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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ㅏ4ㅏ로운 이야기
By 배낭멘곰 . Nov 24. 2016

14. 고기 먹는 채식주의자

당신의 정답이 누군가에겐 폭력이 된다.

 "고기를 왜 안 먹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먹음직스러운 순대에 손도 대지 않자 의아하게 여기는 그녀에게 '이제 고기를 안 먹기로 했다'라고 얘기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토록 밑도 끝도 없이 물고 늘어질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환경문제나 동물에 대한 윤리문제에 있어 채식을 시작했다고 간략하게나마 이유도 설명해 줬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니, 애초에 이해를 해볼 노력조차 없는 것 같았다. 내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고기를 먹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걸 보니.

 "사람은 꼭 고기를 먹어야만 해. 사람에게 필요한 영양소가 들어있다고."

 순식간에 식사자리는 '고기를 먹지 않는 나'에게 집중되었다. 마주 앉은 서너 명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귀 끝까지 얼굴이 붉어졌다.

 "괜찮아, 먹어봐."

 급기야 나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고기를 먹어도 '괜찮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환경문제나 동물윤리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던 나는 그곳에 없었다. 그런 이유 따위,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 돼버린 것이다.

 간이며 허파 같은 것을 맛있게 씹어먹던 마주 앉은 사람들도 젓가락질을 멈추고 기름때문에 반지르르 해진 입술로 한 마디씩 던졌다.

 "그래, 하나쯤 먹는 게 어때."

 "참으면 병 된다."

 유치원 시절, 김치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억지로 식탁 위에 앉혀진 채 김치와 눈싸움을 벌이던 때가 떠올랐다. 내가 김치를 먹으면 먹이는 데 성공한 사람들은 어떤 보상이라도 받는 걸까? 필시 그럴 것만 같았다. 제일 먼저 성공한 이는 나 몰래 경품으로 김치냉장고를 타 갔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쓸데없이 본인 힘을 써가며 내게 김치를 먹일 이유가 없잖아. 나는 달걀말이를 엄청 좋아했지만 달걀말이를 남기는 친구에게 억지로 먹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리 몸에 좋고, 영양소가 가득한 음식이면 제 입에나 욱여넣을 망정이지 왜 내 입에 쑤셔 넣으려고들 하는 거야. 분명 나 몰래 김치냉장고를 타 가는 게 틀림없어.

 "안 먹을래요."

 사람들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먹지 않았다. 실은 못 이기는 척 입속으로 한 점 넣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우선 난 참는 게 아니라 정말 먹고 싶지 않은 상태였고, 한 점이라도 먹으면 앞서 내가 뱉은 환경 문제나 동물 윤리 문제와 채식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아서였다. 적어도 나 자신에겐 그런 문제에 눈을 감는 것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몰랐을 땐 어쩔 수 없다 쳐도, 이미 알아버린 이후였으니까.

 거절 의사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게 표현했으니 다시 식사를 이어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은 정대만 인걸까. 포기를 모른다. 포기하지 않고 내게 던진 놀라운 한 마디.

 "그럼 우린 뭐가 돼?"

 응? 그제야 순대를 오물오물 씹어먹고 있는 입모양들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교향곡에 맞춰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처럼 입모양은 현란하게 움직이다 일순간 멈춰 섰다. 마에스트로가 된 그녀가 그곳에 앉은, 나를 제외한 모두를 '우리'로 묶어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대결은 1:1 구도에서 4:1 구도가 되어버렸다. 물론 그들 역시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의사를 묻지 않고 결정하는, 참 뛰어난 리더십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가 '우린 뭐가 돼?'라고 뱉은 순간 모든 게 분명하게 다가왔다. 그녀가 내게 고기를 먹이려는 이유는 결코 고기에 영양이 많아서도, 고기가 맛있어서도, 나 한 명쯤 고기를 먹지 않아도 환경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녀는 고기를 먹는 자신이 환경문제를 무시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란 걸, 동물 윤리문제에 눈 감고 있는 게 아니란 걸, 자신이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걸, 내가 고기를 먹는 행위를 통해 증명받고 싶어 했던 것이다. 채식이란 행위가 그런 사회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려, 자신의 육식 위주 식습관에 정당성을 부여받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내 생각은 애초에 '틀린 것'이었고, 그것을 바로 잡아야만 본인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아니, 근데 나한테 고기를 먹인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이미 그 문제에 눈을 뜬 사람들이 수 억 명이고, 그들 중 상당수는 채식을 하나의 해결책으로 선택했는데. 화려한 색의 아이스크림의 원재료가 각종 화학첨가물에 인공 색소란 걸 알면서도 그 맛의 유혹에 눈 감아 버리는 것이나 똑같다.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 싫은 거다. 오죽하면 '맛있으면 0Kcal'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유혹을 져버리는 게 쉽지 않은 일임을 나 자신도 잘 알고 있기에 고기 먹는 이들을 욕하지 않았다. 아니, 내겐 욕 할 권리 자체가 없다. 그들은 뭐 그들 나름대로 사회적 문제에 충분히 관여를 하겠지. 그러나 그녀는 나를 '비정상인 인간' 취급을 했다. 그게 문제다.


