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파리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라 Sep 15. 2020

여자가 배달음식을 주문할 때 생기는 일

지난 파리일기 

여자로 사는 건 꽤 괜찮은 일이다. 태어날 때 성별을 고를 수 있는데 내가 여자로 태어나길 택해서는 아니고, 남자로 잠깐 살아봤더니 영 별로여서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나쁘지 않다. 근데 한 가지 나쁠 때는 여자가 배달음식을 시켜먹을 때다.


요리를 하는 건 귀찮은 일이다. 나는 이제 점심이든 저녁이든 요리하고 남은 프라이팬에 물을 받아놓아 음식물 찌꺼기가 들러붙지 않도록 하는, 먹은 후에 바로 상을 치우는 어른이 되었지만 이 어른노릇도 매일 하려면 지겹다. 가끔씩은 요리사가 된 기분을 느끼기도 하지만 50분 요리해서 10분만에 다 먹게 되는 그 허탈감이란. 그래서 가끔 배달음식을 시켜먹는데 내 경험 상 배달주문을 하는 건 언제나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보통은 아무런 일 없이 지나간다. 파리에 혼자 사는 여성은 어차피 말도 못 하게 많고 그 여자들이 매일 요리를 해 먹거나 레스토랑에 가진 않을테니까. 앱으로 주문을 하고 라이더가 어디쯤에 있는지 확인을 한 뒤 시간을 맞춰 내려간다. 보통 문 앞에서 건네 받고 바로 집으로 돌아온다. 간단하다. 코로나19가 퍼지고 '언택트'가 강조되면서 절차가 간단해진 것인지 아니면 음식을 주고 받는 일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아무튼 음식을 주문할 때는 별로 불쾌한 일이 없었다.


나머지는 조금 달랐다. 아, 물론 나는 배달원이 집에 들어와야 하는 경우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내 경험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경험 중에 불쾌한 경험이 두 번이나 된다면?


첫 번째는 이랬다. 내가 물을 배달해먹는 웹사이트가 있다. 여기서 패트병 1.5L가 든 박스를 세 개 정도 주문하면 집까지 친절하게 배달해준다. 한동안 그 웹사이트를 애용했었고 그만 둘 생각은 없었는데 문제는 생각보다 빨리 발생했다. 배달원이 내게 개인적인 문자를 보내면서였다. 배달해야 하는 물건이 크니까 내가 직접 내려가서 배달원을 데리고 내 집까지 올라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맞이하러 내려갔고, 이름과 연락처를 확인한 뒤 물건을 받고 그 사람은 돌아갔다. 문제는 이 사람에게 내 연락처가 있다는 점이었다. 단지 일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면, 그리고 개인정보를 다루는 일의 중요성 (어렵지 않음)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내 이름과 번호는 즉시 파기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내게 문자를 보내 남자친구가 있냐며 시간 될 때 술을 마시자고 연락을 해왔다. 답장하지 않았다. 무서웠으니까. 그랬더니 이 사람은 왜 답장을 하지 않냐며 끈질기게 문자를 보내왔다. 결국 차단했다. 왜? 무서우니까. 이 뒤로 나는 물을 더 이상 배달해먹지 않는다. 무겁더라도 6개 들이 패트병을 낑낑대며 운반하거나 그 날 저녁에 먹을 두 병 정도를 사올 뿐이다. 나쁜 새끼. 무겁다고..


두 번째는 이랬다.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 길어지면서 집에 인터넷을 설치했다. 집에 오래 있으려니 미팅도 집에서 해야 하고, 넷플릭스도 끊김 없이 보고 싶으니까. 내가 서비스를 구매한 통신사 웹사이트에서 랑데부를 잡고 정해진 시간에 셋업박스와 함께 설치기사가 올 거라는 문자를 받았다. 당일날 아침 이 사람은 (아직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름) 나에게 문자를 보내 원래 시간보다 일찍 아침시간에 가도 되냐 물었다. 일찍 일을 처리할 수 있으면 나야 좋으니까 괜찮다고 오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 뒤로도 인터넷을 설치하려면 지하실 열쇠가 필요한지 (필요하면 집 주인에게 연락해야 하니까) 등을 물었고 그 사람은 필요 없다고 답했으며, 나는 고맙다고 곧 보자, 라는 상투적인 인삿말을 건넸다. 아무 이유 없었다. 예의 바르게 행동에서 나쁠 거 없으니까.


