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

미스테리

by 휴식시간

이창동 감독의 8년만의 신작, 버닝이 어제(5/17일) 개봉을 했다. 그래서 어제 저녁에 영화를 보고 이렇게 글을 쓴다. 내 글은 영화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나 정답을 찾는게 아니다. 이 영화는 그것이 불가능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난 '감독이 어떤 의도로 이 영화-이야기-를 만들어 나갔을까'를 생각해보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영화는 젊은 층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종수는 엉망인 가정에 가난한 생활, 막막한 미래 등 세상의 고난을 한 몸에 느끼는데, 거기에 소심하기 까지한 '한명의 청춘'이다. 혜미는 어떤 과거가 있는 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 베일에 싸여있는 인물이다. 다만 그녀가 마트 앞에서 춤을 추는 일을 하고 원룸에 살고 카트빚에 허덕여 집에도 못 갈만큼 어려운 상황이고,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동시에 뭔가를 느끼고 얻고 싶어 하는 욕구(팬터마임,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이야기, 대마초를 핀 뒤에 옷을 벗고 춤을 추는 장면)가 있다는 정도 알 수 있다. 이들과 대조적으로 벤은 젊은 나이에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능력자이다. 혼자인 종수, 혜미와 달리 벤은 자기 모임도 있고, 원하는 대로 여자친구를 사귈 수도 있고, 돈에 대한 걱정이 없는 인물이다. 이런 벤이 자신의 장애물이라고 느낀 종수가 열등감을 느끼면서 아니꼽게 보는 것과, 혜미가 그와 가깝게 지내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현실에 녹록치 않은 그들에게 벤은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수(관객)의 관점에서 벤은 원하는 것을 다 하며 행복할 것 같지만, 그에게는 '뼛 속에서 울리는 베이스'를 느끼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이런 욕구는 누구나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것은 바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으로 상징된다. 이것이 무엇인지 명료하진 않지만, 판매원 같은 평범한 여자친구를 갈아 치우면서 자기가 (화장이나 다른 무언가) 꾸며주는 것으로 암시된다. 평소에 그는 성당에 다니거나 미술관에서 가족 모임을 하고 개인 모임을 갖는데, 이것들은 사실 그에게 지루한 일상에 불과하다. 이런 벤에게 종수와 혜미는 신선한 만남, 하나의 흥밋거리일 것이다.

영화는 종수 입장에서 느끼는 이 세계의 미스테리, 그 자체를 따라간다. 작은 세상(농촌, 원룸)에서 외로이 지내던 그에게 혜미는 한줄기의 빛 같은 존재이자, 마음속 연인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혜미와 종수는 한번의 육체적 관계를 맺었을 뿐,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종수는 혜미를 사랑한다. 반면 혜미는 그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벤의 입에서 전달되는 말은 진실인지 알 길이 없다. 이는 종수에게 안달복달을 부추길 뿐이다. 그런 그에게 벤은 은밀하고 궁금하고 두려운 존재이다. 초반엔 그저 종수에게 벤은 '경계'해야 하는 사람 정도로 여겨졌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드러나는 벤의 면모 - 대마초를 아무렇지 않게 피움,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말함, 수상한 모임을 주도, 집 안에 있는 여자용 물건(립스틱, 팔찌 등) - 는 종수에게 혜미의 실종에 연관이 있을 거라고 '의심'하게 만든다. 후반에 나오는 장면 - 벤의 집에서 발견된 보일이라고 생각한 고양이의 존재와 혜미의 시계 - 은 종수에게 '확신'을 안겨준다. 이는 내적인 폭발이 일어난 지점이다. 자신을 하나뿐인 친구라고 말한 혜미의 실종은 그에게 남은 삶의 희망을 꺾을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이 분노가 폭발된 결과가 벤의 배에 칼을 꽃고, 포르쉐와 그를 함께 불태워 연기처럼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벤이 그런 인물 - 싸이코든 성적 착취자든 - 인지, 확신할 수가 없는 다는 점이다. 종수에게 저런 벤의 면모는 수상해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벤이 재미를 위해 한 일(대마초, 모임, 물건)이거나 비유적으로 한 말(비닐하우스)일 수 있다. 만약 경찰이 그를 수사했다면 그에게 물을 수 있는 '죄'는 집행 유예에 그칠 지도 모를, 별거 아닌 인물일 수도 있다. 그리고 혜미에게는 무슨 일이 생긴 것(실종, 살해)이 아니라, 그녀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냥 떠난 것일 수도 있다. 전화는 종수의 마지막 목소리를 그냥 한 번 들으려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시계는 벤에게 그냥 준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이것이다. 종수는 미묘한 세상에서 정답을 내리고자 했다. 탄 비닐하우스를 찾으러 뛰어다니고 벤의 일상을 미행하고 그의 집을 수색하는 종수에게는, 이 일들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와 이것을 통해 내린 결론이 필요했다. 종수는 혜미는 사랑하는 사람, 벤은 악인으로 정해 버렸다. 종수의 감정과 논리를 집중해서 따라가는 이야기의 전개 구조는 종수가 벤에게 무슨 짓을 할 수 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이유는 없지만.

이창동 감독은 세계 그 자체를 미스테리함으로 만들었다. 실제 우리 삶에서 저 사람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그녀(혹은 그)가 나를 사랑하는지, 내 미래가 어떻게 될 지, 내 가족이 어떻게 될 지 등, 명료하게 알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이처럼 우리는 이 영화에서 인간적으로 성장하게끔 도와줄 교훈이나 완벽한 해석법 등을 얻을 수 없다. 영화는 주로 종수의 관점에서 진행하는 방식과 장면 장면에 보이는 미장센으로써, 영화가 나아가야만 하는 방향을 보여준다. 말로 설명하지 않고 영상과 음악으로만 보여주는 이 영화는 영화적 체험을 극대화 시킨다. 버닝은 세계를 알려주지 않고 보여주며, 모호함을 미스테리로 승화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