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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만성 Sep 18. 2023

30년 신춘문예 소설당선 도전기

02- 구걸화법: 이거 하나 사주시면 저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나는 섬마을 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광역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소위 말하는 유학을 했다. 17살에 부모님을 떠나 독립된 주체가 된 셈이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도시로 진학을 하면 대개 자취나 하숙을 했다. 나는 진학한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는데 자취집에는 나를 포함해 5명의 유학생들이 거주했다. 고만고만한 방이 가로로 쭉 나열된 쪽방 자취집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수완 좋게 그 집을 전세 70만 원에 계약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목돈이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나는 70만 원을 전세금으로 맡기고 그 방에서 고등학교 3년, 대학교 1년, 도합 4년을 보냈다. 대학교 1학년 때 기숙사로 들어가면서 전세금 70만 원을 돌려받을 때는 왠지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가 위대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가끔 그 방은 내 꿈속에 자주 나왔다. 냉장고가 없어서 신 김치를 볶아서 먹던 장면, 연탄불이 꺼져서 파카를 껴입고 담요를 둘둘 말아 오들오들 떨면서 잠든 장면, 근처의 여학교 자취생의 눈길을 끌어보려고 수작을 벌이던 장면, 졸다가 깨다가를 반복하면서 대학입시공부를 하던 장면, 그 모든 풍경 속에는 일기를 쓰며, 소설가를 꿈꾸던 어린 문학청년이 있다. 아직 그방을 소재로 나는 한 편의 소설도 쓰지 못했다. 너무나 소중한 것이어서 쉽사리 쓰고 싶지 않은 것일까.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태어난 아이가 청년이 될 때까지 수시로 내 꿈을 드나들던 고등학교시절의 자취방이 언제부턴가 꿈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한편으론 다시 꿈에 나타날 자취방의 풍경이 어떤 것일지 그립기도 하다.


  나는 선지원 후시험 학력고사제도의 첫 대상자였다. 진학할 대학을 정해놓고 시험을 보았다. 소설가를 꿈꾸었기에 국문학과에 진학할 수도 있었는데, 나는 국문학과보다는 신문방송학과에 더 관심이 많았다. 당시에 내가 알던 소설가들 중에는 신문기자출신이 많았다. 이상이 대표적이었는데, 내 깐에는 신문기자와 소설가는 동격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지금도 문순태, 김훈이나 장강명 같은 신문기자 출신 소설가가 좋은 소설을 쓰는 걸 보면 내 생각이 딱히 틀린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훗날 기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여하튼 나는 신문방송학과에 합격했다. 당시에 합격발표는 지원한 대학교의 게시판에 명단을 붙여서 했다. 나랑 같은 자취집에서 공부했던 친구 둘이 같은 대학에 합격했다. 우리는 그날 합격의 여운에 취해 얘기를 나누다가 누가 제안했는지 몰라도 졸업식장에서 꽃다발을 팔아보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광주의 꽃도매 시장에서 꽃을 사고,  학교 주변의 야산에서 꽃장식을 할 나무를 베어 단으로 묶고 목포행 버스를 탔다. 여관을 잡아놓고 우리는 밤새 꽃다발을 만들었다. 어설픈 솜씨였지만 화사한 장미와 안개꽃에 사철나무의 조합은 그럴싸했다. 다음날 아침 목포의 홍일고와 문태고에서 우리는 밤새 만든 꽃다발을 다 팔았다. 이문이  많이 남지는 않았지만 19살 자취집 독립생들의 첫 경제행위는 대 성공이었다. 나는 그때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에 찼던 것 같다. 그런 행동 뒤에는 항상 소설을 쓰려면 많은 경험을 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 도사리고 있었다.


  꽃다발 사업에 이은 두 번째 경제행위는 보따리 장사였다. 시골을 돌며 생활필수품을 팔 학생알바 구함, 이라는 전단을 보고 자취집 동기 3명은 무작정 지원했다. 지원 첫날 우리는 간단한 교육을 받고 봉고차에 태워져 광주근교의 시골마을에 내려졌다. 우리의 어깨에는 칫솔, 수세미, 소독약, 고무장갑 등 소소한 생활용품이 가득 든 커다란 보따리 가방이 메어져 있었다. 사장은 각 마을에 꼭 1명씩을 내려주고는 3시간 후에 다시 태우러 온다고 말했다. 생활용품은 각각 천 원에 팔면 되고, 판매대금의 20%가 우리가 받게 될 월급이라고 했다. 천 원짜리 10개를 팔면 이천 원이 우리 몫으로 적립되고, 이는 월말에 합산해서 월급으로 준다고 했다. 하루에 20개를 팔면 4천 원 * 30일 = 12만 원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이는 당시에는 큰돈이었다. 지방국립대학교의 학비가 60만 원이고, 1달 기숙사비가 8만 원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돈에 눈이 멀어 당장이라도 보따리 가방에 있는 물건을 다 팔 기세로 농가를 향해 걸었다.


   그런데, 막상 집에 들어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입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대문까지 갔다가 서성이기를 몇 번. 그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던 생각의 쪼가리를 나는 놓치지 않고 잡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의 답을 나는 이미 하고 있었다.


  "계십니까? 계십니까? (사람이 나오면 공손하게 절을 하고)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대학에 진학하게 된 학생입니다. 댁에서 필요한 생활용품을 가지고 왔는데 한 묶음에 천 원입니다. 이걸 사 주시면 제가 대학에 진학해서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하나만 부탁드립니다."


  나는 종이에 이 화법을 써서 여러 번 읽으며 암기했다. 그리고 머뭇거림 없이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첫날 나는 12개를 팔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는 마케팅의 초보기법에 해당하는 구걸화법이었다. 더욱이 시골인심이 살아있던 시절이라 이 화법은 위력이 있었다. 키가 작고 왜소한 소년이 큰 가방을 어깨에 메고 들어와 물건을 사주면 대학공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니 마음이 움직였을 그때의 그 어르신들에게 참으로 감사하다.  그런 인정 속에서 나는 한 명의 사회인으로 성장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일까? 나는 식당을 돌며 물건을 파는 학생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다. 그 청년의 사연이야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강매한다며 기분 나빠하는 동료도 있지만, 나는 그저 웃으며 지갑을 연다. 그 시절의 나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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