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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울 Oct 29. 2024

수정한 하루


밤이 되면 쉽게 잠들지 못합니다. 하루를 알차게 보내지 못한 것 같다는 죄책감 때문일까요. 핸드폰을 켜서 릴스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으면 어느새 다음 날이 찾아옵니다. 퇴사 후엔 건강하게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낮 12시가 되어서야 눈을 떴습니다. 입맛도 없어 한참을 누워있다, 오후 2시가 되어서야 침대에서 일어났어요. 반쯤 지난 하루의 시작은 부엌에서 간단히 먹을 것을 찾고 TV를 켜며 시작됩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소란스럽다 싶더니,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네요. 한국에서 노벨문학상이 나오다니 온 동네에 소문이 날 만하지요.


이대로 누워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외출하기로 했습니다. 목적지는 서점. 한강 작가님의 책을 사려고요. 평일 오후에도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니 신기했습니다. 첫째 사람들은 책을 안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 둘째 평일 오후에는 한산할 것이라는 가정을 둘 다 깨버리는 장면이었거든요. 도서 검색대에 ‘한강’ 두 글자를 적어 넣자마자 빨간 글씨로 ‘품절’이라는 단어가 뜨네요. 저도 웃겼습니다. 뉴스 하나 보고 서점으로 달려온 제 모습이 참 간사하게 느껴졌거든요. ‘원칙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이익에 따라 변하는 성질’을 뜻한다는 사전 속 ‘간사하다’라는 단어가 어쩐지 머릿속을 맴돌았어요.


그렇다고 그냥 돌아갈 순 없지요. 서가를 둘러보며 필요한 책을 찾아봤습니다. 오늘은 낯선 타인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에세이가 끌려 에세이를 찾았고요. 그러다 ‘29살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어요. 지금 내 상황에 딱 맞는 책이라니, 흥미로웠습니다. 그녀가 죽기로 결심한 이유는 뭘까, 그녀의 일상을 엿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책을 구입하고 밖으로 나와 집으로 향했지요.


집에 와서는 간단히 씻고 책상에 앉았습니다. 사랑니를 뽑은 후로 금주를 선언했지만, 조금 우울해서 와일드터키를 꺼냈어요. 위스키 한 잔을 마시니 잔열감이 퍼지며 속이 뜨거워졌습니다. 한숨이 절로 나오고 우울감은 한층 짙어졌지요. 이 순간이 조금 비극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츄리닝을 입은 채 위스키를 마시며, 죽음을 결심한 이의 책을 읽고 있다니 운치 있다 생각해 보기로 했어요. 저에겐 내일 당장 출근할 회사도, 재촉할 사람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녀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새 삶을 살기로 했지요.  죽기 직전 손에 잡힌 5달러를 보고 웃음 지었다니, “과거에 죽기로 결심하면 뭐 해, 성공했으니 책을 냈겠지”라며 볼멘소리가 나왔습니다. 변변찮은 직장에서 퇴사한 제 모습이 떠올라서였을까요? 조금은 긁힌 기분이 들었거든요. 나는 멈춰있는데, 이 사람은 도전했다는 사실이 미웠습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밤이네요. 12시로 바뀌기 10분 전, 하루가 끝나고 있습니다. 위스키 한 잔이 세 잔으로 늘어가니 어지러움이 몰려왔어요. 그렇게 침대에 누웠고, 핸드폰을 켜 이것저것 살펴보다 눈을 감았습니다.


내일이라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요? 저는 오늘도 이 밤이 두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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