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가넷 더 브릴리언트
Nov 21. 2024
오늘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아내와 함께 들었다.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어떤 내면의 공간이 있다고. 내게도 그런 공간이 있는 것 같다. 정확히는 공간이 아니라 어떤 이미지. 내 10대를 정의하는 이미지는 '독서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바라본 밤하늘'이다. 그때 나는 많은 꿈을 꿨고, 꿈을 꾸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서 많이 변하지는 않았다. 그때도 나는 슬램덩크와 H2를 좋아했고, 지금도 그렇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의 10대를 정의하는 공간은 무엇이냐고. 아내는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 '책상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모습'이라고. 내가 생각해도 아내의 10대 모습은 그랬을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말이 없고, 조용하고, 남을 미워할 줄 모르는 아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을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아내는 책상 앞에서 많은 꿈을 꿨을 것이다. 사랑받는 꿈. 행복한 미래를 만드는 꿈.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지금 아내 옆에 있는 나는 아내가 그때 꾸었을 꿈에 걸맞은 남자인가. 우리의 자녀는, 우리 삶의 환경은, 어쩌면 그 당시 아내가 그렸던 꿈보다 더 좋은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남자인가. 아내가 그렸을 다정한 남자일까, 아낌없이 아껴주고 위로해 주는 남자일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사실 그건 아니다. 난 이번 주에도 회사일에 지쳐 있을 때가 많았고, 옆에 앉아서 다정한 말을 건네지 못할 때가 많았다. 실제로 여러모로 지치고도 남을 만한 일상이기는 했다. 그래도 왠지 아내가 10대 소녀로서 홀로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공상을 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아내를 위로하고 아껴줄 힘이 어디선가 더 생겨나는 느낌이다.
20년 전의 아내에게 말해주고 싶다. 걱정하지 말라고. 20년 후의 너는 꽤 행복할 것이고, 자녀와 남편에게서 충분한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니 조수석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더 다정하게 장난치고 싶어졌다. 아내는 '이 사람이 왜 이러나?' 하는 눈치지만 또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아내에게도 사랑받는 꿈을 꾸던 소녀일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녀는 아직도 아내 깊은 곳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