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관찰기] 붉은 산수와 컬러 밴드
보통 예술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때 작품세계를 만난다는 표현을 합니다. 예술가들의 작품은 그 작가의 세계가 들어 있기 때문이겠죠. 최근 그 세계가 궁금해지는 작가 두 분을 알게 됐습니다.
첫 번째는 ‘붉은 산수'로 유명한 이세현 작가입니다. 이 분의 작품을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고 그 강렬한 이미지에 한동안 넋을 잃고 빠져들었습니다. 비록 전시회장이 아니라 컴퓨터 모니터 속이었지만 그 광경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눈앞에서 산과 들이 솟아나고 화면을 뚫고 나올 것 같은 강렬한 이미지는 환영처럼 뇌리에 남아 며칠 동안이나 쉽사리 잊히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붉은 산수는 여러 개의 붉은 돌산들이 마치 섬처럼 연결된 풍경들이 주를 이룹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진으로 인화한 것처럼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마이크로미터의 세상이 펼쳐지지만, 뒤에서 물러서 보면 붉은 덩어리의 거대한 세계가 다가오는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붉은색 중심의 사용이 금방 질려 버릴 것 같지만 사실적인 묘사와 강렬한 시각적 테마 때문인지 전혀 지루함이 없습니다. 붉은 산수의 시리즈를 보면 마이크로와 매크로의 세계가 반복되는 세상이 만들어내는 가장 긴 장편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 듭니다.
이 '붉은 산수'는 이세현 작가의 몇 작품만 봐도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강렬한 테마가 아닐까 합니다. 왜 하필 붉은색을 테마로 했을까 궁금해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봤는데 군사분계선 근처에서 야간 보초를 스면서 야간 투시경의 붉은 빛 렌즈를 통해 바라본 풍경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한 공간을 보는데 비현실적인 풍경에서 극단의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하니 작가의 시선은 역신 다릅니다. 테마가 작가의 경험에서 나온 결과물이라는데 있어 작품의 진정성이 느껴졌습니다.
한편 최근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 된 하태임 작가의 작품도 최근 가장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입니다. '컬러 밴드'를 테마로 하는 하작가의 작품들은 아주 단순해 보이는 추상작품입니다. 그런 단순성이 오히려 한번 보면 기억에 오래 남는 비결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컬러풀하면서도 리듬감 있는 조형감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집니다. 곡선의 조형이 마치 활짝 웃고 있는 이미지를 주기도 하고 다채로운 색상의 조합에서는 생동감 있는 분위기와 생명력을 느껴끼게합니다. 작가의 아버지께서는 한국 1세대 유명 추상화가셨다고 합니다. 예술적 테마가 마치 유전자를 통해 이어졌다고 생각하니 그 가치가 더욱 색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최근 이 두 작가를 주목해서 보게 된 이유는 작품 자체의 매력이 첫번째입니다. 거기에 더해 이 작품들을 브랜딩 활동으로 풀어내도 굉장히 훌륭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상업적인 상품의 브랜딩은 아니지만 최근 제가 경험한 그 어떤 브랜드보다 자신들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고 표현까지 해내고 있었습니다.
확실한 작품의 테마를 잡고 그 안에 자신들의 세계관을 녹여낼 뿐 아니라 작가 개인의 패션 코드나 인터뷰 때의 단어 선택 하나까지 훌륭한 개인 브랜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의 작품 활동이 상업적인 브랜딩 활동과 크게 다르지가 않다고 여겨졌습니다. 브랜딩과의 연계해 비교해보면 브랜딩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가져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브랜딩에도 가져 올만한 좋은 점들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인상적인 테마, 명확한 콘셉트’
이세현 작가는 '붉은 산수', 하태임 작가에게는 '컬러 밴드'라는 누가 봐도 단번에 알 수 있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테마가 있습니다. 단 두 단어로 만들어진 테마지만 수십개의 문장으로 설명될만합니다. 그리고 그 테마라는 틀 안에 작가의 철학과 삶에 대한 성찰이 그림의 획 하나 하나에 투영되어 있습니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느낌이 잘 담겨있습니다.
