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쥔 사람들: 욕망과 혐오의 600년


칼을 쥔 사람들: 욕망과 혐오의 600년

백정에서 마에스트로까지, 한국 도축의 사회사

미트마케터 김태경 Ph.D

칼을 쥔 사람들: 욕망과 혐오의 600년

백정에서 마에스트로까지, 한국 도축의 사회사

프롤로그. 붉은 피와 흰 옷: 기묘한 공생

고기를 씹으며 '살생'을 논하는 양반들의 이중성.

가장 천한 자들의 칼끝에서 가장 고귀한 자(유생)들의 밥상이 차려지던 조선의 모순된 구조 소개.

제1부. 경계의 사람들: 초원을 잃어버린 늑대들

한반도 정착민과 섞이지 못했던 '이방인'으로서의 기원을 추적한다.

1.1. 농사를 거부한 사람들: 그들은 왜 땅을 파지 않고 버들고리를 엮었나? 양수척(楊水尺)과 달단(韃靼)으로 불린 북방 유목민의 후예들.

1.2. 빼앗긴 이름 '백정(白丁)': 고려시대 평범한 농민을 뜻하던 단어가 어떻게 천민의 대명사가 되었나. 세종의 동화 정책이 불러온 언어의 비극.

1.3. 유랑의 끝: 정착 사회의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채, 사냥과 도축 기술을 무기로 생존해야 했던 '도한(屠漢)'의 삶.

제2부. 성균관의 그림자: 한양의 푸줏간, 현방(懸房)

가장 거룩한 공간(성균관)과 가장 비천한 공간(푸줏간)이 얽힌 거대 비즈니스를 다룬다. (현방고 자료 핵심 활용)

2.1. 공자님과 소고기: 성균관 유생들의 식비와 제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성균관 노비인 '반인(泮人)'에게 소고기 독점 판매권을 준 국가의 아이러니.

2.2. 현방(懸房), 한양의 욕망을 걸다: 도성 안 20여 곳의 현방을 장악한 반인들. 그들은 단순한 노비가 아니라, 한양 상권을 쥐락펴락했던 특권 상인이었다.

2.3. 반인 vs 백정, 그들만의 계급 전쟁: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 성균관 반인들이 일반 백정(신백정)의 도축을 탄압하고 시장 진입을 막으며 벌인 치열한 이권 다툼.

2.4. 속대(贖代)의 굴레: 특권의 대가는 가혹했다. 매달 막대한 세금을 성균관에 바쳐야 했던 반인들의 고뇌와, 이를 채우기 위해 자행된 병든 소 도축과 강매의 폐단.

제3부. 각성: 저울처럼 평등하라

신분제가 무너진 근대, 억눌렸던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외치기 시작한다.

3.1. 붉은 점의 낙인: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호적에 찍힌 붉은 점과 '도한'이라는 멸시는 사라지지 않았다.

3.2. 형평(衡平)을 외치다: 1923년 진주 형평사 운동.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다." 백정도 사람임을 선언한 한국 최초의 인권 운동.

3.3. 교회로 간 백정: 박성춘 장로 이야기 등을 통해 종교를 통해 신분의 벽을 넘으려 했던 노력 조명.

제4부. 공간의 이동: 숭인동에서 마장동까지

혐오 시설로 밀려나던 도축장이 거대 산업 단지로 변모하는 현대사적 과정을 그린다. (마장동 논문 핵심 활용)

4.1. 쫓겨나는 칼: 일제강점기 현저동에서 숭인동(1925년)으로, 해방 후 다시 마장동(1961년)으로. 도시가 팽창할 때마다 외곽으로 밀려난 도축장의 역사.

4.2. 살곶이 목장의 변신: 조선시대 말을 기르던 땅(마장동)이 수도권 최대의 고기 공급 기지가 된 지리적 운명.

4.3. 피 냄새가 사라진 자리: 1998년 마장동 도축장은 문을 닫았지만, 남겨진 상인들은 '발골의 기술'과 '신선함'을 무기로 살아남았다. 혐오 시설에서 '맛집 성지'로 거듭난 공간의 재탄생.

에필로그. 마에스트로가 된 백정

이제 우리는 그들을 '백정'이라 부르지 않는다. 정형사, 발골 전문가, 혹은 마에스트로.