 이십 대 초반에 잠깐 동안 채식을 했었다. 과거형으로 쓰는 이유는 지금 나는 채식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채식을 의미 없는 행동이라 생각하여 그만둔 게 아니다. 오히려 난 채식을 포기한 나 자신이 부끄럽고, 여전히 채식을 하는 사람들의 마인드와 정신력을 존중하고 또 존경한다. 여기서 '정신력'까지 운운해야 하나 싶겠지만,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위의 사례에도 보이듯 우리나라에서 채식을 하기 위해선 상당한 정신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채식을 포기한 가장 큰 이유 역시 결코 채소 위주의 식단이, 고기의 유혹이 힘들어서가 아닌, 정신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채식을 한다'라고 얘기하면 쏟아지는 불편한 시선을 견딜 정신력이 없어서였다.

 채식을 하던 약 4개월간, 수많은 편견 그리고 혐오와 마주쳤고 어느 순간 내가 '별난 사람'을 자처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처음엔 이 지구에, 그리고 동물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어 선택했던 행동이 이상한, 별난 행동이 된 것이었다.

 깊게는 소수자 문제까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수자들, 장애인, 다문화 가정의 자녀, 가난한 사람, 성 소수자, 유색인종 등. 사실 이들을 지칭하는 소수자란 표현도 잘못됐다. 그들은 늘 일정 비율로 지구 안에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 엄청나게 존재한단 말이다. 그들이 숨어 있어서 안 보이는 게 아니다. 주권을 잡은, 조금 더 유리한 위치에 선 이들이 자신들의 눈을 가리고 '안 보고' 있을 뿐이다. 채식주의자가 이런 사회적 차별을 느끼는 소수자는 아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을 체험해보기엔 충분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자신과는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틀린 것'으로 매도했다. 가장 놀라웠던 건 '고기를 안 먹는다'는 내 한 마디로 나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취급을 한다는 것이었다. 고기를 먹는다, 안 먹는다를 기준으로 순식간에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전이나 이후나 나란 사람의 본질은 1도 변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살아가며 본인의 본질이나 가치와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얼마나 많이 재단되고 분류되는가. 그 누구의 권한으로 무엇이 정상인지 무엇이 비정상인지를 가르느냔 말이다. 그깟 고기 안 먹는 게 뭐라고? 그깟 피부색이 뭐라고? 그깟 성별이 뭐라고? 그깟 종교가 뭐라고? 그깟 돈이 뭐라고? 그깟 장애가 뭐라고? 당신과 나의 생김새가 다름이 당연하듯, 세상 사람들이 이처럼 다르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60억이 넘는 모든 인간이 어떻게 다 같을 수가 있겠는가? 어째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 그러나 마치 자신이 처음부터 이 지구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이들은 너무 많았다. 그런 행동이 혐오를 낳았고, 혐오는 박해를, 그리고 곧 전쟁을 낳았다. 어리석은 인류는 그와 같은 실수를 인정하는 한편, 끊임없이 되풀이하려 하고 있다. 내 맞은편에 앉은 그 여자처럼 말이다.


