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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이면 재능이 아닐까

by 박상규

'1년 350만 원'으로 빌린 지리산 피아골 별장. 잔디 마당에 서서 둘러보면 사방은 푸른 숲이나, 발밑 동쪽 축대 아래는 거대한 풀밭이었다. 칡넝쿨, 다래넝쿨, 환삼덩굴의 줄기와 잎에 촘촘히 에워싸인 감나무, 복숭아나무, 매실나무는 금방 질식해 죽을 듯했다.


"감자도 심고, 고구마도 캐 먹고 그랬는데... 이젠 완전히 풀밭이 되어 부렀네."


넝쿨식물이 장악한 저 땅이 수년 전에 밭이었다니. 내 옆으로 다가온 집주인, 일명 '여수 주윤발'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우리 박 작가 부지런 하시면, 농사를 한 번 지어보셔도 되는데..."


여수 주윤발은 축대 아래 풀밭을 바라봤다. 저 풀밭을 한 번 개간해 보라고? 주윤발의 멘트는 분명 미끼였다. 나는 풀밭을 바라봤다. 아마존 밀림처럼 보였다. 휘발유를 뿌려 숲을 몽땅 태운 뒤 아보카도를 키워낸다는 남미 농부의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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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저 땅을 개간해 보라는 주윤발의 제안은 "자네 혹시 21세기 지리산 화전민이 되어 보는 건 어떤가?"의 멘트로 들렸다.


"정말... 해볼까요? 제가 저 땅에서 농사 지어도 돼요?"


내가 입질을 하자, 주윤발이 한 발 뺐다.


"에이, 아서요! 저 풀을 어떻게 잡아. 클나! 박 작가 괜히 나서면 탈 나."


세상에는 반어법 미끼라는 것도 있다. 또 세상 어느 한 켠에는 반어법 미끼마저 물어 제끼는 무모한 사람도 있다.


"제가 풀 잡아볼게요. 예초기로 싹 밀어버릴게요."

"박 작가, 예초기도 쓸 줄 알어?"


말은 이렇게 해도 주윤발은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틀렸다. 주윤발의 확신은 빗나갔다. 나야말로 말은 저렇게 했지만, 예초기를 쓸 줄 모른다. 선산의 아담한 무담 몇 개 밀어본 적 있지만, 그걸로 '나 예초기 쓸 줄 안다'고 말하면 과장 화법이다.


피아골 농부 김승호를 찾아갔다. 김승호는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농사 경력은 대선배다. 김승호에게 예초기를 빌리고, 또 예초기 사용법 '10분 속성 강습'을 받았다. 예초기를 등에 메고 떠나는 내게 김승호는 말했다.


"형님, 그걸 꼭 해야겠어요?"


굳이 왜 풀밭을 개간하려는 건지 나 자신도 모르는데, 김승호는 오죽 답답했을까.


"그냥 해보지 뭐."

"그려요, 해봐요. 한 번 해봐야 다음부터 안 하지."


내 말을 김승호가 해버렸다. 아무튼 해봐야 포기할 때 미련이 안 남을 거 아닌가. 하고 싶은 걸,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삶을 밋밋하게 만든다. 이 단순한 지혜를 피아골에 처음 들어온 2015년 동네 엄니들에게 배웠다. 그 시절, 내가 배추를 심으면 엄니들이 말했다.


"정말 배추를 심게? 그려 해 봐. 해봐야 내년엔 안 하지. 맘껏 혀!"


내가 곶감을 만들겠다고 대봉 300개를 샀을 때도 동네 엄니가 말했다.


"정말 곶감을 만들 게? 그려 해 봐. 곶감이 되기 전에 감이 전부 썩어문드러지는 꼴을 봐야 내년에 또 한단 소릴 안 하지. 맘껏 혀!"


내년의 미련을 앞당겨 잘라 버리는 마음으로 나는 예초기에 시동을 걸었다. 아래 사진은 2025년 8월 15일 오전 6시 24분 18초의 스틸컷이다. 장화는 김승호가 자기 신던 걸 줬고, 꽃무니 셔츠는 몇 해 전 엄마가 준 것이다. 주로 잠옷으로 입었는데, 이젠 작업복으로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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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흔드는 예초기 엔진 소리에 '여수 주윤발'이 잠 덜 깬 얼굴로 나와 축대 위에서 날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오메, 저것이... 기어코 일을 저질렀구만.'