칼을 쥔 자들에 대한 시선이 '천대'에서 '존중'으로 바뀌기까지, 우리 사회는 얼마나 성숙해졌는가?

[프롤로그] 붉은 피와 흰 옷: 기묘한 공생

1. 씹는 입과 읊는 입

한양의 북동쪽, 반촌(泮村)의 새벽은 언제나 두 가지 소리가 섞이며 시작되었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쪽 성균관 명륜당에서는 유생들이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낭랑하게 읊조렸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시대를 이끌어갈 지성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도덕적 결기가 서려 있었다.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한다(君子遠庖廚)." 맹자의 양혜왕편에 나오는 이 구절은 그들에게 불문율과도 같았다. 살생의 현장은 잔혹하고 비천한 것이니, 인(仁)을 숭상하는 군자는 마땅히 그 참혹함을 보지 말아야 하며, 그 울부짖는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담장 바깥, 반촌의 골목은 전혀 다른 소리로 하루를 열었다. 죽음을 직감한 소의 거친 숨소리, 단말마의 비명, 그리고 두꺼운 가죽을 가르고 뼈와 살을 해체하는 둔탁하고 젖은 칼질 소리. 그곳에는 묵향 대신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고, 흰 도포 대신 피와 기름으로 얼룩진 옷을 입은 사내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은 성균관의 노비이자, 한양 사람들의 식탁을 책임지는 도축업자, 바로 ‘반인(泮人)’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군자가 멀리해야 한다던 그 푸줏간의 주인들은 군자가 가장 아끼는 종들이었다. 그리고 담장 안쪽에서 글을 읽던 유생들의 밥상 위에 올라가는 소고기 국밥, 그 기름진 고기는 바로 담장 바깥에서 천대받던 이들의 칼끝에서 나왔다. 유생들은 아침 식사로 따뜻한 고깃국을 넘기며 밤새 읽은 경전을 되새겼을 것이다. 씹는 입과 읊는 입. 고기를 탐닉하는 욕망의 입과 도덕을 설파하는 당위의 입. 조선 사회는 이 두 개의 입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고, 그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백정’과 ‘반인’이라는 존재를 필요로 했다.

우리는 흔히 조선을 ‘선비의 나라’, ‘성리학의 나라’라고 부른다. 백색의 의복을 숭상하고, 청빈과 절제를 미덕으로 삼았던 사회. 하지만 그 백색의 순결함 뒤에는 언제나 붉은 피를 묻혀야만 하는 누군가의 노동이 숨겨져 있었다. 이 책은 바로 그 ‘숨겨진 노동’과 ‘드러난 욕망’ 사이의 기묘한 공생에 관한 기록이다. 고기를 씹으며 살생을 논하고, 천한 자들의 돈으로 고귀한 학문을 닦았던, 우리 역사의 가장 모순적이고도 인간적인 풍경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2. 백정(白丁), 오염된 이름의 역사

역사는 때로 언어의 기억 속에 가장 진실한 흔적을 남긴다. 우리가 흔히 ‘도축하는 천민’을 가리킬 때 쓰는 ‘백정(白丁)’이라는 단어에는 서글픈 역설이 담겨 있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백정은 특정한 직역(職役)을 갖지 않은, 그저 농사를 짓고 세금을 내는 ‘일반 평민(百姓)’을 뜻하는 말이었다. ‘백(白)’은 관직이 없음을, ‘정(丁)’은 장정을 뜻하니, 말 그대로 ‘흰 옷을 입은 평범한 사내’라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이 평범하고 순수한 이름이 어쩌다 천대와 멸시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그 비극은 역설적으로 차별을 없애려던 정책에서 시작되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 한반도에는 정착 농경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도는 무리가 있었다. 이들은 ‘양수척(楊水尺)’ 혹은 ‘화척(禾尺)’이라 불렸다. 이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들이 한반도 토박이가 아닌 북방 유목민, 즉 거란이나 여진, 혹은 몽골계 타타르(달단)의 후예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농사를 짓기보다는 사냥을 하고, 가축을 도살하고, 버들고리를 엮어 파는 데 능숙했던 그들의 생활 방식은 정착 농경 사회인 조선의 질서와는 결코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았다.