 채식을 하기로 결심했던 건 스물셋의 여름이었다. 당시 나는 두 달 일정으로 홀로 유럽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카우치서핑으로 프랑스 콜마흐에 사는 한국인 누나와 그녀의 남자 친구 집에 머물게 됐었다. 누나는 살면서 내가 만난 첫 번째 채식주의자였다. 아니, 어쩌면 그 전에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지 않아서' 그 존재를 모르고 있었는지도. 나는 누나에게 가볍게 물었다. '왜 채식을 해?'라고. 그러자 밀도 높은 무거운 대답이 쏟아졌다. 단순히 건강이나 다이어트를 위해 하는 줄 알았던 채식은 사실 환경문제와 더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고, 수많은 채식주의자들은 대부분 이러한 이유로 채식을 하고 있었다. 누나는 내게 Earthring이라는 다큐멘터리(YouTube에 검색하면 나온다.)도 보여주었다. 다큐는 크게 세 가지 챕터로 나뉘어 첫 번째로는 환경 문제, 두 번째로는 비 인도적인 축산업 문제, 세 번째로는 인간의 허영심에 고통받는 동물들에 대한 윤리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사실 별 생각 없이, 단순한 호기심에 던진 질문이었기에, 이 같은 무거운 답변에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모르는 세계'를 탐험하고 싶다고 떠나온 여행이었는데, '내가 모르는 세계'는 비단 유럽의 수많은 도시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 일상 속에서도 이 같은 세계가 늘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부끄러워졌다. 그런 세계를 모르고 살았단 것이 부끄러웠고, 아침에 먹고 온 빵 사이의 햄 한 조각에도 다큐에서 봤던 제조과정이 담겨 있단 생각에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다큐를 끝까지 다 본 나는 그 자리에 붙받이처럼 앉아있었다. 머릿속의 회로가 엉켜 엉망이 된 것이다. 그럼 도대체, 내가 여태껏 먹은 것은 무엇이며 앞으로 난 무엇을 먹으며 살아야 하지, 뭐, 그런 생각이 오갔던 것 같다. 누나는 말없이 영상 종료 버튼을 누르고 자리를 비켜줬다. 내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여겼던 것이다.  불이 꺼진 캄캄한 방에 홀로 앉아 생각했다. 어쩌면 이 여행 이후로 내 삶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겠구나, 하고.

 그리고 여행 이후 채식을 시작했다. 그동안의 내 식사가 얼마나 육식위주였는지를 깨닫곤 아연실색했으며, 한 끼를 먹어도 조심스러워졌다. 이런 변화는 적어도 나 자신에 있어선 매우 긍정적이었다. 삼시세끼 잘 챙겨 먹지 않고, 식생활이 엉망이던 나를 제때 식탁 위에 앉게 해줬고, 채식 위주의 식단이 조미료와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져 무뎌진 혀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줬다.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기게 되었고, 정신적으로도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데 사실 웬만해선 채식메뉴가 더 맛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채식 메뉴엔 빠지는 재료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대체할 재료나 원재료의 품질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기 때문이다. 원재료가 부실하다고 해서 자극적인 소스 맛으로 그 정체를 감추거나 하지 않는다. 음식을 마주하는 사람의 태도도 '맛보고 삼킨다'보다는 '입 안에서 음미한다'모드가 되기 때문에 재료 하나하나 먹고 느끼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그저 배를 채우려 허겁지겁 삼키기에 바빴는가.

 그러나 문제는 다 같이 모여하는 식사 자리였다. 친구들과, 가족들과는 어찌어찌 잘 넘어갈 수 있다 쳐도 회식 같은 자리에서 고기를 먹지 않았다간 '대접해줘도 안 받아먹는 예의 없는'아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구구절절 채식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도 없고, 설사 설명했다간 그곳에 앉아 고기 먹는 사람들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도 같고. 그래서 웬만해선 물만 들이키며 풀떼기만 먹었고 "왜 안 먹어?"란 질문엔 "속이 안 좋아서요"란 대답으로 얼버무렸다. 그런 거짓말에도 이골이 나 언젠가부턴 솔직하게 '고기를 안 먹기로 했다' 얘기해버리니 사람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왜 안 먹느냐는 사람부터, 고기를 먹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사람, 내가 채식하는 이유가 부질없음을 알려주는 사람, 이 모든 걸 한꺼번에 얘기하는 사람까지. 마치 고기를 먹지 않으면 인류는 곧 멸망이라도 하는 듯 심각하게 내게 훈수를 뒀다. 이런 시선이, 관심이,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그깟 고기가 뭐라고. 자신의 사고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냥 입이라도 닫고 있으면 안 되는 건가. 나를 이해해주길, 인정해주길 바란 것도 아닌데. 그냥 두면 안 되는 건가.


