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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규 Oct 29. 2018

소심한 아버지는 칼을 들었다

[아버지의 레시피 - 1편]


엄마가 옆집 총각과 사랑에 빠진 날에도 아버지는 보신탕을 끓였다. 개한테 화풀이를 하거나, 상실의 허전함을 개고기로 달래려는 건 아니다. 우리집은 보신탕이 핵심 메뉴인 청계산 식당. 아내에게서 비밀스런 사랑의 향기가 흘러도 오늘 판매할 보신탕을 끓여야 하는 건, 보신탕집 사장의 숙명이다.


엄마는 사랑을 선택해 집을 떠났다. 엄마는 과감했고, 아버지는 무기력했다. 내가 이만큼 커서 돌아보니, 아버지의 패배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집은 보신탕집이었지만, 총각네 집은 복숭아와 딸기를 키우는 과수원이었다.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날이 오면 우리집엔 개고기 냄새가 퍼졌지만, 총각네 집에선 복사꽃이 피고 향기가 넘쳤다.


아버지는 엄마보다 열 살 많았다. 옆집 총각은 엄마보다 훨씬 어렸다. 아버지는 키가 작고 배가 불룩했다. 옆집 총각은 젊고 탱탱한 것도 모자라 늘씬하기까지 했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 저 괴력의 젊은 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그 작은 시골 마을에선 분명 이런 소문이 꽃향기처럼 소리 없이 퍼졌을 거다.  


“개고기 암만 묵어봐야 다 소용없어! 젊은 게 최고요!”


엄마가 떠난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계속 보신탕을 끓였다. 이사 가지도 않았다. 우리집과 가장 가까웠던 옆집 총각네도 마찬가지다. 이쯤되면 서로에게 물어야 마땅했다.


‘이웃이란 무엇인가.’

‘이웃사촌이란 말은 정말 타당한가.’


살던 곳에서 떠난 사람은 여자 한 명, 우리 엄마뿐이다. 엄마는 청계산을 떠나 안양 남부시장 후미진 골목 안쪽 창신여인숙 2층 끝방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아이 넷 딸린 여자를 끝까지 사랑하는 동화 주인공같은 총각은 이 세상에 없다. 그런 스토리를 읽거나 본 적도 없다. 적당한 순간에 치고 빠지기, 유부녀와 사랑에 빠지는 젊고 탱탱한 것들의 정해진 숙명이다. 불쌍한 우리 엄마, 젊은 놈의 속을 어찌 알겠는가.


엄마는 보신탕과 꽃향기 사이에서 ‘제3의 길’을 갔다. 목욕탕 때밀이로 취업해 돈을 모아 형과 두 누나를 도시로 데려갔다. 자주, 때로는 간헐적으로 연애를 이어갔다. 강한 여성이다.


청계산 보신탕 집엔 아버지와 나만 남았다. 엄마가 떠난 뒤 아버지는 무너졌다. 집을 자주 비웠고, 도박을 시작했다. 보신탕집에서 개고기 냄새가 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술을 마시면 어린 내 앞에서 자주 울었다. 약한 남성이다.


사랑을 택한 강한 여자가 사는 창신여인숙 2층 끝방과, 사랑을 잃고 무너진 남자가 보신탕을 만드는 산골 식당을 오가며 나는 살았다. 엄마 집에는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여자의 억척스러움이, 아버지의 집에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상실감이 출렁였다.


아버지의 상실감,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8살 때로 기억한다. 집 뒷산 참나무 위에 야생 매가 둥지를 틀었다. 아버지는 매와 둥지를 오랫동안 유심히 지켜봤다. 알에서 부화한 아기 매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아버지는 참나무 위로 올라가 두 마리를 품에 안고 내려왔다.


살아 있는 어린 매 두 마리, 아버지가 내게 준 생의 첫 선물이었다. 나는 매를 새장에 가두고 냇가에서 잡은 물고기, 풀밭에서 생포한 개구리를 먹이로 주며 소중하게 키웠다. 내가 다른 존재에게 먹이를 먹이면서 마음까지 준 건 그때가 처음이다.


매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날개를 펴 매의 크기를 가늠해 보고 싶었다. 좁은 공간에서 살았으니 날지 못할 거라 여겼다.

새장 문을 열고 매 한 마리를 꺼냈을 때, 녀석은 푸드덕 몸부림치며 나를 놀래켰다. 내 손에서 벗어난 매는 공중으로 날아올라 깊은 산 쪽으로 떠났다. 내가 애써 물고기 잡아 먹여가며 키운 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눈앞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엉엉 울었다.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상실감이란 걸 떠올리면, 저 하늘로 날아가는 매와 그걸 보면서 펑펑 우는 키 작은 나와,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나이를 물어본 적 있다. 그때 아버지는 마흔 둘이라고 했다. 그날 이후 마흔 둘은 내게 어떤 기준점이 됐다. 어른, 아버지, 흔들림을 상징하는 숫자 말이다.


아버지가 바보처럼 느껴진 날이 많았다. 창피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이 불편했을 텐데, 왜 이사가지 않고 총각네 집과 이웃한 곳에서 평생 살았을까. 나라면 찾아가 불이라도 질렀을 텐데, 왜 아버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지 모든 게 답답했다.


약한 아버지와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 나. 어쨌든 우린 살아야 했다. 아버지가 도저히 꺾을 수 없었던 그 젊고 탱탱한 총각네 옆집에서 말이다.


