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영화 속 기억들

다시 마주치기 위해서

by 이운덕
사막의 카페에서 시작된 장면


LA에서 차를 몰고 동쪽으로 한참을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목적지보다 ‘길’ 그 자체가 화면이 된다. 매끈하던 도시의 풍경은 서서히 사라지고, 창밖에는 같은 색의 하늘과 사막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 사이를 가르는 얇은 도로 위로 차는 묵묵히 앞으로만 나아간다.

어느 지점에서 내비게이션의 화살표와 영화 속 장면이 포개진다. “Bagdad Cafe.”

마치 영화 속 세트장처럼 사막 한가운데, 바람에 페인트가 조금씩 벗겨진 작은 카페 한 채가 있을 뿐이다. 차 문을 여는 순간, 뜨거운 공기와 함께 영화의 오래된 장면들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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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브렌다는 늘 지친 표정을 하고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 외부에서 밀려오는 손님이라곤 몇 안 되는 이 모텔·카페에서, 삶은 늘 같은 온도로 데워졌다 식기를 반복하는 커피 같았다. 그런데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떠나왔다가 우연히 머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곳은 묘하게 “머무는 힘”을 가진 장소였다. 카메라를 들고 간판을 올려다볼 때, 문득 그런 대사가 귓가에 맴돈다.


“여긴… 아무것도 없는 곳 같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 와요.”


사막의 바람 속에서 들리는 듯한 그 목소리는, 어쩌면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시간과 장소에도, 사실은 누군가의 사연과 기도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는 고백처럼 다가왔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면 영화의 세트장을 걷는 기분이 든다. 바에 걸린 머그컵, 벽에 붙은 오래된 사진과 전 세계 여행객들이 남긴 낡은 사인들, 어딘가 어설픈 기념품들. 그 사이에 서 있으면 마치 관객석에서 내려와 영화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은 느낌이 든다. 작은 창으로 사막의 햇빛이 들어올 때, 이곳은 더 이상 단순한 촬영지가 아니라, 내 여행의 한 장면으로 새로 촬영되는 현재진행형의 세트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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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 of Rosenheim.”이라는 원래의 제목처럼, 이곳은 도시에서 밀려난 사람들, 자기 자리에서 비껴 난 사람들이 우연히 모여 서로를 다시 발견하는 공간이었다. 여행자로 이 카페 앞에 서 있는 나 역시, 잠시 내 일상에서 비켜난 채, 그들 곁으로 조용히 합류한다. 사막 위에 홀로 놓인 이 카페는, ‘길을 잃어도 괜찮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어색하지만 따뜻한 영화 속 등장인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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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멈춘 한 문장, 모뉴먼트 밸리


사막의 카페를 떠나 더 깊은 서부로 들어가면, 길은 다시 화면이 된다. 붉은 흙과 바람, 하늘과 바위가 겹겹이 쌓인 풍경 속에서, 도로는 한 줄기 검은 펜선처럼 수평선을 향해 뻗어 있다. 그 위를 천천히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또 다른 영화의 한 장면이 정확히 눈앞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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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야, 그 장면.”

‘포레스트 검프’에서 포레스트가 3년 넘게 달리던 발걸음을 멈추던 바로 그 길, 모뉴먼트 밸리의 한 지점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이제 자연스럽게 ‘Forrest Gump Point’라고 부르고 있다. 길 한가운데서 차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면, 붉은 바위들이 오랜 세월 동안 같은 자리에서 인간의 시간을 조용히 지켜봐 온 거대한 관객처럼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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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포레스트는 바로 이곳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3년, 2개월, 14일, 16시간 동안 달렸어요. 그런데… 좀 피곤해요. 이제 집에 가야겠어요.”


영화관 안에서 들었을 때는 단순한 유머처럼 웃고 지나갔던 말이, 실제로 그 길 위에 서서 떠올려보면 전혀 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긴 여행의 끝에서, 인생의 어느 중간 지점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입 밖으로 꺼내고 싶었던 한 문장. “이제 좀… 멈춰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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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위에 서서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마음속에서도 어떤 긴 도주가 멈춘다. 앞만 보고 달려야만 가치 있는 삶이라고 믿게 만드는 세상의 속도 속에서, 포레스트는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멈춤을 선택한다. 그가 멈추는 순간, 따라 달리던 사람들도 함께 멈추고, 얼굴을 쳐다보며 무언가 대단한 말을 기대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솔직하고, 단순하고, 조금 서툴게 “집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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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사막 위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문득 떠오른다. 나에게 ‘집’은 어디였을까. 떠나온 도시인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마음이 조금 덜 흔들리는 한 조각의 풍경인지. 길 위에서, 영화 속 장면과 내 현재가 포개지는 순간,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질문 하나를 조용히 꺼내올리는 의식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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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에 담긴 모뉴먼트 밸리의 직선 도로 사진 속에는, 붉은 바위와 하늘뿐 아니라, 그 자리에서 잠시 멈춰 섰던 나의 작은 뒷모습, 그리고 “이제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문장이 함께 담겨 있는 듯하다. 그 사진을 나중에 다시 볼 때마다, 포레스트의 대사가 조용히 따라온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요. 무엇을 집게 될지 알 수 없죠.”
그러나 적어도 그날, 내가 집어 든 한 조각의 풍경은 분명했다. 멈춤이 허락된 길 위의 한 순간, 나는 길 위에 나의 흔적으로 남기고 다시 이어질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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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현실 같은 색, 타히티와 모레아의 오후


