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홀릭 마케터, 개발자를 꿈꾸다.

by 마블로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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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했던 스타트업 마케터


지금도 스타트업에서 마케터로 일하고 있지만, 이전 직장도 스마트업이었다. 지금은 펫it스타트업이고 예전은 클라우드서비스를 하는 it스타트업이라는 점과 지금은 10명의 팀원과 함께 하고 있지만, 이전 직장에서는 유일한 마케터였다는 점이 다르다. 두 직장의 공통점은 '스타트업'이라는 것, 'it'라는 것 그리고 '마케터'라는쯤 될 것이다.


이전 직장에서 처음으로 it와 스타트업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운명적이면서도 운이 좋은 일이었다. 스타트업이 뭔지도 모르고 스타트업에 입문했으나, 여기서 일한 경험들은 결과적으로 생각지도 못한 기회들과 넓은 시야를 가져다주었다. 물론, 단순히 스타트업이라서 얻어진 것들은 아니고 값진 만큼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체득한 것들이다. 원래 결과가 좋으면 과정의 힘듦이야 너스레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40명 남짓 되는 조직에서 마케터는 오로지 나뿐이었다. 소위 말하는 회사의 TO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회사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업무의 경중이 딱 그만큼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저 내가 다른 회사의 마케팅 팀을 대항하는 슈퍼마케터가 되어야한다는 책임감 아래 1년 반을 일에 미쳐 살았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낸 것들이 보상이 되는 날이 있으리라, 엄청나게 대단한 것이 내 손에 쥐어지리라(그것이 돈이 아니라도 체감할 수 있는 어떤 것이리라 생각했었다)는 믿음이 산산이 깨지던 어느 날, 방황이 시작되었다. 그 방황은 눈가리개를 하고 미친 경주마처럼 달리던 나에게 옆을 볼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마케팅, 사전적 정의와 현실적 정의


'마케팅'이라는 단어를 사전에 검색하면 제품을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원활하게 이전하기 위한 기획활동, 시장조사, 상품화 계획, 선전, 판매 촉진 따위라는 정의가 나온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기획도 하고 조사도 하고 계획도 하고 판매도 해야 하고... 마케팅팀이 이 모든 일들을 소화해야 한다면 기획팀과 영업팀, 전략기획팀과의 차이는 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이 사전적 정의는 현실의 마케터에게 그대로 적용되어 모든 활동을 다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 무지해서는 안 되는 그리고 때때로는 그 일들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들이 반복된다. 한 분야에 특화된 대행사 마케터와 규모가 체계적인 기업의 마케터는 이 말에 공감하지 못할지도 모르나, 적어도 스타트업 마케터는 이 말에 적극적으로 공감할 것이다. 마케터들 사이에서도 '마케터는 잡부'라는 말이 공감을 받는 것을 보면 사전적 정의는 소름 돋게 정확하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 된다.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마케팅은 해당 브랜드나 상품이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 중에 장점을 엮어 가치를 만드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경험이 쌓이고 통찰적인 사고를 할수록 고도의 마케팅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디 현실이 그렇게 녹록하던가, 회사에서 마케팅 팀의 역할은 퍼포먼스가 제일 중요하다. 정성적이어도 좋고 정량적이어도 좋으나 그게 뭐든지 결과물을 만들어가야 한다. 왜? 마케팅팀은 회사의 예산을 사용하는 팀이기 때문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의 입장에서 돈을 쓰는 부서는 자연스럽게 ROAS 혹은 KPI 달성 등의 가시적인 성과물에 매달리게 될 수밖에 없다. 학문적인 마케팅에서는 가치를 내세우면 성과가 따라온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성과물을 목표로 달리면서 가치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



마케터 + 개발자, MarVeloper를 꿈꾸다.


내 일이 가치를 찾는 일이라서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성과를 만들어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 성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오로지 장점만 부각시키고, 단점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나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타고난 본성이 대쪽같은데 나의 일은 슬라임 같아야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니... 시간이 지날수록 전문성이 생기는 분야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딱딱해지는 기성세대보다는 말랑말랑하고 체력도 좋고 열정도 식지 않는 젊은 사람들이 더 강점을 가질 수밖에 없는 분야라니...


