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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Jun 05. 2023

미국 여행 17일차 - San Diego(5)

2022.07.28.


샌디에이고에서 맞이하는 가족 완전체 첫날. 어제보다 한결 좋아진 컨디션으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더니, 토끼 두 마리가 보인다. 둘이 가족인지 친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각자 부지런히 땅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 먹고 있다. 난 토끼계의 강형욱이 되어 같이 놀고 싶어 슬리퍼를 끌고 나갔더니, '저 새끼 뭐야' 표정으로 산으로 깡충깡충 뛰어서 사라졌다. 세상은 넓고 귀여운 녀석들은 많다.


San Diego에서의 일정은 느슨하게 짰다. 오늘의 공식 일정은 지우 라이드와 쌀국수집 저녁뿐이었다. 내가 미국에서 다시 먹고 싶었던 3개의 메뉴를 꼽으면 In-N-Out, 고수 팍팍 넣은 걸쭉한 쌀국수, 그리고 엔초비를 곁들인 피자였다. 베트남 쌀국수는 20년 전 미국에서 처음으로 먹어봤는데, 20년 넘게 살아보니 세상의 맛은 모두 안다고 생각하던 나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모르는 맛이었다. 국수계의 두리안 같다고나 할까, 처음엔 모르는 맛에 당황했는데, 이 맛을 알고 싶어 계속 떠먹게 되는 국물이었다. ‘이런 음식도 있구나. 고수? 사람이 이런 것도 먹는구나.’ 평생 베트남 쌀국수만 편식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코로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을 축하도 할 겸, 에블바뤼 쌀국숫집을 가기로 하고, Frank 형도 일찍 퇴근한다고 했다. 


유일한 오전 일정, 지우를 방실이네에 데려다줬다. 방실이네엔 지우랑 동갑인 아영이가 있다. 미국 사는 또래 친구와 시간 한 번 보내 보라고. 그리고 지우의 여름방학 영어 숙제로 ‘우리말 못하는 외국인과 영어로 인터뷰’를 하는 것이 있었는데, 숙제에 진심인 지우는 그 숙제를 아영이와 할 수 있는 날이라 군소리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인터뷰 사전 질문지도 만들었다. 지우와 아영, 중2 두 소녀 모두 친해지는데 40년씩 걸리는 성향들이라 오늘 내로 재잘재잘 친구가 되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둘만 있으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대화들이 있을 테니. 일단 BTS로 대화 시작해 보길. 굿럭.


지우만 내려주고 우린 Carmel mountain plaza란 곳으로 이동해 trader joe’s를 방문했다. 며칠 전 나 격리하는 동안 지영이가 은영이 누나와 여길 다녀왔는데 임팩트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여행할 때마다 집중 방문하는 유통과 브랜드들이 계속 바뀐다. 첫 번째 하와이에선 Ross, 두 번째 하와이에선 t.j.max, 세 번째 하와이에선 whole foods market, 네 번째는 gap과 brooks brothers였다. 이번에는 trader joe’s가 될 것이 유력했다. 누나 집에서 가까워 수시로 드나들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도 있고.


화사한 꽃들이 입구에서 반겨준 trader joe's에는 유기농 제품들이 가득했고, 우리의 쇼핑 메인 템은 올리브 오일과 발사믹 소스였다. 시음도 가능했다. 올리브 오일에 이토록 다양한 맛이 있다니. 지영이는 이번 여행의 선물은 이걸로 뿌리겠다며 저래도 싶을 만큼 듬뿍 샀다. 자~암깐만~ 이 무게 어떻게 감당하려고? 아, 짐은 내가 들지, 참.


오일 시음으로 미끌미끌해진 소화기 내장들을 뒷마당에 늘어져서 건조 좀 시키고, 오후에 지우를 데리러 방실이 집에 다시 갔다. 숙제 잘했냐고 물으니, 아영이는 우리말도 잘하는 편이라, 영어만 하는 사람과의 인터뷰 대상이 아닌 것 같아서, 옆 집 아이를 데리고 와서 인터뷰를 진행했다고 한다. 와, 그렇게까지. 이 아이는 정말 숙제를 진심으로 하구나. 아영아, 며칠 후에 또 보자.


다시 은영이 누나 집으로 돌아와 여행의 꽃, ‘다 같이 축 늘어지는 시간’을 가졌다. 지아는 고양이 방에 들어가서 또 고양이가 되었고, 지영이는 거실에서 원격근무하고, 나랑 지우는 누워서 각자 유튜브를 시청하는 세상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갔다. 샌디에이고는 이래야지. 


4시쯤 프랭크 형이 퇴근하고 들어왔다. 이렇게 일찍 퇴근해도 되냐 물었더니, 씨익 웃으며 더 일찍 나올 수도 있다고 했다. 이것이 한 회사 20년 넘게 다닌 board member의 여유인가. 