이세현 작가의 경우 우리나라 자연의 산수를 배경으로 했지만, 현대 도시의 건물이나 추상적 구조물로도 묘사의 대상을 확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처음 붉은색을 테마로 시작했지만, 최근에는 파랑이나 보라색 등 더 다양한 변화의 작품들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붉은 산수라는 큰 그릇의 역할을 하는 테마가 있어서 모두 가능한 일이죠. 붉은 산수라는 강력한 세계가 구축되었으니 그 안에서 어떤 변화가 있어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하태임 작가의 경우에는 최근 업비트로 유명한 두나무의 NFT아트 서비스에도 진출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율동감 있는 조형성이 디스플레이를 활용한 매체 환경에 잘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살펴보니 NFT아트 화면 작품에서는 캔버스의 물감의 질감은 약해졌지만, 조형 특유의 리듬감과 율동감이 느껴지게 모션이 들어가는 영상작품으로 변형돼서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전혀 혼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고 오히려 좋아 보이는 이유는 '컬러 밴드'라는 확실하고 고유한 테마가 중심을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 다 같으면서 다 다르게 ‘
이 두 작가들의 작품들은 멀리에서 보면 모두 하나의 작품 같습니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굉장히 다양하게 변주되는 모습을 가지고 있죠. 전체를 보면 하나의 테마지만 오브젝트 하나 하나 요소 하나 하나를 뜯어보면 모두가 개별성을 가집니다. 전체 작품들을 모아 놓고 들여다 보면 이런 통합성과 개별성이 한눈에 보입니다.
붉은 산수의 경우 주요 표현 대상은 돌산이 있는 자연이 풍경이지만 표현되는 환경은 조금씩 변화가 있습니다. 전체의 외곽이 원형에 가까운 덩어리감을 표현하기도 하고 덩어리감을 해체하고 앞 뒤의 원근감을 더 극대화한 표현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두 개의 유연한 틀이 생김으로써 전체적으로 더 풍부한 조형성을 이뤄냈습니다.
하태임의 컬러 밴드의 경우에는 단순한 조형과는 대조적으로 다채로운 색상이 특징입니다. 기본의 조형적 특징은 같지만 다양한 색상의 변주가 작품이 가진 음악적인 감각과 상상력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관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모습은 감상자로 하여금 작품의 테마 전체를 더욱 흥미롭고 다채롭게 경험하게 합니다.
작품 초기에는 오방색을 떠올리는 알록달록한 강한 색의 대비에 집중했다면 최근에는 두세가지 색과 낮은 채도로 좀 더 차분해졌습니다. 색의 온도와 색상이 변해왔지만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전체의 테마와 콘셉트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 지속적 실험과 자기 확신의 정신'
하태임 작가의 컬러 밴드가 이렇게 유명해지기까지는 10년이 넘는 시간이 쌓였다고 합니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매일매일 일기 쓰듯이 물감을 캔버스 위에 올리면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며 인내했다고 합니다.
이세현 작가 또한 2007년 비트윈 레드를 시작으로 15년 가까이 붉은 산수 연작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자기 작품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철학이 없으면 금방 포기했을 일입니다. 결국 두 작가의 현재 작품은 끊임없는 실험과 자기 확신의 결과물이었던 거죠.
성공적인 브랜딩의 공식도 지속성과 확신 이 두가지는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속적인 퀄리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제품이어야 사람들이 찾습니다. 지속 가능한 서비스여야 브랜드로서의 정체성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속성의 기반에는 강한 자기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되는 의문에 답을 내리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이 있어야 지속할 힘을 얻고 동기 부여가 됩니다.
이세현, 하태임 작가의 작품처럼 확실한 테마가 있고, 유연한 확장성이 있고, 지속 가능한 이 두 작가의 특징은 개인이나 사업의 브랜딩에 있어도 꼭 배워야 할 요소가 아닐까 합니다. 하나의 상품이 예술 작품으로 변했을 뿐 브랜딩이라는 활동으로 생각하면 도움이 될 요소가 많습니다. 작가와 작품이 만들어내는 가치는 예술 산업측면에서도 문화 정서적 측면에서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많은 브랜드들이 이 두 분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마치 예술처럼 멋진 브랜딩을 펼쳐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브랜딩이 예술처럼 예술이 브랜딩 되는 멋진 세상을 꿈꿔봅니다.
[매거진 브랜디] 뉴스레터를 구독하시면 위와같은 콘텐츠를 1-2주에 한번 이메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https://maily.so/brand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