나의 글을 보면 알겠지만 매우 사실적이고 팩트에 근거한다. 표현력이 남달라 마케팅 감각이 있다는 소리는 종종 들었으나, 실제로 존재했고 내가 느낀 감정들에만 그 감각이 적용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 경험과 생각을 남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표현력은 가지고 있지만, 나조차도 설득되지 않는데 남을 설득시키기 일이란 너무나도 어려웠다. 그리고 내가 해야 했던 마케팅은 일은 아주 조그마한 근거라도 있으면 주장을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괴감이 들었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은데 마치 그러한 것처럼 그럴싸하게 만드는 일, 그럴싸하게 만들기 위해 논리력과 통찰력을 요하는 일... 자괴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더 열심히 근거를 찾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 데이터를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데이터 영역으로 시작된 나의 샛길은 더 나아가 개발의 영역으로 생각을 뻗기 시작했다.


나는 마흔을 넘어간 마케터를 본 적이 없다. 그것은 마흔의 마케터가 메리트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많던 마케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대부분 마케터가 아니라 CMO 혹은 부사장 등 각종 임원을 이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마케터 출신의 CEO라던가, 마케터 출신의 부사장이라던가 등 마흔에도 실무를 하는 마케터는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나는 마흔에도 실무에서 일을 하고 싶다. 8시간의 근무시간 중 6시간이 회의 시간인 관리자가 아니라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계속해서 실무에서 일하고 싶었던 나는 그럴 수 있는 직종이 무엇인지에 대해 떠올렸다. 우리 회사의 마흔에 실무를 하는 사람은 개발자 밖에 없었다. (이 점도 내가 개발자를 선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기도 하다.) 개발자는 업무 특성상 경험의 깊이와 길이가 존중받을 수밖에 없어 주니어와 시니어의 차이가 명확하다. 이전 회사는 개발팀 구성원의 80%가 시니어로 구성된 팀이라 시니어 개발자들과 대화를 많이 할 수 있었다. 회사의 여러 개발자들과 적지 않은 상담 끝에 나는 내 성향이 개발자에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일단 개발 학원에 등록해보기로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성향 중 개발자에 적합한 성향은 다음과 같다.


- 성장 지향적 : 성장에 가치를 두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기분이 들 때 엄청난 성취감을 느낀다. 가치 있다고 판단하면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다. 대학교 때 나의 호는 '사서고생'이었다.


- 정확하고 이성적인 영역의 일 : 일의 영역에 있어서는 정확하고 이성적인 것들을 추구한다.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인과관계가 명확한 것들을 좋아한다. 코드는 오류가 난 이유가 명확하다. 코드 안에서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다. 오류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코드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인과관계가 명확하니까,


- 새로운 지식과 배움에 대한 욕구 : 넓게 때때로는 깊게 아는 것을 좋아한다. 마케팅을 할 때도 끊임없이 컨퍼런스나 강의를 수강하러 다녔었다.


- 문제해결력 : 문제 해결력에는 방법을 찾는 능력과 해결을 위해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 두 가지가 함께 필요하고 생각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 일이 해결될 때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나의 성향이 개발자에게는 기본 덕목이라고 들었다.


- 더 나은 방법을 함께 찾는 일 : 개발은 제 몫을 온전히 해내야 하는 각자의 영역이면서도 협업이 필수인 공통의 영역이기도 하다. 같이 방법을 찾는 동료가 있다는 것과 집단지성이 필요한 영역이라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Connecting Dots


물론, 비전공자에 완벽한 문과 출신이 개발의 영역에 들어선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전공을 한 마케팅이라고 쉬운 영역이던가. 허허


태도가 실력이라고 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과거에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금도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해보고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시작조차 하지 않는 건 나답지 않은 일이다.


6개월 전에 작성했어야 맞는 글을 지금에서야 쓰는 이유는 개발자로서의 전향이 결코 충동적이지 않았고, 꽤 오랜 시간 깊이 고민했음을 남겨놓기 위해서다. 결론적으로 나는 프런트엔드 개발자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첫걸음을 걷기에 앞서 신발 끈을 묶는 글이었다고 해두자.


그간의 다채로운 마케팅 경험들은 프런트엔드 업무에 어떻게든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스티브 잡스의 'Connecting Dots'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