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에필로그

아무 일 없던 듯 살아온 나의 기록

by 아가미

본능적이었을까? 3년 전, 번아웃과 남자친구와의 이별이 겹쳐져 도무지 견디기 힘들던 어느 날, 이유가 명확하니 그저 현재의 고통이 감당되길 바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처음 정신과를 찾았다. 당시 체중도 많이 빠진 상태였고 질문들에 대답하다 ‘사람들이 죽을까 봐 먼저 죽고 싶어요’라고 답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거기서 나는 예상치 못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정신과에서의 질문에 하나씩 대답하다 보면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기 마련이다. 나 역시 동생의 직업을 묻는 말에 동생이 발달장애인임을 덤덤히 밝히게 되었고, 언제나 그랬듯 알게 모르게 무거워진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 자체만으로 생경한 정신과에서 우울증을 진단받고 나오는 길, 나에게 동생 이야기는 일상적인데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게 처음으로 슬펐다. 그래서 이번에도 괜히 심각해지지 않으려 노력을 해버린 건 더 슬펐다. 물론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때 나는 좀 슬프게 지냈었다.


다행히도 우울증은 잘 극복됐고 현재는 아무 일 없이 잘 살고 있다. 나를 괴롭히던 상사가 있는 회사를 떠났고, 그 뒤로는 일에 대해 나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며 지내고 있다. 여유가 생기니 내가 먼저 동생에게 기대어 편안한 마음을 찾았다. 표정도, 표현도 적었던 동생이 자라서 나름의 표현을 하는 게 너무 귀엽고 신기하기도 하다. 동생과 첫 단둘이 여행에 가서도 그랬고, 동네 산책을 하면서도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다니는 센터 선생님께서 임상심리사인 지인의 논문을 위한 인터뷰에 응해 줄 수 있는지 부탁했다. 비장애형제의 심리와 관련한 주제였다. 이런 상황에서의 평소처럼 나는 ‘지지 않고’ 응했다. 이건 나와 내 가족에게 너무나 익숙해진 아무렇지 않은 주제니까 당당하게 해야 한다. 나는 깔깔깔 웃으며 깔끔하게 인터뷰를 해냈고 사례비 5만 원을 딸랑거리면서 집에 들어왔다. 무료로 심리 상담도 해준다고 해서 엄마한테 자랑도 했다.


어쩌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그 상담에서 나는 처음으로 발달장애인 동생의 존재가 나의 삶의 근간을 뒤흔든 사건이 맞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거진 25년 만이었다.

동생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서나 자연스레 거쳐야 할 관문처럼 밝게 말하는 나였다. 숨기고 싶은 마음이 죄 같았던 적도 있었을 테지만 익숙해진 게 가장 큰 이유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그런 내가 상담이 6회기에 접어들 무렵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막아낼 수 없을 정도로 울었다. 인정하기 싫으리 만큼 동생을 탓하는 울음이었다. 아니, 사실은 나를 제대로 봐주지 못한 부모님을 탓하는 울음이었다.


어린 시절에도 비슷하게 상담을 하면서 내 감정이 꺼내질 뻔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설픈 상담사의 말이라며 엄마는 본의 아니게 내 화를 억눌렀다. 그때 억눌러진 내 화가 모두 내 몫이 되어 몇 년을 헤맸던 걸 알 턱이 없던 엄마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말했다. 내가 아무렇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상담의 말을 가려 들으라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달랐다. 엄마보다, 어설플 수 있다는 상담의 말보다, 그저 나를 보기로 했다. 내 안에서 비롯된 분노를 마음대로 두기로 하고 나니 나의 힘듬에 대해 처음으로 누군가를 탓할 수 있는 기회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외면하지 않기로 하고, 나는 아직 헤매고 있다. 드러내는 일이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상하게 삐쳐 나온 모양새를 막기 어려울 때도 있다. 시간에 쌓인 나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얽혀있어 사랑하면서도 시도 때도 없이 울고 원망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부모님의 탓만은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바꿀 수 있는 건 없었고, 그저 그간 치워낼 수도 없이 어질러진 내 방을 차곡차곡 정리해 두기 위한 기록을 하기로 했다.


집을 나서게 될 어느 날, 어지럽기만 할 줄 알던 내 방을 멀끔하게 두고 ‘감사합니다. 가끔 생각날 때 들를게요’ 인사하며 떠나고 싶다. 그러면 내가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