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스펜서블 : 시대가 인물을 만드는가, 인물이 시대를 만드는가
유리절벽(Glass Cliff)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조직이 어려움에 처할때만 여성을 대표로 내세워 책임을 전가시킨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실제로 미국의 기업들만 보더라도 이걸 잘 알수 있다. S&P500의 기업 중에서 여성 임원이 있는 기업의 비율은 30%가 채 되지 않고 여성 CEO가 있는 경우는 훨씬 드물다. 그런데 그나마 이런 여성 CEO가 뽑히는 것은 기업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근본적인 변혁이 요구될 때다. 기업이 정상적으로 잘 돌아갈 때 여성 CEO가 뽑히는 경우는 매우 보기 드물다.
한때 IT여제로 불렸으나 지금은 HP를 망가뜨린 주범으로 지적받는 칼리 피오리나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1999년에 HP의 CEO로 임명된 피오리나는 당시 화제 그 자체였다. HP가 창립 60년만에 영입한 최초의 외부 영입 CEO이자 40대라는 젊은 나이였고 미국 30대 기업에서 CEO에 오른 최초의 여성이었다. 그런데 이런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한 HP는 당시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을 때였다. HP는 90년까지만 하더라도 PC분야에서 압도적인 경쟁력을 가진 기업이었지만 델(Dell)과 IBM의 성장세에 치여서 점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고 HP의 내부 조직은 경직되어간단 평을 듣고 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뽑은 인물이 바로 칼리 피오리나였다.
미국의 다른 유명 CEO들도 사실 다르지 않다. 마리사 메이어가 야후에서 CEO로 임명될 당시에 야후는 '맛이 갔다'라는 단어로는 부족할 정도로 아주 회생 불가능급으로 평가를 받았다. GM의 CEO 메리 바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00년대 중반 GM의 상황은 이미 크게 안좋았는데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금융위기를 얻어맞고 2009년에 파산을 한다. 메리 바라가 취임한 2014년은 그 전까지 미국 정부가 보유하고 있던 지분을 다 털고 새로운 출발이 필요한 시기였다.
위기 상황에서 CEO가 된 여성하면 또 리사 수를 빼놓을 수가 없다. 지금이야 리사 수님은 진리요 빛이요 생명이시지만 AMD의 CEO로 부임할 당시만 하더라도 AMD는 노답 그 자체였다. 기업에 대한 신용평가는 투자부적격 수준이었고 인력들은 전부 외부로 탈출하던 상황이었기에 곧 망하는 기업을 리사 수에게 던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으로 4명의 여성 CEO들만 이야기 했지만 이들은 회사 상황이 말도 아닐때 자리에 올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중에 피오리나와 메이어는 결국 회사를 살려내는데 실패했기에 최악의 CEO란 말을 듣고 있으며 바라는 그럭저럭 회사를 잘 운영하고 있으며 리사 수는 그저 빛이다. 반복한다. 리사 수는 그저 빛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해봐야 한다. 왜 기업들은 회사 꼴이 엉망진창일때 여성을 CEO 자리에 올리는 것일까? 일부 여성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여성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서 상태 안좋을때만 여성을 고위직에 올리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바로 오늘 이야기할 책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인디스펜서블]이 오늘 소개할 책이다. [인디스펜서블]은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가졌을 만한 질문을 던진다. '시대가 인물을 만드는가? 아니면 인물이 시대를 만드는가?'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보통 모든게 정상적으로 잘 굴러가는 시기가 있고 시스템이 무너지고 붕괴하는 시기가 존재한다. 안정기와 혼란기다. 그렇다면 안정기와 혼란기의 지도자는 똑같은 지도자라 볼 수 있을까? 그러니까 안정기에 유능한 지도자는 혼란기에도 유능한 지도자이고 혼란기에 유능한 지도자는 안정기에도 유능한 지도자일 수 있냐는 얘기다.
이건 2차 대전의 승전을 이끈 연합군의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받는 윈스턴 처칠을 생각해보면 될거 같다. 우리는 모두 윈스턴 처칠의 강력한 결단력과 추진력을 잘 알고 있고 이 사람의 존재로 인해 영국이 독일에 무너지지 않고 버텼다는 것도 잘 안다. 2차 대전 당시에 전시 총리로서 보여준 처칠의 능력은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처칠이 정말로 모든 면에서 유능한 사람인가는 문제의 여지가 존재한다.