축대에서 보면 내 모습이 아래 사진처럼 보인다. 웬만한 잡초도 모두 내 키보다 크다. 뭐 어떤가. 내 손엔 강력한 예초기가 쥐어져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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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은 한낮의 태양을 피해 해 뜨기 전후에만 진행했다. 아래 사진은 같은 날 오후 6시 50분 35초의 스틸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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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다음날인 2025년 8월 16일 오전 6시 59분 51초의 스틸컷이다. 아이폰은 참 여러 정보를 정확히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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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작업 3일 차인 2025년 8월 17일 오전 11시 30분 11초의 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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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초기로 밀고간 자리, 모두 폐허가 됐다. 가슴이 조금씩 웅장해지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나는 피아골계곡에서 책을 읽었다. 양귀자의 소설 <희망>을 말이다.


보시다시피 뭔가 부자연스러운 연출샷이다. 저렇게 책을 읽을 순 있지만, 별로 추천하는 방식은 아니다. 보긴 좋지만, 젖은 손으로 책장을 넘기면 책만 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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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렇게 연출샷을 올리는 건, 나의 오랜 꿈이 담긴 컷이기 때문이다. 산골에서 낮에는 육체 노동을 하고, 저녁에는 문학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밤에는 마당의 별을 한 번 보고 잠자리에 드는 게 나의 오랜 로망이다.


로망이 현실이 되는 건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낮에 육체노동을 하면 저녁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건 무척 어렵다. 내일의 노동을 위해 일찍 자야 하고, 밥 먹으면 대부분 골아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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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8일 오후 6시 41분 43초를 지나던 순간의 모습. 풀에 가려진 땅이 드러났고, 칡넝쿨에 포위됐던 나무들도 해방됐다. 풀을 잡았으니, 이젠 저 땅을 뒤집어 엎어야 한다. 진정한 풀과의 전행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시인 김수영은 바람보다 빨리 눕고, 울고, 일어서는 게 풀이라고 했다. 여기에 더해 뽑고 한 걸음 가서 돌아보면 어느새 나와 있는 게 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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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똥배가 살짝 가려졌다면 오래도록 사랑했을 이 스틸컷은 2025년 8월 24일 오전 7시 3분 49초에 촬영됐다. 밀림의 풀을 잡으며 나는 구례 읍내 시장에서 저 꽃무늬 바지를 샀다. 길고양이와도 친구가 됐다. 머리가 커 '대갈장군'이란 이름을 붙였다.


머리 큰 고양이는 귀엽지만, 배 나온 중년은 싫다. 믿거나 말거나, 뱃살이 없었는데 풀을 잡는 동안 늘었다. 육체 노동을 하며 밥을 많이 먹은 탓이다. 요즘 다시 뱃살을 조지고 있다. 풀을 조샀듯이, 뱃살도 조사버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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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나의 밭을 감상할 차례다. 아래처럼 달라졌다. 이젠 부턴 시각 기록을 생략하겠다. 이미지를 보며 상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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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을 개간해 기어코 밭을 만들었다. 그 밭에 무를 파종하고, 배추-브로콜리-양배추-쑥갓-상추-바질 등을 심었다. 풀을 베고, 땅을 갉아 엎는 것보다 작물을 제대로 키우는 게 몇 배나 힘들다. 이렇게 심었다고 저절로 자라날 리 없다.


이 산골에 무를 파종했으니 앞으로 고라니가 제일 행복할 거다. 배추는 벌레들이 대부분 먹을 것이고, 아마 나는 3분의1만 타작해도 성공일 것이다. 대단한 농부가 되겠다고 일을 벌인 건 아니다. 운이 좋아 저 바질이 잘 자란다면 파스타 정도는 해먹을 수 있겠지만, 망하면 그냥 신라면 끓여 먹으면 된다.


내가 밀림을 텃밭으로 바꾸며 땀을 흘리는 동안 마당의 칠자화나무는 하얀 꽃을 피워냈다. 볕 좋은 날엔 벌, 나비가 칠자화 꽃 주변에 한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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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선우가 시 <얼레지>에서 말했듯 벌, 나비 좋으라고 꽃이 피는 게 아니다. 꽃은 지가 좋아서, 지 좋으라고 피는 것이다. 이 산골에서 내가 좋아서 밭을 만들었다. 꼬이는 고라니, 벌레 탓하지 않을 생각이다.


요즘 오전 5시면 대갈장군이 문앞으로 다가와 밥 달라고 울어댄다. 녀석에게 사료를 주고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축대 위에 서서 저 아래의 밭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쯤이면 타고난 재능이 아닐까... 나는 밭을 보면서 자뻑이 빠지고 그런 황홀 속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돈도 안 되는 일 뭐 그리 열심이었냐고? 쓸데없는 짓이란 거, 인정한다. 하지만 아침의 황홀이란 건 돈 주고도 못 사는 거 아닌가?


무엇보다 내겐 친구 대갈장군이 생겼다. 꽃에 벌, 나비 꼬이듯 내게 대갈이가 왔다.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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