그리고 그 사람이 우리 집에 왔다. 작업은 10분만에 끝났다. 설치기사가 땅에도 내려놓았을 게 분명한 먼지 묻은 가방을 내 침대에 (!) 올려놓은 게 아주 강렬하게 불쾌한 기억으로 남았지만 어쨌거나 나는 파리에서 최고 빠른 인터넷 속도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요리를 하려는데 문자가 왔다. 설치 기사였다. 이 남자는 나에게 '수리가 필요하거나 다른 서비스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며 '랑데부(약속)를 잡을 필요 없이 처리'해줄 것이고, '항상 웃는 고객을 맞이하는 건 아니다' 라며 자신의 친절에 대한 이유를 댔다. 나는 별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통신사로부터 서비스 제공 차 보내는 그런 문자를 받곤 했으니까. 그런데 내 프랑스 친구 생각은 달랐다.


아, 한 가지 얘기 안 한 게 있는데, 이 날 설치기사는 약속시간보다 무려 1시간 반이나 늦었다. 그 날 계획이 있었던 나는 이 사람 때문에 하루를 망치게 되어 기분이 나쁜 상황이었고, 약속 시간을 상기시켜주려 문자를 보냈지만 이 사람은 곧 도착한다고 문자를 보낸 뒤 1시간 뒤에 도착했다. 나는 웃지 않았다. 기분 나쁜데 내가 웃을리가. 와이파이를 설치하는 동안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설치하고 나서 와이파이 이름이 뭐냐는 질문 하나만 한 뒤, 안녕히 가세요, 라고 한 게 전부였다. 그런데 항상 웃는 고객을 맞이하는 건 아니라고? 웃는 고객? 나?


내 친구는 그 문자를 보더니 이상하다며 이 남자가 다시 연락하면 고객 센터에 당장 연락을 하라고 했다.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그리고 나보고 이 남자에게 웃어주었냐고 물었다. 나는 기분이 좀 상해서 절대 웃지 않았다고, 기분이 나쁜 상황이었는데 내가 웃겠냐고 반문했다.


여자로 사는 건 나쁘지 않지만, 아니, 좋지만 이런 일들은 참 별로다. 나에게는 두 번 생긴 일이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사람은 방어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그게 꼭 성별에 따른 게 아닐지라도. 나처럼 배달을 선호하지 않게 되거나 또는 하더라도 최소한의 접촉만 하는 방법을 취한다거나. 물을 배달하던 날 나는 '남자친구가 없고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으며, 와이파이를 설치하던 날 나는 '웃지 않았다'. 그건 내가 필요해서 주문한 서비스였고 다들 떠들어대는 4차 산업혁명이 끝내 완성단계에 이르러 드론이 싣고 온 AI 머신이 내 집에 와이파이를 설치해주지 않는 이상 나는 사람과 접촉을 해야 했다. 그 당연한 일을 불편하게 만들어버리다니. 나쁜 새끼. 물 무겁다고..


