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줄 알았던 황학동 벼룩시장이 서울 풍물시장으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날갯짓에 열심입니다. 오래된 물건들이 무질서하게 쌓여있던 시장에 젊은 디자이너들이 찾아와 새로운 공방과 가게를 열며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는데요. 우리의 아이디어로 이 공간을 젊고 경쟁력 있게 만드는 게 목표라며 많은 젊은이들이 풍물시장 살리기에 소매를 걷어 붙였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포인트가 있습니다. 바로 ‘디스플레이’입니다. 풍물시장에 가면 구제 옷과 신발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곳이 많습니다. ‘일단 물건이 많아야 사람이 온다’는 상인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그 동안 모든 관심은 물건 확보에 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문제였습니다. 물건이 아무리 많아도 고객 입장에서는 여기가 도대체 무엇을 파는 가게인지,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물건을 살 수 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온 키워드가 ‘편집’입니다. 특정한 기획 아래 여러 가지 재료를 모아 엮어서 책이나 신문, 잡지 등을 만드는 일을 우리는 편집이라 부릅니다. 특히 방송이나 영화에서는 촬영한 필름을 잘라내어 재구성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편집은 우리가 갖고 있던 많은 것들 중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추려 재구성하여 고객에게 제시하는 겁니다. 더하는 게 아니라 빼는 게 관건이란 이야기입니다.
이런 편집의 개념을 시장에 접목하니 변화가 생겨납니다. 테마와 주제를 가지고 그에 적합한 제품들만 남긴 겁니다. 나머지 물건들은 과감히 빼버리니 가게들마다 저마다의 개성과 컨셉이 생겨납니다. 예컨대 ‘90년대 빈티지 청바지 전문’ 같은 식입니다. 이런저런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쌓아놓기만 했던 가게들이 덜어내고 걷어내니 고유의 색깔이 뚜렷해집니다. 이처럼 편집은 이제 ‘선택’과 ‘정제’, 그리고 ‘배열’을 키워드로 하는 마케팅의 핵심화두가 되었습니다.
롯데에서 새롭게 문을 연 ‘엘큐브’도 같은 맥락입니다. 예전엔 수많은 물건들을 판다 해서 백화점이라 불렀습니다. 많은 물건이 있다는 게 백화점만의 차별적 강점이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선택’이 곧 ‘고통'이 되어버렸습니다. 공급이 넘쳐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대안으로 인해 결정장애를 갖게 된 이 시대의 햄릿들은 선택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니 무조건 더 많은 대안을 제시하는 게 능사가 아닙니다. 이에 주목한 롯데는 젊은 층을 겨냥하여 그들의 취향에 맞춤한 편집숍을 열었습니다. 이름하여 미니백화점 ‘엘큐브’입니다. 판매하는 제품의 종류는 기존 백화점에 비할 수 없이 줄었습니다. 하지만 젊은 고객들의 열광은 커져만 갑니다.
‘적은 게 더 많은 것(Less is More)’이라는 금언은 여기 서울 풍물시장과 엘큐브에도 이렇게 접목되고 있습니다. 수십 가지의 모델을 가지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컴퓨터 업계의 강자 델이 왜 달랑 여섯 개 모델(맥북, 맥북 에어, 맥북 프로, 아이맥, 맥프로, 맥미니) 밖에 없는 애플에 왕좌를 내주어야만 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무얼 만들고 무얼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훨씬 더 중요해졌습니다. 관건은 편집입니다. ‘더(More)’가 아니라 ‘덜(Less)’의 미덕이 필요한 요즘입니다. ⓒ보통마케터안병민
*글쓴이 안병민 대표(fb.com/minoppa)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마케팅전략연구소,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 관리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경영혁신•마케팅•리더십에 대한 연구•강의와 자문•집필 활동에 열심이다. 저서로 <마케팅리스타트>, <경영일탈-정답은많다>, <그래서 캐주얼>, 감수서로 <샤오미처럼>이 있다. 다양한 칼럼과 강의를 통해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도전의 과정"이라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