저녁은 Mira Mesa의 쌀국수집 ‘pho cow cali’로 갔다. Frank형이 자신만만하게 들어가는 걸 보니 맛집임이 틀림없다. 두 가족에 영휘 친구까지 총 9명이 둘러앉아 각자의 메뉴를 골랐다. Frank형이 한 명 한 명 메뉴와 특이사항들을 차분하게 주문하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주문이 이토록 매끄럽다니. 종업원은 열심히 얼굴과 앉은자리 위치를 확인하며 한 명 한 명의 메뉴를 적길래 설마 했는데, 역시 음식은 테이블 가운데로 모두 갖다 줬다. 그래, 내가 10분 전 뭘 시켰는지도 헷갈리는데, 아무리 멘사 출신의 천재 종업원이 온다고 해도 처음 보는 아시아 사람 9명의 각기 다른 주문을 얼굴과 매칭하며 외울 순 없지. 예전에 왕십리 대도식당에 손님들 신발 귀신처럼 알아서 내주시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면 가능할까.


쌀국수가 정말 푸짐하게 나왔다. 쌀국수 인당 하나씩에 쉐어하는 메뉴까지. 맛도 말해 뭐 해. 다만 이번에도 20년 전 쌀국수 인생 첫 젓가락질의 감동은 아니었다. 세월이 나에게 주름을 주고 미각을 뺏아간 걸까, 아님 맛집 천국인 나라에서 맛있는 음식을 충분히 먹고살아서일까. 그래도 푸짐한 음식 n 분의 1 몫은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먹었다. 


지영이의 눈빛 지시로 내가 살짝 가서 계산을 하려 했는데, 미국에선 테이블에서 계산을 하잖아. 그래서 bill을 가지고 오면 내가 잽싸게 낚아채서 카드를 찔러 놓으려 했는데, 역시 노련한 Frank형이 bill을 인터셉트했다. 우리가 저녁 한 끼 꼭 사고 싶다고 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그러면 토요일 저녁은 맛있는 곳에서 우리가 꼭 사겠다고 하며 deal을 마무리했다. 맛집 검색 끝에, 토요일 저녁은 강남에서 무수히 다녔던 ‘딘타이펑’으로 예약 완료. 그날 위 찢어질 때까지 먹읍시다.


먹고 나오니, 영휘는 그 옆 Mochinut 가게로 사라졌다. 쫄깃쫄깃 달콤한 모찌도넛 가게, 맛있지만 비싼 곳이었다. 1인 1 도넛을 집어 들었다. 오 이거 맛있네. 크리스피 도넛 처음 먹었을 때의 달콤 짜릿함이었다. 여기는 무조건 한 번 더 와서 한 박스 질러야겠다.


소화도 시킬 겸 Westfield UTC 쇼핑몰에 가서 산책을 했다. UTC가 뭘 줄인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구색이 좋은 몰이었다. 우리가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물렀던 곳은 접시 도자기 가게였는데, 배를 채워 에너지 레벨이 치솟은 지우, 지아는 판매사원이 되어 고객인 나에게 상품 설명을 해줬다. 서로 경쟁하 듯 직급이 올라가더니, 결국 둘이 이 가게 사장님, 회장님이 되어 날 여기저기로 데리고 다녔다. 왜 갑자기 역할 놀이에 진심이지? 국내 할인점과 백화점의 삼성 LG 판매사원들도 이 정도로 빡세게 영업하지는 않는단다. 그래도 두 아이가 아빠를 서로 데리고 가려는 건 흔치 않은 시간이라 기분 좋게 끌려 다녔다. 


걷다 보니 나의 사랑 ‘All Birds’ 매장이 보였다. 몇 년 전부터 이 브랜드 신발만 신었는데, 항상 온라인으로 주문만 하다 보니, 오프라인 매장은 처음 봤다. 반가워서 매장 안으로 들어가서 지금 신고 있는 all birds에게 친구들도 보여주고 인증샷도 찍고 싶었으나, 문이 닫혀 있고 직원들은 마감을 준비하고 있었다. 너무 일찍 퇴근하는 거 아닌가? 복지 좋네. 나 최소 양말 한 켤레는 샀을 텐데.


충분히 걷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의약품 소매점 CVS에 들렀다. 여기도 Drive Thru다. 미리 주문해 놓고 약만 받아간다. 오랜만에 선진국 답네. 


샌디에이고에서 처음으로 정상적인 하루를 보냈다. 몸 컨디션은 얼굴 못 생겨진 것 빼곤 거의 다 회복되었다. 며칠 격리로 날렸으니, 남은 시간은 더 알차게 보내자. 그래도 잠은 계속 격리 방에서. 철커덕.



Trader Joe's 앞에서 아빠 얼굴 괴물로 색칠하기


자유 시간에 숙제도 좀 하고


pho cow cali


메뉴판 음식 다 시키기


아빠 손님, 여기로 오세요.


최애 브랜드 올버즈 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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