이런 건 프랑스에서만 생기는 일은 아니었다. 대학교 1학년 시절 나는 방송국 소속이었고, 흔한 대학 방송국들의 유구한 전통에 맞게 나는 아무 일 없지만 아침 7시까지 학교 방송실로 집합을 해야 하는 아침을 지내고 있었다. 이대역은 지하철이 깊은 데 설치되어있다. 에스컬레이터가 길다는 말이다. 나는 그 날 아침 이대역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는 순간 눈으로 나를 집요하게 쫒던 중년 남성을 발견했다. 몸이 얼었다. 무서웠다. 나는 쫓기듯 개찰구를 지나 역 출구로 달려갔고 이 남자는 아니나다를까 나를 쫓아오기로 결정했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고 나는 이 사람을 자극하고 싶지 않아서 걸음을 늦췄다. 이 남자는 급기야 가까이로 와서 나를 벽에 몬 뒤 나에게 번호를 달라고 했다. 아, 짜증나. 수상한 사람이 말을 걸면 피하라는 교육은 내 칠 세 시절부터 받아온 것이지만 이 상황이 나에게 직접 생길 때 내가 어떻게 느끼리라고 일러준 사람은 없었다. 그런 상황이 생기면 몸이 굳는다. 나는 그 자리에 얼음처럼 서서 움직이지 못 했다. 그 남자 뒤로 아주머니 한 명이 지나갔다. 그 아줌마에게 나는 온 힘을 다해 눈빛으로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여자는 그냥 지나쳐갔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 아줌마를 생각하면 화가 난다.


그 남자가 점점 다가오자 나는 재빠르게 달려 역 출구를 지나 학교 정문으로 달려갔다. 뒤를 돌아보니 그 남자는 여전히 나를 쫓아오고 있었고, 나는 그걸 확인한 뒤 입에서 피맛이 나도록 뛰었다. 정문으로 달려가 경비원에게 신고했다. 그 일을 들은 우리 아빠는 극도로 화를 내면서 서대문 경찰서에 신고했다. 경찰서에서는 내가 당한 일이 없기 때문에, 구체적으로는 내 털끝 하나 스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찾더라도 고소하기란 쉽지 않다고 했다. 아빠는 더 화를 내면서 그러면 딸이 등하교 하는 시간에 순찰을 돌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뒤로도 일주일 간 아빠는 나를 학교에 태워다주었고 집 근처 지하철역에는 오빠가 늘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안 지하철을 타는 일은 내게 공포였다.


그 뒤로도 그 남자를 학교 정문에서 한 번 봤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 남자를 본 순간 내 몸이 마비되는 걸 느꼈다. 학교 게시판에도 그 남자의 정체가 돌기 시작했고 얼마 안가 서대문 경찰소 경찰에 잡혔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데다 구체적으로 학생들에게 피해를 끼친 사실은 없어서 풀려났다.


이 얘기는 이제 내가 술자리에서나 하는 얘기가 됐지만 나는 여전히 억울하다. 나는 그 정신 이상한 아저씨에게 나를 쫓아와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고, 번호를 줄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으며, 그 물 배달원 얼굴은 기억나지도 않고 와이파이 설치 기사에게는 웃어주지 않았다. 별 일 아니라고 하기에는 나는 한동안 이대역에서 내리기가 무서워서 신촌역에 내려 학교까지 걸어와야 하는 고생을 했으며, 이젠 물을 배달하지 않고 몇 병씩 사오게 되었고 (무겁다고.. 나쁜 새끼), 와이파이는 잘 쓰고 있지만 기계가 망가진다고 해도 그 남자에게 직접 연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뒤로 얼마 안 있다가 통신사에서 문제가 있을 시 다른 약속을 잡으라는 안내문자를 받았다.


이런 일들은 내가 별나서 생기는 일이 아니다. 나에게만 생기는 일도 아니다. 예상을 하고 생기는 일도 아니다. 그래서 좀 억울하다. 여자로 사는 건 꽤 괜찮은 일이라 생각하지만 프랑스든 한국이든 '여자가 돼서' 아침 일찍 학교에 가고, 물을 배달하고, 와이파이를 설치하는 건 그렇게 달갑지 않을 수 있다. 패트병 1.5L 여섯 개 들어봤냐고 이자식들아..


ps. 나 요리 잘 함.





매거진의 이전글 끓는 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