세종대왕은 이 이질적인 존재들을 조선의 백성으로 끌어안고자 했다. 그들에게 땅을 주고 농사를 짓게 했으며, 천민이라는 낙인을 지우기 위해 그들을 일반 평민과 똑같이 ‘신백정(新白丁)’이라 부르게 했다. "이제 너희도 평범한 백성(백정)이다"라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왕의 이상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기존의 양민들은 이 ‘새로운 백성’들을 동등한 이웃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여전히 사냥을 하고 칼을 썼으며, 생김새와 기질이 달랐다. 양민들은 그들과 섞이는 것을 혐오했고, 결국 ‘백정’이라는 단어는 원래의 뜻인 ‘평민’을 잃어버리고, ‘도축하는 천민’만을 가리키는 배타적인 용어로 전락하고 말았다.

언어는 오염되었고, 존재는 고립되었다. 그들은 조선 사회의 가장 낮은 곳, 성곽 밖이나 다리 밑, 혹은 격리된 특수 구역으로 밀려났다. 사람들은 고기를 먹고 싶을 때만 그들을 찾았고, 고기를 받아 든 뒤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을 뱉으며 돌아섰다. 필요하지만 섞이고 싶지는 않은 존재,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만 혐오의 대상이 되는 존재. 이것이 600년 전, 이 땅에 정착하려 했던 이방인들이 마주한 가혹한 운명이었다.

3. 성균관의 금고가 된 푸줏간

조선의 심장부 한양에서는 이보다 더 적나라하고 구조적인 모순이 작동하고 있었다. 바로 ‘성균관(成均館)’과 ‘현방(懸房)’의 관계다.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 유학을 공부하는, 그야말로 도덕과 윤리의 최전선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균관의 재정적 기반은 가장 천대받는 ‘살생의 업’, 도축이었다.

한양 도성 안팎에는 20여 곳의 소고기 판매점인 ‘현방’이 있었다. 고기를 갈고리에 매달아(懸) 놓고 파는 가게(房)라는 뜻의 현방은, 한양 사람들의 육류 소비를 독점하는 거대한 카르텔이었다. 그리고 이 현방의 주인은 다름 아닌 성균관의 노비, ‘반인(泮人)’들이었다. 국가는 성균관 유생들의 식비와 제사 비용, 그리고 성균관을 관리하는 반인들의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들에게 소고기 독점 판매권이라는 막강한 특권을 주었다.

이 기묘한 공생 관계는 조선 사회의 이중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유생들이 읽는 책, 그들이 입는 옷, 그리고 그들이 먹는 밥은 모두 반인들이 소의 목을 따고 가죽을 벗겨 번 돈, 즉 ‘속대(贖代)’에서 나왔다. 가장 고귀한 도덕을 논하는 공간이 가장 비천하다고 여겨지는 피 묻은 돈으로 지탱되고 있었던 것이다.

반인들은 단순한 노비가 아니었다. 그들은 성균관이라는 거대 권력을 등에 업은 특권 상인이었다. 그들은 한양의 고기 상권을 장악하고, 일반 백정들이 도성 안으로 들어와 고기를 파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심지어 사적으로 형벌을 가하며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도 했다. 백정들이 사회의 최하층에서 멸시받는 동안, 반인들은 ‘성균관의 식구’라는 자부심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묘한 권력을 누렸다. 물론 그 대가는 가혹했다. 매달 성균관에 바쳐야 하는 막대한 세금을 채우기 위해, 그들은 때로 병든 소를 잡거나 물을 먹여 무게를 늘리는 등 불법과 편법의 유혹에 시달려야 했다.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글 읽는 소리와, 뼈와 살이 분리되는 칼질 소리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존했던 반촌. 그곳은 조선 사회가 애써 외면하고 싶어 했던 욕망의 하수구이자, 동시에 그 욕망을 정화하여 성리학적 질서로 승화시키는 거대한 용광로였다.

4. 혐오를 넘어선 기술, 마에스트로의 탄생

세월은 흘러 신분제는 법적으로 사라졌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백정은 면천되었고, 호적에 찍히던 붉은 점도 사라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 속에 깊이 박힌 붉은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숭인동의 가축시장을 거쳐, 해방 후 마장동 축산물 시장에 이르기까지, 도축의 공간은 도시가 팽창할 때마다 혐오 시설로 낙인찍혀 외곽으로 밀려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 억압의 시간 속에서도 그들은 칼을 놓지 않았다. 아니, 놓을 수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생존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칼을 가는 기술을 연마했다. 거대한 소 한 마리를 순식간에 해체하여 수십 가지의 부위로 나누어내는 그들의 솜씨는 단순한 노동을 넘어선 기예(技藝)에 가까웠다.