삼시세끼의 시간은 승자와 패자, 사랑을 얻은 자와 잃은 자를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찾아왔다. 먹어야만 사랑을 하고, 아픔도 견딜 수 있다. 소심하여 방화범이 되지 못한 아버지는 칼을 들고 요리를 했다.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난 아버지가 만들어주는 먹이를 받아 먹고 자랐다.


시간이 흘러 나 역시 ‘마흔 둘’ 즈음이 됐다. 요리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덕에 음식 만드는 게 특별히 어렵거나 어색하지 않다.


어느 날 아침, 무채 무침을 만들기 위해 무를 썰 때였다. 무 좀 썰어본 사람은 안다. 금속 칼날이 무 속살을 파고들 때 나는 그 사각거림, 무를 통과한 칼이 나무 도마와 부딪히는 순간에 퍼지는 소리의 리듬감을 말이다.


그 리듬에 맞춰 무를 썰다가 동작을 멈췄다. 칼을 쥐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칼질 소리가 주술사의 영험한 주문처럼 효력을 발휘한 걸까. 잘게 잘린 무와 날카롭게 반짝이는 칼날 앞에서 오래전에 떠난 아버지 떠올랐다. 속에서 뭔가가 올라오는 듯했다. 나는 마른 침을 몇번 삼켜 그 무언가를 저 깊은 곳으로 돌려 보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무를 썰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아버지를 바보로 생각한 게 미안했다. 어쨌든 아버지는 숱한 슬픔, 좌절 속에서도 내게 따뜻한 밥을 차려준 사람이 아닌가. 매 두 마리도 내게 선물해줬고. 우라질, 무 써는 리듬에 맞춰 눈물이 도마 위로 뚝뚝 떨어졌다.


1986년 가을, 어느 휴일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그때 보신탕집이 망해 아버지와 나는 동네 어느 마당깊은 집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았다. 주말의 가을 볕이 좋아도 너무 좋았고, 하늘은 대책 없이 푸르렀다.


옆방에 세 들어 살던 친구와 놀기 딱 좋은 날이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친구는 자기 누나, 엄마와 함께 나들이 간다고 좋아했다. 친구 가족이 떠나자 그 넓은 마당깊은 집에는 나와 아버지와 견디기 힘든 고요함만 남았다.

아버지는 방에 가만히 앉아 삶은 밤을 까 먹었다. 밀도 높은 가을볕과 무거운 정적, 그리고 아버지의 쩝쩝거림. 결국 나는 아버지 옆에 벌렁 누워 울었다. 심심해서, 너무 심심하고 고독해서 울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아버지는 내가 왜 우는지 안다는 듯,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계속 삶은 밤을 까 먹으면서 이 말만 몇번 반복했다.


“울지마. 울지마...”


무심한 듯한 저 짧은 말. 당시에는 아무 감흥이 없었는데, 살면서 감당하기 힘든 일로 눈물이 나면 아버지의 저 말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아버지가 내게 남긴 큰 유산 중 하나지 싶다.  


‘아버지의 레시피’를 쓰고 싶어졌다. 아버지가 내게 해줬던 음식을 지금의 내가 만들어 보면서 아버지 인생과 지금의 내 삶을 겹쳐서 돌아보고 싶다. 그때의 음식을 만들고 맛보다 보면 내가 몰랐거나, 깨닫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이 보일 수도 있다.


음식 이야기지만, 요리 방법이 주요 내용이 아닌 글. 그때의 음식으로 ‘아버지의 시대’를 씹고, 뜯고, 맛보는 이야기. 무엇보다, 아버지의 음식과 글쓰기를 통해 하루하루를 견디고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한 번 살펴보고 싶다.


여기에 더해 그동안 내가 기자로 살면서 만난 가난한 사람들의 밥상에 대해서도 쓰고 싶다. TV에서는 15분 내에 현란한 음식을 만들고 요란하게 감탄하는 게 대세이지만, TV 밖의 많은 사람은 15분 내에 끝내야 하는 식사를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노동으로 보낸다.


이상국의 시처럼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힘든 삶이 얼굴에 새겨놓은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더운 밥 한끼 나눈 이야기도 쓰려 한다.


나도 아버지처럼 마흔 둘을 넘기니 조금은 알겠다. 살다보면 뜻밖의 순간에 상처와 아픔을 만나기도 하며, 그럴 때도 억지로 찬밥을 넘기 듯이 꾸역꾸역 견뎌내야 한다는 걸 말이다.



이제 나는 엄마의 사랑, 아버지의 상실, 옆집 총각의 도발을 이해한다. 세 사람은 각자 사랑하고 이별했을 뿐이다. 이 세상을 사는 누구나처럼 말이다. 갑자기 내 마음이 넓어져서 그리 생각하는 게 아니다. 세 사람에게 사랑과 상처는 소나기처럼 갑자기 찾아왔는지 모르지만, 나는 꾸준히 내리는 가랑비처럼 그들을 오래 지켜봤다. 뭐, 그럴수도 있지.


이건 체념이 아니다. 더디지만 우직하게 흐른 시간이 안겨 준 일종의 선물이다. 젊고 탱탱한 것들은 결코 알 리 없는 세월의 신비한 힘! 아니면 그동안 먹어온 밥심!


나이 먹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아버지는 젊은 것에 졌지만 말이다. 종일 썼더니 배 고프다. 자, 이제 밥 먹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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