2차 대전 이전까지 정치가로서의 처칠은 '너무 과격하고 예측이 불가능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그리고 그 평가처럼 그는 자유당의 집권 당시 내무부 장관으로 있던 시절에 그 과격함과 예측 불가능으로 인해 수많은 실책들을 저질러왔다. 광산 파업의 과잉 진압과 철도 파업에서 무장군인을 파견하는 행태로 인해 사람들로 하여금 분노를 불러 일으킨 것은 처칠의 호전성과 과격함이 만들어낸 실책 중 하나였다. 그 실책에 결정타를 날린 것이 해군장관으로 재직하던 1차 대전 당시에 벌린 갈리폴리 전투였다.
오스만 제국의 갈리폴리 반도를 공격하자는 전략은 육군도, 해군 수뇌부도 반대한 전략이었지만 처칠이 해군장관의 권한을 내세워 내각을 설득하고 독단적으로 밀어붙인 것이었다. 결과는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이 작전으로 인한 영국과 프랑스군의 인명손실은 24만명이 넘었고 전함과 순양함들도 숫하게 날려먹었다. 영국 역사상 가장 큰 패배로 기록될 정도다.
그 이후에도 처칠은 수많은 실책과 실패를 저질렀다. 그는 너무 감정적이고 과격했고 호전적이어서 그와 마주하는 사람 대부분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말은 제대로 듣지 않는 독단성 또한 존재했다. 심지어는 그가 저지른 실책으로 인해 처칠이 주장했던 독일에 대한 견제조차 그 순수성이 의심될 정도였다. 그가 전시 총리로 임명되기 전까지의 실적을 살펴보자면 실패가 너무 많아서 개인적인 능력은 있으나 높은 자리는 맡지 못할 무능력하고 실패한 지도자에 가까웠다.
반대로 2차 대전으로 인해 비웃음 거리가 된 네빌 체임벌린의 경우는 무능력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유능한 인물에 가까웠다. 그가 전간기 동안에 추진한 업적만 해도 과부와 고아에 대한 복지 입법, 퇴직연령을 65세로 앞당기고, 구빈법을 개혁했다. 재무장관으로서 독일과의 배상금 협상을 주도했고 대공황에서 빠른 회복을 하는데 기여했으며 이러한 능력을 보였기에 내각의 얼굴이 되어 전간기 영국의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 사람은 처칠과 달리 내각 구성원의 의견을 청취할 줄도 알았고 적절히 파워게임을 할 줄도 알았다. 흔히 체임벌린의 실책으로 알고 있는 독일과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은 당시 체임벌린 내각의 주된 의견이었다.
당시가 그 잔혹하기 그지 없는 1차 대전이 끝난지 20년도 되지 않았던 시기란 것을 생각해보자. 1차 대전으로 인한 인적 손실과 충격은 말 그대로 엄청나서 한 마을에서 징집된 청년들이 부대가 통째로 갈려나가는 바람에 단체로 돌아오지 못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 끔찍한 전쟁이 끝난지 20년도 되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전쟁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영국은 독일에 비해 재무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이었고 시간을 더 필요로 했다. 이 상황에서 그 모든 의견들을 다 묵살하고 독일과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처칠의 행동은 사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즉, 체임벌린과 처칠은 서로가 능력을 발휘하기에 적합한 시대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처칠은 혼란기에 적합한 사람이었고 체임벌린은 안정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안정기라면 조직은 그냥 계속 잘 굴러가기만 하면 되므로 그 안정기를 이끌 지도자로 안정기를 만든 조직의 체제와 시스템을 통해 필터링된 지도자를 선정한다. 그렇기에 체임벌린 같은 경우 당시 안정기의 세스템 하에서 안정기를 이끌기에 가장 적합한 지도자를 선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체임벌린이 당면했던 상황은 안정기가 아니라 혼란기였던게 문제다.