현대에 이르러 마장동은 더 이상 피 냄새 진동하는 기피 장소가 아니다. 미식가들이 가장 신선한 고기를 찾아 헤매는 성지이자,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거대한 육류 단일 시장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은 이제 ‘백정’이라는 멸칭 대신 ‘정형사’, ‘발골 전문가’, 혹은 ‘마에스트로’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들의 칼끝에서 피어난 섬세한 마블링은 한국의 식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린 예술 작품이 되었다.

5. 칼을 쥔 사람들을 위한 변명

우리는 누구나 고기를 먹는다. 맛있는 스테이크를 썰고, 불판 위에서 지글거리는 삼겹살에 환호한다. 하지만 그 고기가 내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 즉 살아있는 생명이 죽어 고기가 되는 그 적나라한 과정은 애써 외면하려 한다. 우리는 ‘결과(고기)’만을 욕망할 뿐, ‘과정(도축)’은 혐오하거나 타자화한다.

이 책 <칼을 쥔 사람들: 욕망과 혐오의 600년>은 바로 그 외면받았던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고려의 유목민부터 조선의 반인, 일제강점기의 형평사 운동가, 그리고 현대 마장동의 장인들까지. 그들은 우리 사회가 필요로 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필요악’의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쥔 칼은 생명을 해치는 흉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배고픔을 달래고, 가족을 부양하며, 사회를 지탱하는 생존의 도구였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귀한 먹거리를 다루었던 그들의 역사는, 어쩌면 위선과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해 온 우리 자신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600년 동안 이 땅의 밥상을 지켜온, 붉은 피와 흰 옷의 사람들을 만날 시간이다. 책을 덮을 때쯤이면, 당신의 식탁 위에 오른 고기 한 점이, 그리고 그 고기를 다루는 사람들의 손길이 조금은 다르게, 어쩌면 조금 더 경이롭게 보일 것이다. 이것은 고기에 관한 책이 아니라, 사람에 관한 책이다.

제1부. 경계의 사람들: 초원을 잃어버린 늑대들

1.1. 농사를 거부한 사람들: 그들은 왜 땅을 파지 않고 버들고리를 엮었나?

: 양수척(楊水尺)과 달단(韃靼)으로 불린 북방 유목민의 후예들

1. 정착의 땅, 유랑의 발자국

한반도는 본래 ‘정착(定着)’의 땅이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물길이 굽이치는 이 땅에서 사람들은 일찍부터 씨앗을 뿌리고, 계절을 기다리며, 땅에 뿌리를 내리는 법을 배웠다.

농경 민족에게 땅은 곧 생명이었고, 이동하지 않는 삶은 곧 안정을 의미했다. 흙을 파서 거처를 마련하고, 그 흙에서 난 곡식으로 배를 채우며, 죽어서 다시 그 흙으로 돌아가는 순환. 이것이 한반도에 살던 대다수 사람, 즉 ‘백성(百姓)’의 삶이었다.

하지만 고려(高麗)라는 왕조가 기틀을 잡아가던 시기, 이 견고한 정착의 질서 위로 낯선 그림자들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농사지을 땅이 있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남들이 봄에 씨를 뿌릴 때 그들은 활을 메고 산을 올랐고, 남들이 가을에 추수할 때 그들은 강가에 앉아 버들가지를 꺾었다. 그들은 한곳에 머물러 세금을 내는 대신, 물과 풀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며 장막(텐트)을 쳤다 걷기를 반복했다.

정착민들의 눈에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이방인이자, 질서를 위협하는 불안한 존재였다. 고려의 관료들은 그들을 호적(戶籍)에 올리려 했으나 그들은 바람처럼 빠져나갔고, 군역을 부과하려 했으나 그들은 늑대처럼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양수척(楊水尺)’ 혹은 ‘무자리’라 불렀다.

우리가 훗날 ‘백정(白丁)’이라 부르게 되는 이 도축 집단의 뿌리는 바로 이들, 한반도의 농경 문화와는 전혀 다른 유전자를 가진 ‘초원을 잃어버린 유목민’들에게서 시작된다.

