재는 비극적이었지만,
우리는 우리의 서재를 조금 더 따뜻하고, 조금 더 단단하며, 조금 더 진실한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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