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빙자한 덕질, 덕터뷰 - 최윤정 3편
안녕, 나 양벼락이야.
하이루? (^ㅡ^)/ 엘덕들아, 육아 번아웃으로 인해 정리병자로 살았던 최최애의 2024년 이야기 잘 읽었니? 번아웃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미술 수업하기도 실행에 옮겼던 우리 최최애, 대학생 때 그렸던 그림들과 그 그림들을 그리기 위해 찍은 수많은 사진들을 다시 보면서 살아온 삶을 정돈 했던 우리 최최고 최최애. 그 시기를 겪어 나가는 중에는 분명히 고민으로 괴로웠을테지만 지나고 보니 자신을 재건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
특히 최애의 작품이 추상화인 줄 알았던 나의 무지함 덕분에 최애의 작품이 '사진'을 베이스로 작업됐다는 걸 알게 된 부분이 놀라웠어. 아니, 내가 이렇게나 따라다니고 좋아하는 최애의 작업이 무엇을 바탕으로 했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되다니 ㅋㅋㅋ 정말 부끄럽지만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더 열심히 덕질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긴거라고 생각해야지!
그런데 우리 최애가 지금의 '빛그림자'를 처음부터 그릴 수 있었던 건 아니래. 심지어 전 고용주, 현 남편의 영향으로 '극사실주의'를 접하면서 빛그림자를 그리게 되었다면 믿어지니? 일루젼과 하이퍼리얼리즘! 이 안 어울리는 조합에 대해 더 자세히 덕질해보자!
<인터뷰를 빙자한 덕질, 덕터뷰> 최윤정 3편
추상 같은 구상
일루젼은 추상화가 아니엇따...(부끄)
엘덕후: 작가님께서 사진을 보고 그렸다고 하니 이제서야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지만 사실 아직도 놀라워요. 저는 그림 속의 동그랗고 흐릿한 듯한 빛이 어떤 관념을 그린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색감도 현실에서 보기 힘든 몽환적인 느낌이 있고, 제목도 Illusion 이잖아요!
최최애: 네 아마도 그림에 핑크, 민트 이런 색을 사용해서 더 그랬을 수 있겠어요. 사실 사진을 흑백으로 뽑아서 레퍼런스로 삼긴 해요. 어차피 색은 제 맘대로 할 거고 빛과 그림자의 명암만 확인하는 용도라서 흑백으로 뽑아도 괜찮은거죠.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졌어. 물 속에서 흐드러지는 열매와 꽃 그림은 색상이 강한데 어떻게 지금과 같은 몽환적인 느낌으로 넘어오셨는지 말야.
최최애: 사실 대학생 때부터 빛과 그림자 사진을 많이 찍었고 늘 그것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그 때는 빛도 그림자도 표현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아무리 그려도 그냥 그림자는 너무 회색이고 빛은 그냥 하얀색이고... 도저히 예쁘지가 않은거에요. 사진은 많았는데 정작 제대로 그리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김영성 작가님(=최애의 전 고용주이자 현 남편) 화실에서 일을 하면서 그림자를 그릴 수 있게 되었지요.
오...? 김영성 작가님은 극사실주의 작가님이잖아? 물고기와 곤충 같은 생물을 사진처럼 세밀하게 그리시는 작가님의 화실에서 몽글몽글한 빛과 그림자를 그리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극사실주의에 기반한 빛그림자
최최애: 김영성 작가 화실에서 어시로 근무했을 때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극사실주의 작품을 그릴 때 정확한 색을 선택해서 적재적소에 칠하면 될 것 같지만 그렇게 보이는 색깔만 흉내내면 '불쾌한 골짜기'처럼 엄청 어설퍼져요. 사진 파일을 엄청 확대해서 보면 피사체의 가장자리에 엄청 다양한 색깔의 파티클들이 뿌려져있어요. 그 여러가지 색깔들을 다 화폭에 담으면서 그라데이션을 잘 했을 때 완벽하게 '진짜'같은 그림이 나오거든요. 하나의 색깔이어도 빛 번짐을 모두 다 계신해서 4~5 단계에 걸쳐 색을 레이어해야해요. 김영성 화실에서 하도 그림을 그리다보니까 저도 어느 정도 기술적인 스킬이 생기더라구요. 그 때 '이제 빛을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님 작품에 많은 레이어가 있는 건 알고 있었어. 그런데 난 작가님이 더 아름다운 색을 내기 위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거든? 유화를 하시는 작가님들은 여러 색을 얹으면서 몽글몽글한 색감을 내신다고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는 거지. 그런데 사진에 있는 빛그림자를 더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한 레이어다니? 맙소사 ㅋㅋㅋㅋㅋ 난 덕후라고 해놓고 그동안 작가님 그림에서 뭘 본 걸까 ㅋㅋ
최최애: 그렇게 기술이 생기니까 빛그림을 그리는 게 더 재밌어졌죠. 화려한 것만 그리는 것에 지쳐버렸는데, 이제는 정말 진짜 같은 '빛' 그리고 진짜 같은 '그림자'를 그릴 수 있게 된 데다가 색깔을 마음대로 조율할 수 있으니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릴 수 있어 신났었어요.