2. 양수척(楊水尺): 버드나무와 물가에 사는 사람들

‘양수척’이라는 이름에는 그들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녹아 있다. 버들 양(楊), 물 수(水), 자 척(尺). 즉, ‘물가에 살며 버드나무를 다루는 천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왜 하필 물가였고, 왜 버드나무였을까?

농사를 짓지 않는 자들에게 생존은 매일매일이 투쟁이었다. 그들이 가진 기술이라곤 북방의 초원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온 사냥술과 가축을 다루는 법뿐이었다. 하지만 좁은 한반도의 산야는 수만 마리의 양 떼를 몰고 다닐 수 있는 드넓은 초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유목민의 기술을 변형시켜야 했다.

그들은 물과 풀이 있는 강변이나 습지, 다리 밑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그곳은 농민들이 경작지로 쓰지 않는 버려진 땅이었기에 쫓겨날 염려가 적었다. 그리고 그 물가에는 버드나무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그들은 사냥을 나가지 않는 날이면 버들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기고 엮어서 고리(바구니, 상자)를 만들었다. 이를 ‘유기(柳器)’라 불렀다.

버들고리는 농민들에게 필수적인 생활용품이었다. 곡식을 담고, 옷을 보관하는 데 이보다 가볍고 질긴 물건은 없었다. 양수척들은 자신이 만든 버들고리를 들고 마을을 돌며 곡식이나 옷가지와 맞바꾸었다. 이것은 단순한 수공업이 아니었다. 농경 사회의 잉여 생산물을 얻어내기 위해 유목민의 후예들이 찾아낸 필사적인 ‘생존의 교환’이었다.

하지만 이 ‘교환’이 항상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본래 거친 기질을 가진 사냥꾼들이었다. 흉년이 들거나 버들고리가 팔리지 않으면, 그들은 주저 없이 도둑으로 돌변하곤 했다. 민가의 소를 훔치거나 개를 잡아먹고, 심지어는 약탈을 일삼기도 했다. 정착민들에게 양수척은 필요한 물건을 파는 상인이면서, 동시에 밤이면 문을 걸어 잠그게 만드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3. 달단(韃靼)의 후예: 한반도에 갇힌 늑대들

그렇다면 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단순히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들인가? 역사학계와 고문헌들은 그들의 기원을 한반도 내부가 아닌 ‘북방’에서 찾는다.

가장 유력한 기원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끝까지 저항했던 유민들이라는 설과, 거란이나 여진 등 북방 민족의 패잔병들이 흘러들어왔다는 설이다. 실제로 고려사는 양수척을 “태조가 백제를 칠 때 제어하지 못한 유종(遺種)”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고려라는 새로운 왕조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산과 강을 떠돌며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유지했다.

더 결정적인 단서는 ‘달단(韃靼)’이라는 이름에서 발견된다. 조선 세종실록에는 이들을 ‘달단화척(韃靼禾尺)’이라 지칭하는 기록이 나온다. ‘달단’은 타타르, 즉 몽골계 유목 민족을 일컫는 말이다. 고려 후기, 몽골의 침략과 간섭기를 거치며 수많은 북방 유목민들이 한반도로 유입되었다. 어떤 이들은 군인으로, 어떤 이들은 말을 기르는 목자(牧子)로 들어왔으나, 전쟁이 끝나고 원나라가 물러간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땅에 남겨진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뼛속까지 유목민이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데 능했고, 짐승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해체하는 기술이 탁월했다. 농경 민족인 고려인들이 소를 ‘농사의 동반자’로 여겨 죽이기를 꺼릴 때, 이들은 소를 ‘식량과 가죽의 공급원’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칼놀림은 거침이 없었고, 해체 기술은 정교했다.

하지만 평화로운 한반도의 농촌에서 그들의 재능은 환영받지 못했다. 말 타는 기술은 쓸모가 없었고, 사냥할 짐승은 줄어들었다. 결국 그들에게 남은 것은 칼을 다루는 기술, 즉 ‘도축(屠畜)’뿐이었다. 그들은 농사짓기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드넓은 초원을 달리던 DNA를 가진 늑대들이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버린 꼴이었다. 그 답답함과 야생성이 그들을 끊임없이 유랑하게 만들었고, 정착민들과의 불화를 낳았다.

