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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람 May 25. 2023

런던과 낭만

더럽고 느려서 가능한 낭만들

런던은 낭만적인 곳이다. 런던 자체가 낭만적이라기보다 런던에 살면 신기하게도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는 것 같다. 낭만적이지 않은 곳에서 자꾸 낭만적인 것들이 눈에 보인다. 내가 이렇게 현실에 매이지 않는 사람이던가? 원래 이렇게 하늘이 예뻤던가? 흘러가는 계절이 눈에 보이고 나도 모르게 매일의 일상을 감상하게 되는 런던의 마법에 빠지게 된다.


런던은 생각보다 지저분하고 낡아서 처음 이곳을 방문하게 된다면 크게 실망할 수도 있다. 1800년대에 처음 오픈한 런던의 지하철은 150년어치의 먼지를 그대로 간직한 것 마냥 더럽다. 아직도 스크린 도어가 없는 역들이 대부분이라 지하철이 철로에 들어서며 바람을 일으킬 때면 눈이 따가울 정도로 먼지가 많이 분다. 얼마나 많이 부는지 지하철을 이용한 날 집에 와서 코를 풀면 늘 시커먼 먼지들이 묻어 나온다. 게다가 런던에는 쥐들도 많다. 공원이나 오래된 집에서는 심심찮게 쥐들을 만날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지하철 철로에서도 런던쥐와 아이 컨택트를 할 수 있다. 나는 아직도 쥐들을 볼 때면 등골이 오싹해지는데 정작 영국인들은 길에서 고양이나 강아지를 만나는 것처럼 크게 감흥이 없는 것 같다. 어디 그뿐이랴. 런던은 겁나게 느리다. 11월에 고장 난 보일러를 1월이 다 되어서야 완벽하게 고쳤고 같은 시기에 주문한 인덕션도 다음 해 1월에 배송이 되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 나는 한국 친정으로 피신을 갔고 투지의 영국인인 남편은 한겨울에 찬물 샤워를 하며 2달을 버텼다. 인내심과 의지 하나만은 인정.


이런 곳에서 어떻게 낭만을 찾을까 싶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런던은 더럽고 느려서 낭만적이다. 200년 전 사람들의 신장에 맞춰 설계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런던의 지하철은 좁은 작은 반원형의 모양이다. 이 작은 지하철에 의지해 출근을 하던 나도 아침만 되면 몸을 욱여넣어 지옥철에 합류해야 했다. 유독 인파가 심하던 그날도 어김없이 지하철에 겨우 올라탔는데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옷깃만 스쳐도 sorry를 외쳐대는 영국인들과 좁은 공간에서 엉켜 있자니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돌기도 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탄 어떤 사람이 "Don't worry guys, we will all become friends at the end! (걱정 마세요 여러분들, 우리는 결국 모두 친구가 될 거예요.)"라고 외치는 게 아닌가. Personal space를 끔찍하게 여기는 영국인들이 다닥다닥 붙어 돈을 벌러 가는 모습을 풍자한 말이었는데 그 말에 하나둘씩 긴장이 풀려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폭소하기 시작했다. 정말 이러다 이 칸에 탄 사람들 모두가 다 친구가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전혀 그렇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손에 꼽을 만큼 낭만적인 출근길이었다.


어제는 장을 보고 두 손 가득 짐을 들고 오는데 저 멀리서 처음 보는 이웃님이 아파트 문을 여는 게 보였다. 그분이 문을 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꽤 먼 거리였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아파트에 들어설 때까지 문을 잡아주셨다. "정말 고마워요." "별 거 아니에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오고 가니 마음이 더 몽글몽글해졌다. 생각해 보니 이웃님 말대로 이거 정말 별거 아닌 건데. 한국에서는 누군가를 위해 문을 잡아주는 여유로움을 부리기엔 사회가 너무 바쁘게 돌아가다 보니 런던에서 경험하는 1분의 여유로움이 나에게는 큰 낭만으로 다가온다. 골목길에서 차를 마주할 때면 눈치 게임할 필요 없이 느긋하게 길을 건널 수 있는 여유로움도 나에게는 낭만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큰 대도시에서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먼저 가라고 손짓해 주는 운전자가 어떻게 낭만적이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작고 작은 낭만들이 쌓이다 보니 나중에는 도시 자체가 낭만적으로 보이게 된다. 바쁜 지하철역에서 버스킹 하는 뮤지션, 강가에서 놀고 있는 엄마새와 아기새들, 탁 트인 공원에서 연을 날리는 가족, 손녀와 앞마당에서 꽃을 심고 있는 할머니, 테이트 모던에서 바라보는 세인트 폴 대성당. 조금 지저분하더라도 손에 직접 흙을 묻히고 자연 그대로의 날것을 좋아하며 1분 1초에 목을 매지 않는 사람들. 그 속에서 나도 조금씩 더 동화되고 있다. 런던은 낭만적인 곳이다.

마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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