그렇게 최최애만의 스타일이 잡혀갔고, 빛이 산란하면서 뿌리고 간 다양한 색을 캔버스에 담을 수 있게 된거야. 우리에게 최최애의 아름다운 작품이 오기까지 이렇게 다양한 경험이 레이어 되어 있다니. 일견 그림이란 것은 평면의 시각효과를 제공하지만 그 한 폭에 담긴 이야기는 작약처럼 촘촘하게 채워져있는 게 분명해.
이거는 최윤정 그림이다!
아티스트들과 일한지 꽤 오랜 시간이 되었지만 나는 작가들이 자기 스타일을 갖고 있는 부분이 늘 신기해. 나는 창작자가 아니다 보니 내 스타일이라고 표현할 만한 게 없잖아? 그런데 우리가 어떤 목소리를 들으면 '어? 누구다!'하고 반응 하는 것처럼 그림도 '어 이거는 누구 그림이다!'하게 되지. 그런 스타일을 구축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잠들어 있었을까..
엘덕후: 작가님 그러면 지금의 스타일을 잡게 되신 건 언제부터에요?
최최애: 제가 애를 낳고 나서 과거를 잘 기억 못하는데요, (엘덕후: 암 그거 알죠, 알아요.) 김영성 화실에서 일한지 1년 정도 지났을 때, 한 2017년부터 지금 스타일을 잡게 된 것 같아요.
그 때부터 변화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최윤정 그림이다' 할 수 있는 그 스타일을 2017년부터 유지를 해온 우리 최애, Illusion 시리즈도 벌써 100점에 다다르고 있대.
최최애: 일루전이 95점인가, 96점까지 있거든요. 중간 중간에 폐기한 작품도 있지만 그렇게 그리다보니 시리즈가 되더라구요. 과거의 작품들을 다시 되돌아보면서 그 중에서도 마음에 들었던 색감이나 스타일을 다시 살려보기도 해요. 특히 콜렉터님들께서 좋아하셨던 스타일을 이제는 일부러라도 더 그리려고 해봐요.
우리 작가님들을 덕터뷰하면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부분들 중 하나야. 사람들이 반응하는 그림을 그리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장난끼 있는 목소리로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는 작가님들이 대부분이지만 난 그게 아티스트가 소통을 하기 위한 본질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아. 아티스트로서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최최애: 그래서 요즘은 핑크빛에 집중을 해보려고 해요.
엘덕후: 좋은 선택이 될 것 같아요. 아티스트가 대중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 전 확신해요. 물론 선철학 후소통으로 성공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대중과 호흡하면서 그 작품 세계가 콜렉터들의 마음에 오래 남는 경우들도 많은 것 같더라구요. 대중에게서 좋은 반응이 나오면 작가님들도 더 자신감 있게 자신의 세상을 펼쳐 놓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최최애: 맞아요. 그런 기준을 정해놓고 하니까 또 의욕이 생기더라고요. 사람들이 내 그림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면 작업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빛과 그림자 - 좋은생각 1월호 수록
빛과 그림자를 그림으로 담아낼 때 나는 밝음과 어두움의 사이를 여러 번의 붓질로 곱게 펴서 그린다. 경계가 사라지고 모호해질 때 비로소 작업이 완성됨을 느끼기 때문이다. 대학원을 마치고 난 지금까지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작가의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있다. 하루 9시간 동안 작은 세필 붓으로 캔버스에 정교하게 그려내는 작업이다. 일을 시작하고 한동안은 작가분의 작업과정을 바로 옆에서 배울 수 있다는 점이 감사하고 흥미로웠다. 그러나 6개월 쯤 되었을 때부턴 같은 작업의 반복됨이 단순노동처럼 느껴져서 점점 몸과 마음은 고되고 힘들어졌다. 무엇보다 더 나를 지치게 만든 건 일하는 기간 동안 내 작업은 한 점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머릿속은 늘 작업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지만 딱히 표현하고 싶은 대상조차도 없었기에 이러다 평생 내 작품을 만들지 못하면 어쩌나 싶어 늘 조급하고 불안했다. 어느덧 일한 지 1년쯤 되어가던 여름날, 퇴근길에 멍하니 걸어가던 중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날은 차갑게만 느껴졌던 낡은 콘크리트 벽면에 몽글몽글한 빛 그림자가 나무 사이로 드리워져 있었는데 마치 큰 캔버스에 완성된 그림을 보듯 인상 깊었고 나의 힘들었던 시간들을 위로받는 듯 따스했다. 그날 이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빛과 그림자는 나에게 아주 특별해졌고 지금은 그 빛나던 장면이 나의 그림 소재가 되어 4년 째 신진 작가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작업의 방향이 잡히자 이젠 어느 곳에 가서 무엇을 하든 빛과 그림자를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담아내는 버릇이 생겼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멋진 사진을 찍게 된 날은 노다지를 찾아낸 듯 행복해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돌이켜보면 그때에 힘든 나날들이 내가 발전할 수 있던 중요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어두움의 시기였지만 그곳을 매일 오가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밝은 나의 작업도 시작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컴컴한 밤이 지나 눈부신 아침이 오듯, 빛과 그림자는 늘 우리 옆에 공존하고 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오늘도 난 빛과 어둠의 경계를 모호하게 풀어내는 작업 과정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꾸준한 붓질로 나의 그림 속 빛과 그림자가 더욱 따스하고 부드럽게 표현되어 내 그림을 관람하는 이들에게도 잠시나마 푸근한 휴식과 작은 치유의 시간이 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