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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Jan 11. 2021

'평생직장'에서 '평생생존'의 시대로

워킹맘 다이어리

“평생직장 따위는 없다. 성공해서 떠나라!”     

배달의 민족 건물 벽모퉁이에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그것도 면접을 보는 공간에. 나는 이 문구를 보며, 그래서 떠난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궁금하다. 

한 사람의 인생은커녕 회사도 회사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     

거기다 더해 나는 워킹맘이다. 경단녀라는 단어는 요즘 잘 안 들린다.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더니 정말이지 이게 우리의 아모르 파티다. 그러니 아이는 내가 선택한 길이다. 나는 임신기간에도 막달 출산 직전까지 일하고, 출산휴가 3개월 후 복직, 재택근무와 단축근무까지 도합 2년 반을 워킹맘으로 지냈다.      

며칠 전 어떤 재연예능을 보다가 워킹맘이 단축근무를 하고 퇴근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내 퇴근 모습과 정말 똑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워킹맘이 나가고 회사 동료가 워킹맘 뒷담화를 하는 거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웃으면서 인사하는 동료들도 실은 저런 속내일 수 있구나.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내가 좀 순진하게 회사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모르겠다. 누군가는 보기에 유난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필수인 일들이 누군가에겐 선택처럼 보일 수도 있는 거겠지. 어린이집을 5시에 하원하나 7시에 하원하나 거기서 거기인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겠지.      

평생직장은 고사하고 나는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불안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이런 시국에 불안 없이 사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그렇다고 또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모두가 힘든 이때, 재택근무까지 하는 게 그저 감사할 뿐이다. 현재로선 회사에 민폐가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유일한 해소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리고 정말 지극히 개인적인 심정으로 회사가 나를 해고해도 지금의 단축근무나, 재택근무를 멈출 수가 없을 것 같다. 이제는 정말 뉴스나 TV에서 보던 경단녀가 내 현실이 되어도 어쩌겠나 싶다. 좋은 정책이나 그게 아니라면 은인이나 로또나 뭐라도 좋으니 우두커니 내 앞에 나타났으면 좋겠다. 단지 회사는 그 우두커니가 될 수 없을 뿐이라 위안하는 것이다.      

내겐 아이를 기른다는 건 당장 내 앞에 놓인 아이를 케어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내 생활과 일상을 양보하는 것까지가 육아의 영역이 되어버렸다. 모든 부모가 같지는 않을 거지만, 아이를 키우는 사람뿐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 글을 파는 사람, 음식을 파는 사람, 음식을 운반하는 사람,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 누구 하나 지금 예전과 그대로인 사람이 있는가. 역병이 인류의 크나큰 공포인 것은 모두의 안전과 안정에 대한 기표와 기준을 바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코스피가 오늘 3200대로 진입했다. 주식과 집값은 폭등하면서도 언제든 폭락해도 이상할 게 없다. 그게 지금 위기의 형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코로나가 이유가 아니더라도 변화요인들은 많았다.     

100세 시대, 인간의 수명이 늘고 있다. 하도 사람들이 100시대라고 하니까, 우스갯소리로 1년마다 2년씩 인간의 수명이 늘어난다고 가정하면, 우린 평생 죽지 않을 수 있다  말하는 유튜버다.      

트렌드의 속도도 빨라졌다. n잡러, 다양한 직업실험들이 이뤄지고 있다. 소비방식도 달라졌다. 소위 한국인 종특(종족 특징)이라던 ‘유행’이라면 우르르 좇는 것도.      

쉬워지는 만큼, 어려워지는 것은 무엇일까. 회사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세상도 변한다. 애초에 ‘정답’이 있을까. 계속 변하는 거지.      

오늘 2021년 신년사에서 대통령은 ‘상생’을 말했다.      

“오늘도 내일도 가장 안전한 우리집에서!”라는 구호를 외치지만, 가장 위험한 곳이 집이란 생각을 감히 해본다. 고립과 단절이 이뤄지는 공간이기도 하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상생’을 말한다.      

회사는 그저 미디어나 플랫폼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다 신기루고 허상인 세상에서 믿을 것은 오로지 존재하는 나 뿐이지 않나. 승진이나 근속 여부도 여전히 생존의 영역에 있지만, 회사에서 어떻게 하면 오래 버틸까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회사가 영속한다는 환상이 깨고, 결국 내가 나를 책임져 보는 것이다.      

내가 내 인생에 사장이고, 컨설턴트라면 내 인생의 재정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어야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글을 쓰면서 내가 얼마나 내 인생을 괄시하며 살았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남들 다 하는 거라고 여기고, 남들 다 하는걸 좇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한 것을 누군가에게 가르칠 생각도, 그럴 형편도 전혀 못 된다. 그저 이것은 생존의 구호일 뿐이다. 상생이 어디 뚝딱 되는 것인가. 내가 나를 모르면 상생? 시작도 못 한다.  

삶의 주도권에 관한 문제는 누구에겐 되고 누구에겐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다. 소크라테스형이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건,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철학적 구호도, 더는 종이 속에 떠도는 활자도 아닌, 생존의 구호다.      

평생직장은 없다고, 그래서 성공해 떠난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레퍼런스 삼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거기서 가능한 것을 도출해 액션플랜을 짜보고 싶다. 

그러니까 바로 지금 실행,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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