태평양 한가운데 흩어진 섬들, 그중에서도 타히티와 모레아는 오래전부터 수많은 영화와 소설이 사랑을 고백하던 무대였다. 바다와 하늘을 구분하기 힘든 에메랄드빛 수평선 위에, 초록빛 산 능선이 부드럽게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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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러브 어페어’에서 주인공 일행이 폭풍우로 인해 남태평양 한가운데 섬에 머무르게 되면서, 타히티와 그 인근 섬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멈춰버린 시간의 프레임이 된다. 광활한 자연 앞에서 인간의 계획은 무력해지고, 대신 우연히 멈추게 된 그 사이의 공백 속에서 관계와 감정은 새로운 모양으로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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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아 섬의 해변을 걸을 때, 영화 속 장면이 겹쳐 보인다. 잔잔한 라군 위로 파도가 거의 일지 않고, 물 위에 띄워진 방갈로들 사이로 작은 배들이 소리 없이 미끄러진다. 하늘은 이미 충분히 푸른데, 바다는 그 위에 다시 한번 푸르름을 덧칠한다. 그런 풍경 속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날씨 예보처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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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연인들은 이렇게 묻는 듯 보인다.
“만약 우리가 이 섬이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서 만났다면… 그래도 이렇게 사랑했을까?”
대사는 직접적으로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화면과 음악은 분명히 그 질문을 건네고 있었다. 장소는 사랑을 확장시키기도 하지만, 가끔은 사랑을 대신해 말해 주기도 한다. 타히티의 빛과 바람, 모레아의 초록 능선과 고요한 바다는, 연인들의 망설임과 결심을 한 겹 더 부드럽게 감싸는 배경음악 같은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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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 위에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실루엣, 그 뒤로 파스텔 톤으로 번지는 석양. 사진만 보면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도 누군가는 아직 망설이고, 누군가는 아직 말하지 못한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섬의 풍경은 묵묵히 말한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 이곳에서는 시간도 천천히 흐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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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여행 사이, 장면과 장면을 잇는 마음


바그다드 카페의 사막, 모뉴먼트 밸리의 직선 도로, 타히티와 모레아의 푸른 섬. 이 세 장소는 서로 전혀 닮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영화 속에서, 그리고 여행자의 사진 속에서 하나의 공통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멈추거나 다시 시작하고 싶은가.”


바그다드 카페에를 지키고 있는 세 분의 할머니들은 낯선 사람들의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비켜난 채 살아가고 있었지만, 결국 서로를 통해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갈 용기를 얻고 있는 듯하다. 모뉴먼트 밸리 위의 도로에서 포레스트는 더 이상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그저 자기 피곤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삶의 다음 장면을 연다. 타히티와 모레아의 연인들은, 현실과 거리를 둔 남태평양의 공백 속에서 비로소 자기 마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여행자는 카메라를 들고 그 장소들을 찾아간다. 처음에는 영화 속 장면을 다시 찍고 싶어서, 똑같은 각도와 구도로 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셔터를 누르는 순간, 화면 안에는 영화가 아닌 ‘지금 여기의 나’가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된다. 같은 장소, 같은 배경이라도, 그날의 날씨와 빛, 함께 서 있는 사람과 마음의 상태가 다르면 사진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말하게 된다. 어쩌면 ‘영화 속 장소’가 아니라, ‘장면과 장면 사이에 서 있는 나’를 향한 빛의 모음일지도 모른다. 스크린에서 보았던 대사들이 실제 풍경 위로 떠올랐다가, 다시 여행자의 일상 속 문장으로 내려오는 과정. 사막의 카페, 붉은 길, 남태평양의 섬을 잇는 건 항공권이나 도로가 아니라, 그곳에서 잠시 멈춰 선 채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들이다.

“우리가 다시 그 장면의 장소를 찾는 이유는, 영화가 아니라, 그때의 나와 다시 마주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른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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