4. 화척(禾尺)과 재인(才人): 천대와 유희의 두 얼굴

고려 사회는 이들을 ‘화척(禾尺)’이라 부르며 멸시했다. ‘화(禾)’는 벼를 뜻하니 언뜻 보면 농사와 관련 있어 보이지만, 실상은 그들이 농사를 짓지 않고 구걸이나 약탈로 곡식을 얻어간다는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혹은 도살업자를 뜻하는 북방의 언어가 한자로 음차(音借)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도축과 유기 제조뿐만 아니라 ‘유희(遊戱)’의 기능도 담당했다는 사실이다. 남자들이 짐승을 잡고 버들고리를 엮을 때, 여자들과 일부 남자들은 춤을 추고, 줄을 타고, 노래를 불렀다. 이를 ‘재인(才人)’이라 불렀다.

유목 민족 특유의 기마술과 신체 능력은 곡예와 무예로 변용되었다. 마을의 잔칫날이나 굿판이 벌어지는 날이면, 사람들은 평소에 멸시하던 그들을 불러 춤과 노래를 즐겼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서늘한 경멸이 깔려 있었다. 그들의 아내와 딸은 때로는 매음(賣淫)을 강요받기도 했고, 양수척의 여자를 ‘기생의 별칭’처럼 부르기도 했다.

먹고사는 문제(도축)와 노는 문제(연예)를 모두 이방인 집단에게 맡겨버린 고려와 조선 사회의 이중성은 여기서부터 싹트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제공하는 고기를 먹고, 그들이 보여주는 춤을 보며 즐거워했지만, 정작 그들과 눈을 마주치거나 이웃이 되는 것은 극도로 꺼렸다. 그들은 사회의 필수적인 기능을 담당하면서도, 사회의 구성원으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투명 인간’이자 ‘괴물’이었다.

5.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로 넘어가면서, 이 유랑민 집단의 문제는 심각한 사회적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호적에 등재되지 않으니 세금을 걷을 수도, 군대에 보낼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거주지(특수 부락)는 범죄의 온상이 되었다. 도망친 노비나 범죄자들이 신분을 숨기기 위해 양수척의 무리에 숨어드는 일이 빈번해졌다.

조선의 건국 세력, 특히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신진사대부들에게 이들은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나라에서 농사를 짓지 않고 떠도는 자들은 사회의 기생충과 같았다. 그들을 정착시켜 세금을 내는 ‘양민(良民)’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조선 초기 국가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수백 년간 이어온 유목의 본능을 거세하는 일이었다. 흙냄새보다 피 냄새가 익숙하고, 호미보다 칼과 활이 손에 맞는 이들에게 쟁기를 쥐여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끈질기게 저항했다. 관가에서 강제로 땅을 주면 밤사이에 도망쳤고, 억지로 혼인을 시켜 정착시키려 하면 다시 무리를 지어 산으로 들어갔다.

이 팽팽한 긴장감, 정착하려는 국가와 유랑하려는 이방인들 사이의 줄다리기가 바로 백정 역사의 1막이다. 그리고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세종대왕이 내놓은 회심의 카드가 바로 ‘이름 바꾸기’였다. 그들을 더 이상 화척이나 양수척이라 부르지 않고, 일반 농민을 뜻하는 ‘백정’이라 부르게 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의 결말을 알고 있다. 그 정책은 실패했다. 이름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바뀌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귀했던 ‘백정’이라는 단어가 시궁창으로 떨어지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1.2. 빼앗긴 이름 '백정(白丁)': 평민이 천민이 되다:

고려시대 평범한 농민을 뜻하던 단어가 어떻게 천민의 대명사가 되었나. 세종의 동화 정책이 불러온 언어의 비극.

1. 흰 옷을 입은 평범한 사람들

역사의 아이러니는 종종 단어 하나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우리가 ‘도축업자’ 혹은 ‘천민’의 대명사로 기억하는 ‘백정(白丁)’이라는 단어가, 본래는 이 땅의 가장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사실은 묘한 배신감을 안겨준다.

고려시대의 ‘백정’은 글자 그대로 ‘흰(白) 옷을 입은 장정(丁)’을 뜻했다. 관직에 나아가지 못해 관복을 입을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염색하지 않은 흰 베옷을 입고 묵묵히 땅을 갈아 세금을 내고 군역을 지는 ‘일반 농민’이 바로 백정이었다. 그들은 고려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이었고, 국가 재정의 원천이었다. 고려의 토지 제도인 전시과(田柴科)에는 ‘백정’에게도 전지(밭)를 지급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땅을 받고 세금을 내는 존재, 즉 백정은 고려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이었다.

