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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그냥 보내버리고 쓰는 봄 이야기

by 봉남

올봄. 어느 날.

남편의 동료 선생님이 학교의 국악부 학생들이 공연을 한다고 초대했다.

우리 가족은 공연도 볼 겸 모처럼 남원 나들이를 떠났다.

야외무대에서 펼쳐진 국악 공연 객석엔 지역의 어르신들이 많았다.

남편과 나는 아이를 데리고 무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처음 듣는 악기 소리에 신명이 난 건지, 아이는 계속 무대에 난입하려 들었다.

그런 아이를 붙잡으려 남편은 자리에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겨우 자리에 앉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틈새를 놓치지 않고, 다시 내달리는 아이를 잡으려 남편이 일어날 때였다.

그때 갑자기 우리 뒤에 앉은 어르신이 남편을 향해 외쳤다.

"쟤가 첫째여~~~?"

남편은 허둥지둥"네~~"를 외치며 자리를 떴다.

남편의 답을 들은 어르신은 허공에 대고 호통을 쳤다.

"아! 왜 이렇게 자식을 늦게 봤어!

혼자 남아 그 말을 듣게 된 나는 웃픈 마음을 감추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에게 어르신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함께 웃던 남편이 말했다.

"근데 나 그 정도로 늙어 보여?"

그리 동안도, 그리 노안도 아닌데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아니. 요즘 다 늦게 낳고 하는데 그 할아버지가 옛날 생각하신 거지 뭐."

남편은 다른 사람들 말에 크게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닌데..

그 말은 가슴 어딘가에 꽂혔던 모양이다.


그 뒤로 자꾸 동네 놀이터에서도 우리 아이만 한 아이들을 보면, 아이의 아빠를 바라보게 된다고 했다.

다들 자기보다는 훨씬 젊다면서 조금 좌절하는 눈치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쇼핑몰을 잠시 갔다가 또 아이만 한 아이를 봤다.

아이의 아빠를 보더니 남편이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 저분은 그래도 나랑 비슷해 보여. 어쩐지 안심이 된다. ㅎㅎㅎ"

그분께 죄송하지만, 우리 남편은 나름 뭔지 모를 동지애를 느낀 듯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아이의 엄마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거기 아니고 이 쪽으로 가야 된다고~~"


'헉. 아빠?'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그 타이밍에 화장실 쪽에서 아이의 진짜 아빠가 나타났다.

쌀쌀한 봄 날씨에도 반팔과 반바지를 입은 찐 젊은 남성이었다.

남편이 동지애를 느낀 그분은 아이의 아빠가 아니라 '젊은 할아버지'였던 거다.


실망과 당황을 금치 못하는 남편의 표정을 난 보고야 말았다.


혈기가 왕성한 것인지 추위를 모르는 젊은 아빠의 옷 차림새.

대조적으로 목 끝까지 지퍼를 여민 우리 남편의 바람막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도 시도 때도 없이 뛰어대는 아들의 뒤꽁무니를 쫓는 남편의 뒷모습이 어찌나 애잔하던지..

봄부터 허리가 아파 새벽 달리기마저 못 나가는 사정을 생각하니 더 짠했다.


노화는 남편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남편 못지않게 나 역시 급속 노화를 겪은 봄이었다.


3월은 아이의 어린이집 적응과 병치레

4월은 새로운 어린이집 전원과 말하기 어려운 고민거리

5월은 고민의 해소 과정



나는 첫째 아이에게 집중하느라 마음이 바빴다.

그런 내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것인지.

둘째 임신의 다양한 증상들로 몸도 고단했다.

나의 노화를 정말 처절하게 실감했다. (지금도 실감하고 있다.)

그중 가장 괴로운 건 호르몬 변화로 찾아온 가려움증이었다.

가렵고, 따갑고, 붓고.. 어떤 날은 눈두덩이까지 부어서 거울 속 내가 낯설었다.

혼자 있을 땐, 고통을 잊기 위해 옛 시트콤만 봤다.

내게 그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봄을 보내본 적이 또 있었던가.


이젠 더우면 살갗에 닿는 모든 것들이 더 간지려워, 벌써 가을을 기다린다.

계절은 급행 없이 제 나름의 속도를 지켜가겠지만.


그래도 임신 증상의 나아짐과 괴로움을 오고 가며,

가장 중요한 '가족의 건강과 평화'를 자주 떠올렸다.

이번 봄은 정말 건강의 중요성, 감사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고단함의 틈새로 즐거운 순간도 많았지만,

꽃을 마음껏 보지 못했다.

(봐도 즐거움이 크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하려나.)


올봄, 인사를 나누지 못한 많은 꽃들에게 말하고 싶다.


"내년엔 봄을 닮은 꽃 같은 새 생명과 더 즐겁게 만나자."


올 겨울 태어날 아이와 부디 건강하게 만나길.

우리 모두 몸, 마음 건강하기를.


고단했던 시간도 봄 같은 미소를 보면

"너를 만나기 위해서였구나!" 하며 싱긋 웃게 되겠지.

그날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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