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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칼럼 03] 그래서 캐주얼!

[국제신문 연재] 안병민의 세상읽기

국제신문 2019년 5월 6일자 22면에 실린 <세상읽기> 연재칼럼입니다.

 

투명한 유리병 하나. 바닥을 햇빛이 좋은 창 쪽으로 해서 뉘어놓고 벌 몇 마리를 집어넣는다. 밝은 쪽으로 가면 출구가 있다는 것을 아는 똑똑한 벌은 빛이 비치는 바닥 쪽으로만 몰려간다. 하지만 거기서 한참을 날아다녀도 출구를 찾을 수 없다. 반면 벌만큼 똑똑하지 않은 파리는 출구를 찾아 좌충우돌 모든 방향을 다 날아다닌다. 벌의 입장에서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결국 병을 빠져나오는 건 파리다. 답을 ‘아는’ 벌과 답을 ‘모르는’ 파리의 운명은 이렇게 엇갈린다.

 

A의 정답이 B에게는 오답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상황이 다르고 맥락이 달라서다. 알량한 지식과 경험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내 삶의 경영도 마찬가지다. 세상 75억 인구 중 나와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 세상에 나란 사람은 오로지 나 하나뿐. 그러니 가장 나답게 행동할 때 가장 독창적일 수 있다. 세상 어느 누구와도 다른 나만의 고유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남들은 어떻게 하는지 다른 사람 쳐다볼 필요도 없다. 받아 든 저마다의 문제지가 달라서다. 문제지가 다르니 답도 다를 수밖에. 그러니 옆사람 것 보고 베껴 쓸 생각은 일찌감치 접는 게 좋다. 내게 맞는 내 정답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노자는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라 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걸 나도 그렇다고 하면 그건 나쁜 일이고, 세상 모두가 좋다고 하는 걸 나도 좋다고 하면 그 역시 나쁜 일이라는 뜻이다. 획일적 기준에 대한 노자의 비판적 시각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좋고 나쁘고 아름답고 추함은 저마다의 기호와 취향이 있으니 일률적인 기준으로 칼로 무 자르듯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스스로를 숨기고 산다. 대세를 살펴보고 거기에 편승한다. 그게 편해서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기준을 따르면 편하게 묻어갈 수 있어서다. ‘기준’은 곧 권력이다. 기준에서 벗어나면 비난이 쏟아진다. 끊임없이 기준을 살피고 확인하는 이유다. 내가 튀어 보이지 않을까 두려운 거다. 그러니 내 생각은 없다. 남의 생각만 살핀다. 남의 눈치 보며 남의 기준에 맞추어 사는 삶에 나는 없다. 내가 없는 내 삶이 행복할 리 만무하다.  


실없는 유머긴 하지만 하다못해 자살을 하더라도 저마다의 방법이 다르다. 예컨대 사람은 무거운 돌덩이를 몸에 묶어 바다로 뛰어들어야 한다면 반대로 물고기는 풍선을 몸에 묶어 물 밖으로 나와야 한다. 내 입장에서의, 내 관점에서의 주체적 판단이 필요하단 얘기다.

 

남의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건 나다운 삶이 아니다. 내 생각으로 살아야 나답게 사는 거다. 그게 내 삶의 주체로 사는 길이다. 외부의 지식과 경험, 기준으로 가득한, 마음 속에 스스로 지어놓은 틀을 없애야 한다. 노자는 그걸 ‘무위(無爲)’라 했다. 비우고 내려놓는 거다. 비워야 채워진다. 내려놓아야 올라간다. 무위를 통해 ‘참나’를 만나는 거다. 세상에 유일한, 오롯한 나의 존재 말이다. 


벤치마킹의 유효기간은 끝나가고 있다. 회남(淮南)의 귤을 회북(淮北)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는 것처럼 환경과 조건에 따라 사물의 성질은 변한다. 그러니 내 정답은 내가 찾자. 정답은 정해진 하나가 아니라 내가 만들어가는 만큼 많다. 내가 갈 길, 내가 만들며 가야 한다. 남들 마음에 들자고 사는 인생이 아니라서다. 한 방향으로만 달리는 일방적 궤도에서 살짜쿵 떨어져 나오면 나름의 재미와 의미가 쏠쏠하다.  


정상적인 상태와 다른 걸 우리는 ‘이상(異常)하다’라고 표현한다. 부정적인 늬앙스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껏 ‘정장’과 ‘유니폼’을 입고 살았다. 하지만 기계적 일사불란함이 필요하던 시대는 저물었다. 개개인의 개성과 색깔이 필요한 세상, ‘캐주얼’의 시대다. 정장이 ‘정해진 규정과 규칙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삶’에 대한 비유라면, 캐주얼은 ‘저마다의 개성과 나만의 색깔을 뽐내고 드러낼 수 있는 자유와 창의’에 대한 은유다. 그러니 이상해야 한다. 일탈해야 한다. ‘이상’과 '일탈'이란 표현은, 그래서 곧 도전이고 용기다. 우리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이상하자. 우리 모두 각자의 방향으로 일탈하자. 행복한 나로 살기 위한 주문? 그래서 ‘캐주얼’이다! ⓒ보통마케터안병민



*국제신문 2019년 5월 6일자 22면 <세상읽기> 연재칼럼 http://bit.ly/2J1MLho


*글쓴이 안병민 대표(fb.com/minoppa)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마케팅전략연구소,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 관리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경영혁신•마케팅•리더십에 대한 연구•강의와 자문•집필 활동에 열심이다. 저서로 <마케팅리스타트>, <경영일탈-정답은많다>, <그래서 캐주얼>, 감수서로 <샤오미처럼>이 있다. 다양한 칼럼과 강의를 통해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도전의 과정"이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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