반대로 혼란기에는 대외적 상황과 시스템의 마비 등으로 인해 안정기에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많거나 경력이 짧거나 혹은 기타 요인 등으로 인해 필터링 될 법한 인물이 지도자로 뽑힌다. 변화와 과감함이 필요한 순간에는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지도자가 필요하니 말이다. 처칠의 경우가 딱 그랬다. 안정기였으면 그 수많은 실패와 성격적 결함 등으로 인해 총리에 오를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모든게 문제 없이 잘 굴러가는 안정기에는 조직이 자신의 시스템에 걸맞는 인사이더를 지도자로 뽑지만 혼란기에는 본질적인 변화를 부를 수 있는 (평시에는 필터링되어 후보에도 오를 수 없는) 아웃사이더가 지도자가 된다는 이야기다. [인디스펜서블]에서는 처칠과 체임벌린 뿐만 아니라 다양한 미국 대통령의 사례를 들며 이를 '여과형 지도자'와 '비여과형 지도자'로 나누고 있다. 상세한 내용은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 좋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파격적으로 뽑았지만 실패한 여성 CEO로 분류되는 피오리나나 메이어가 매우 독선적이고 조직의 전통을 무시했다는 평가를 공통적으로 받고 있다는 점은 바로 이 부분에서 의미심장하다. [인디스펜서블]에서 소개되는 비여과형 지도자들이 바로 그런 성향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에서 가장 먼저 손꼽히는 링컨 조차 말이다.
그 점에서 보자면 피오리나나 메이어 같은 인물을 실패에 대한 책임 전가를 위해 뽑았다는 '유리절벽'은 그 근거가 약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파격적으로 이들을 뽑은 것은 정말로 조직에 대한 개혁을 원했기 때문이었고 필요하다면 조직의 근본까지 갈아엎을 수 있는 강력한 추진력이 개혁에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나는 생각한다. 다만 피오리나와 메이어는 성공하지 못했을 뿐이다.
거대 기업의 여성 CEO에게 가해지는 '남성보다 더 남성같은 여성'이란 비판 또한 그 연장선이라 볼 수 있다. 재미있게도 이는 남녀 불문하고 똑같이 비판하는 부분인데 남성의 경우는 여성 CEO에 대한 험담의 측면에서 하는 것이라면 여성의 경우는 그런 여성 CEO의 존재는 여성 직장인의 권리와 입지 개선에 도움이 안된다는 측면에서의 비판에 가깝다. 여성으로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으면서도 같은 여성에게 도움이 안된다는 얘기다.
위기시에 지도자가 되는 사람들이 가지는 성향 자체가 일반적인 상황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무너지고 조직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독단적이고 강력한 카리스마가 필요하다. 때로는 구성원을 때려잡으면서까지 하나로 만드는 무자비함도 필요하다. 거대 기업들의 여성 CEO가 비상사태에 임명되는 경우가 많다보니 바로 이런 독선적이고 무자비한 부분을 갖추고 있고 그것이 비판의 대상으로 오르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이 유리절벽과 관련한 '남성들이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 떠넘긴다'라는 음모론 적인 부분은 기각할 수 있겠지만 이런 CEO 채용 관습이야말로 유리천정의 존재를 증명하는 부분이다. 안정기에는 여과형 지도자가 뽑히지만 혼란기에는 비여과형 지도자가 뽑힌다고 [인디스펜서블]은 이야기한다. 혼란기에 여성 CEO가 주로 임명된다는 사실은 [인디스펜서블]이 설명한 바에 따르면 여성은 안정기의 관리 상황에선 여과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걸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유리천정이다.
비록 내가 이 글에선 여성 CEO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인디스펜서블]은 굉장히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우선 안정기와 혼란기에는 지도자로서 요구되는 자질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안정기에 알맞는 뛰어난 지도자는 혼란기에는 극도의 무능함을 보이기도 하고 혼란기에 뛰어난 지도자는 안정기에 매우 무능함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기질과 자질에 걸맞는 시기가 있고 그 기회를 얻으려면 나와 알맞는 시기가 되어야 하는 행운을 얻어야 한다. 링컨도 처칠도 혼란기에 등장하여 혼란기를 극복해낸 위대한 지도자지만 이들이 안정기에 등장했다면 그 능력은 둘째 치고서라도 제대로 두각을 드러낼 수도 없다는 것이다. 즉, 각자 시대를 잘 맞게 타고 나는 운이 필요하다는걸 이 책은 잘 보여준다. 당신의 위치는 당신의 능력의 일부만을 증명할 뿐이다. 가장 뛰어난 사람도 상황이 바뀌면 가장 무능해질 수 있으며 가장 무능하고 외곽에 머무르던 인물도 상황이 바뀌면 그 결점이 장점이 되어 조직을 이끌 수 있다.
그것을 [인디스펜서블]은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