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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리 Jan 23. 2021

여성의 삶이 투쟁이 될 때,  연극 '작가'

이 공연은 한 여성의 개인적인 한풀이가 아니다. 집단적인 차원의 분노다.

** 연극 '작가'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는 20대 여성이다. 21세기의 세상에서 20대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 사회에서 소위 ‘젠더 이슈’라고 칭하는 것들을 온몸으로 겪고 마주하며 살아가야 함을 뜻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불편함, 불쾌함, 어려움, 그리고 크고 작은 위협들.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것들을 스스로 감내하고 인지하며 알아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누가 대신 해주지 않기에. 


그렇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이 모든 어려움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왜 당연해졌고, 왜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은 여성 각자의 몫이 되어버렸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맞설 힘을 잃어버렸다. 직면해봤자 세상은 그대로이고 나만 더욱 불편해진다는 것을 살면서 몸으로, 경험으로 배웠으니까. 그랬기에 문제의식이 생겨도 없는 척 외면하고, 적당한 선에서 분노를 표출하고 금세 가라앉히는 데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이 연극은 나와 달랐다. 내가 애써 피했던 이 ‘젠더 이슈’라는 것에 대해 적나라하게 제 의견과 감정을 고스란히 노출하며, 내가 삼켜버렸던 질문들을 객석을 향해 돌직구로 던진다. 객석에 앉은 나는 더 이상 피할 곳도, 도망칠 곳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외면해왔던 것을 마주하는 불편함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이처럼 이 작품의 주인공인 ‘작가’는 여성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의 불공평함, 여성 예술인으로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예술 활동을 해나가는 것에 있어 걸림돌을 향한 분노를 자신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는다. 극의 가장 첫 장면은 ‘작가’의 작품 속이다. 스물네 살 문학도 여자는 가부장제의 파괴와 그를 통한 세상의 전복을 꿈꾼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남성 연극 연출가가 앞에서 자신을 아무리 비웃고 있어도 꿋꿋하다. 되려 그의 주장을 자신의 논리로 끊임없이 맞받아친다.
 
이 스물네 살 여자는 ‘작가’가 자기 자신을 투영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 스스로가 평소에도 기울어진 운동장, 여성에게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참지 않고 표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느끼는 분노는 다른 이들의 시각에서는 ‘불편함’으로 비칠 뿐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단지 남성들뿐만 아니라 성별을 막론하고 ‘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파는 땅콩과 같은 간식’처럼 세속적이고 사소한 것들로부터 쉽게 정신적인 만족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다.
 




여기까지만 보면 ‘작가’가 마치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투사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아니다. ‘작가’ 역시 이 모든 것들로부터 평온하고, 행복해지고자 하는 소망이 있다. 극중극인지 아닌지 모호한 세 번째 장면에서 ‘작가’는 세속적이고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자신의 애인에게 털어놓는다. “그런 당신을 보면 아프다”고. 왜냐하면 자신도 애인처럼 그렇게 “행복해지고 싶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밝힌다.


다만 그녀가 추구하는 행복은 자신의 애인처럼 백화점 식품코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번째 장면의 독백에 등장한 것처럼 이 세계를 넘어 모두가 평등하며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또 다른 존재가 있는 새로운 세계에 있기 때문에 ‘작가’는 이 세상에서 애인처럼 행복해질 수 없을 뿐이다.

내가 어느 순간부터 여성으로서의 불평등을 직면하고 투쟁하길 포기했던 것이 무력함이었듯, ‘작가’ 역시 희망찬 결말을 맞진 못한다. 잔인한 전쟁의 실상을 고발하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게르니카’의 작가 피카소가 그녀가 전복하고 싶어 하는 남성 중심 사회의 ‘수혜자’와도 같은 인물임을 깨닫고, ‘작가’가 망연자실 ‘게르니카’를 바라보는 것으로 연극은 끝이 난다.
 
뿐만 아니다. 극 중에서 ‘작가’는 자신이 그토록 변화시키고 싶은 이 사회에 자신 역시 꼼짝없이 속해 있고 다른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닮아 있으며,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타협’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아간다. 이는 남성 연출가가 그녀의 말을 끊으면 다음 말을 얌전히 삼켜야 하고, 그녀가 발언하고 싶은 타이밍에 발언을 한 것이 남성 배우의 말을 끊는 일이었다면 자연스럽게 남성 배우에게 사과를 하는 ‘작가’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연출가는 그녀에게 말을 끊은 것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작가’는 점점 자신이 꿈꾸는 이상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녀 자신의 삶 역시 지금과 같은 모습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연극이 건네주는 직접적인 불편함보다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더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직설적인 문제의식의 날카로움을 어느 정도 완화시키기 위한 장치인지는 몰라도 극 중 배우들의 톤은 대부분 장난스러웠고, 대화에도 군데군데 유머스러운 부분이 있었으니 관객들이 웃을 수 있을 만도 했다. 그렇지만 이 연극은 나에게 우습지도 웃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웃음소리가 듣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결국 이 연극과 같은 입장에서 같은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걸. 나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작가’처럼.
 
어쩌면 이 연극의 진정한 결말은, 바로 나도 모르게 변화한 나의 태도에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작가는, 나처럼 객석에 앉은 누군가에게 이 작품을 통해 사소하지만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처럼 누군가의 불편함이 그저 불편함에 그치지 않고, 개인의 불편함이 모여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것을 힘들게 꿈꾸는 마음에서 이 작품을 썼을지도.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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