 살다 보면 나로서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요플레 뚜껑을 핥지 않고 버린다거나, 한 겨울에 반바지를 입고 다닌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왜 요플레 뚜껑을 핥아먹지 않는 거야!"라고 비난하거나 "겨울에 그러고 다니면 여자 친구가 헤어지자고 할 거예요."라고 충고하지 않는다. 요플레 뚜껑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거고, 겨울에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 거다. 그저 있을 뿐이다. 머리색이, 피부색이, 성별이,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그들도 그저 있을 뿐이다. 그 누구도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가 없단 말이다.

 누군가는 어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것과 이것은 문제의 크기가 너무 다르잖아,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단언컨대 절대 그렇지 않다. 부피는 다를지언정 그 밀도는 같다. 결국 이건 본질의 문제가 아닌,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요플레 뚜껑이나 채식주의자나 수많은 소수자나,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선 그 무게가 같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들었던 라디오의 오프닝 멘트가 생각난다.

『... 미국인들은 어떤 신대륙을 발견하곤 굉장히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 입장에선 전혀 기쁠 일이 아녔죠. 그들에겐 발견이 아닌, 땅을 빼앗긴 것뿐이었으니까요.』

 그동안 이런 류의 얘기에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발견'이라는 표현을 써 눈치채지 못했는데, 발견은 미국인들의 입장일 뿐, 원주민들에겐 침략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세계사는 본인들이 조금 더 우세하다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가해자에 의해 쓰였다. '발견했다'는 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인 걸 보면 말이다. 그러한 오프닝 멘트를 듣고 나니 내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 나는 저들이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 '발견했다'같은 표현을 쓴 적이 없는가? 그로 인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적은 없는가? 그리곤 생각했다. 우린 이런 문제에 있어서 더 민감해져야만 한다고. 단순한 표현 속에도 편견과 혐오의 칼날이 숨어있고 이 칼날에 찔려 피 흘리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내 말이 곧 정답이라 여겨 그걸 뱉는 순간, 그 정답이 누군가에겐 폭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럼 우린 뭐가 돼?'라고 뱉어버린 후에도 내게 순대를 권했다. 이윽고 순대 한 점이 들어 올려져 눈 앞에 다가온 순간 그만 질려버리고야 말았다. 이건 내게, 불가항력이었다.

 결국 순대 한 점을 입 안 깊숙이 들이밀었다. 당면을 감싼 미끌미끌한 순대의 표면이 뱀의 살갗처럼 온몸을 뒤틀며 혓바닥을 휘저었다. 억지로 씹어 목구멍으로 넘기고 나자 그제야 그들은 안도의 표정을 내비쳤다.

 "거 봐, 맛있지?"

 그 날, 난 물리적인 힘 없이도 폭력이 가능함을 확인했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는 고기 먹는 채식주의자가 되어버렸으니까. 그 날 내가 삼킨 것은 어쩌면 고기가 아닌지도 모른다. 혐오와 편견으로 똘똘 뭉친 단단한 덩어리였을 수도.

 집으로 돌아와 속을 게워냈다. 내가 먹은 순대가 역겨워서가 아니었다. 상대방을 이해할 생각조차 없던 그녀의 태도가 역겨웠던 것이다. 그녀의 몰상식함과 혐오와 편견으로 뭉친 덩어리를 변기 안으로 마구 쏟아부었다.


 인정할 수 없고, 이해하는 노력조차 도저히 힘에 부친다면 가장 쉽고 좋은 방법이 있다. 그냥, 입을 닫아라. 그러면 된다. 그 아무도 당신에게 이해나 인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절대로. 그러니까 그냥, 조용히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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