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아픈 이야기가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
**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리는 ‘메리 포핀스’ 하면 흔히 하늘에서 우산을 타고 내려와 아이들의 든든하고 따스한 보금자리 같은 존재가 되어준 보모를 떠올린다.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의 메리 슈미트 역시 그런 존재다. 메리는 부모를 잃은 네 명의 아이들이 입양된 그라첸 박사의 대저택에서 보모로 일하며, 아이들에게 믿고 기댈 수 있는 다정한 존재가 되어준다. 아이들은 메리를 “엄마가 그리워서 눈물을 흘리던 날 엄마가 되어준” 사람으로 기억한다. 아이들에게 메리와 함께했던 기억은 따뜻하고 행복하기 그지없다.
그러던 어느 날, 박사는 살해당하고 저택에는 끔찍한 화재가 발생한다. 불길 속에서 메리는 네 아이를 모두 구하다 전신에 화상을 입는다. 그렇게 살아난 네 명의 아이들 한스, 헤르만, 안나, 요나스는 화재 사건의 중요한 증인이 되지만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각자 새로운 가족에게 입양되어 뿔뿔이 흩어진다. 천사로 칭송받던 메리는 병원에서 도주한다. 사건을 담당한 발터 형사는 자신의 직감과 한스의 뒤늦은 증언을 바탕으로 메리가 범인이라 결론짓고, 모든 수사가 종결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건의 진실과 메리를 뒤쫓는다.
12년 후, 한스는 남은 세 아이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은다. 화재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지워진 기억과, 그 속에서 그냥 메리 포핀스가 아니라 “블랙 메리 포핀스”가 될 수밖에 없었던 메리의 감춰진 비밀이 조금씩 드러난다. 그리고 왜 메리 슈미트가 끝끝내 이 아이들에게 천사 메리 포핀스로 남게 되었는지도. 관객들은 이 모든 이야기를 생생하게 눈앞에서 목도하게 된다.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는 2020년 공연으로 벌써 다섯 번째 무대에 오르는 대학로의 스테디셀러 뮤지컬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소극장 창작 뮤지컬 작품 중 하나이다. “스릴러” 뮤지컬을 표방하고 있는 이 작품은 메리와 4명의 아이들, 총 5명의 사람만이 무대 위에 오르고 화려한 무대 장식이나 소품을 사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공연 내내 무대가 꽉 들어차 있다는 느낌을 준다.
네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가진 사연과 더불어 메리와 화재 사건의 비밀이 천천히 밝혀지면서 관객이 몰입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스토리, 귀에 쏙쏙 박히는 넘버와 극적인 연출 덕분이다. 5명의 인물 각각의 개인 서사가 탄탄하면서도 서로 충분히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게끔 얽힌 캐릭터들의 관계성도 톡톡한 몫을 한다.
그렇지만 <블랙메리포핀스>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부분은 확실한 특색을 지니면서도, 소극장 뮤지컬만의 섬세한 감정선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는 무대 연출이다. 특히 첫 넘버인 “오버추어”는 흰 천을 장막처럼 내려두고 배우들이 빛 앞에 서서 그림자 놀이를 하듯 그림자로 작품의 배경과 인물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연출되는데, 이는 두고두고 압권인 연출로 회자되는 장면이자 이 뮤지컬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다.
뿐만 아니라 헤르만과 안나의 복잡한 관계를 배우들 간 합이 잘 맞아야 하는 고난이도 안무로 연출해낸 “다가가려 하면”과 “곡예”, 사건의 진실을 좇던 발터 형사가 남긴 이야기를 돌아가는 무대 위에서 강렬한 비트에 맞춰 동작하는 것으로 긴장감 있게 표현해낸 “직감”, 서로가 서로의 감시자였음을 깨닫는 것을 배우들 간의 손과 팔이 얽히는 안무로 연출해낸 “Silent Wednesday” 등 <블랙메리포핀스>는 스릴러적 요소가 단순히 스토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넘버와 연출에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내용을 잘 모르는 관객이라도 이 작품의 한 장면을 본다면, 곧바로 '이 작품은 스릴러다!' 라고 외칠 수 있을 만큼 장르적 특성이 음악과 무대에 전부 잘 스며들어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도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이야기가 너무 어둡고 아프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매처 홈페이지에서 이 작품을 예매하려고 하면 ‘심적으로 불편한 장면이나 연출이 등장할 수 있으니 예매 전 주의해달라’는 안내사항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랙메리포핀스>가 이처럼 꾸준하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뭘까. 다른 뮤지컬에서는 볼 수 없는 참신하고 드라마틱한 연출과 스릴러라는 장르를 완성하는 음산하지만 슬픈 넘버, 마지막까지 몰입할 수밖에 없는 쫀쫀한 스토리 덕도 있겠지만 이 작품이 마지막에 남기는 메시지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장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기억을 되찾은 아이들은 괴로운 기억들임에도 다시 그 기억들을 지우기를 거부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불행과 함께 동행하겠습니다.”
이 뮤지컬은 관객들에게 살아오며 겪은 불행한 기억은 지우개로 지워낼 수도, 가위로 오려낼 수도 없는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되고, 다만 불행을 끌어안고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말한다. 아픔과 고통이 없는 상태가 행복이 아니라, 아프고 고통스러운 중에도 피어날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자신의 잘못된 신념으로 아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을 마주하고 난 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죄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지키려 노력한 메리의 진심에서 자꾸만 울컥하게 된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위하고 지키려는 마음이 닿아서일까. 어쩌면 객석에 앉은 우리들은 아이들이 메리에게 그랬듯, 이 아픈 이야기에 기대어 우리의 아픔과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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