반면, 소를 잡고 버들고리를 엮으며 유랑하던 이방인들은 ‘양수척(楊水尺)’이나 ‘화척(禾尺)’이라 불리며 철저히 구분되었다. 고려의 농민(백정)들에게 화척은 자신들과는 섞일 수 없는, 말도 통하지 않고 생김새도 다른 ‘오랑캐’였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백정’과 ‘도축업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2. 세종의 꿈: "그들을 '새로운 백성'이라 부르라"

이 견고했던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성리학을 건국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호적에도 오르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으면서 제멋대로 떠도는 화척 집단은 눈엣가시였다. 그들을 방치하는 것은 왕의 교화(敎化)가 미치지 않는 ‘짐승의 영역’을 남겨두는 것과 같았다.

태조부터 태종에 이르기까지, 조선 정부는 이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회유와 강압을 반복했다. 하지만 수백 년간 이어온 유랑의 본능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이때, 성군(聖君)이라 칭송받는 세종대왕이 획기적인, 그러나 훗날 비극의 씨앗이 될 포용 정책을 내놓는다.

“그들을 더 이상 화척이나 재인(才人)이라 부르지 말고, ‘백정(白丁)’이라 부르게 하라.” (세종실록 5년)

세종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들에게서 천시받는 이름(화척)을 걷어내고, 일반 농민을 뜻하는 ‘백정’이라는 번듯한 이름을 붙여주면, 그들도 자연스럽게 양민과 어울려 농사를 짓고 세금을 내는 ‘진짜 백성’이 되리라는 기대였다. 일종의 ‘신분 세탁’이자, 거대한 사회 통합 프로젝트였다. 조정에서는 그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마을에 섞여 살게 했으며, 서로 혼인할 것을 장려했다. 그들을 ‘신백정(新白丁)’, 즉 ‘새로 들어온 백성’이라 부르며 따뜻하게 맞아주려 했다.

왕의 뜻은 지극히 인자하고 논리적이었다. 차별적인 이름을 없애면 차별도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 하지만 세종은 한 가지를 간과했다. 인간의 ‘구별 짓기 본능*과 ‘혐오의 정서’는 왕명보다 훨씬 더 뿌리 깊고 끈질기다는 사실을 말이다.

3. 농민들의 분노: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세종의 ‘백정 명명(命名) 정책’은 즉각적인 반발에 부딪혔다. 반발의 주체는 화척들이 아니라, 원래 ‘백정’이라 불리던 일반 농민들이었다.

평생 흙을 파며 정직하게 살아온 농민들에게, 어제까지 소를 훔치고 피 칠갑을 하던 화척들과 똑같은 ‘백정’으로 불린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이름이 같아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도덕성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공포였다.

“전하, 어찌 저 짐승 같은 자들과 저희를 같은 이름으로 부르십니까?”

기존의 백정(농민)들은 화척들과 섞이기를 거부했다. 화척들이 이사 오면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따돌렸고, 우물도 함께 쓰지 않았다. 혼인은커녕 말조차 섞으려 하지 않았다. 정부가 그들을 ‘신백정’이라 부르며 억지로 끼워 넣으려 할수록, 농민들의 혐오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결국 농민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버리는 선택을 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백정’이라 부르지 않았다. 대신 ‘양민(良民)’, ‘평민(平民)’, ‘백성(百姓)’ 같은 다른 단어 뒤로 숨어버렸다. “우리는 백정이 아니다. 저들이 백정이다.” 농민들은 혐오스러운 집단에게 자신의 이름을 던져주고, 그들과 철저히 선을 그었다.

언어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일종의 ‘의미의 하락’이자 ‘악화(Gresham's Law)’ 현상이었다. 나쁜 의미가 좋은 의미를 구축해 버린 것이다. 세종은 화척을 양민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백정’이라는 이름을 선물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백정’이라는 단어 자체가 화척의 수준으로 끌려 내려가고 말았다.

4. 낙인의 완성: 도한(屠漢)이 된 백정

시간이 흐르면서 ‘백정’이라는 단어에서 ‘평범한 농민’이라는 뜻은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는 ‘소를 잡는 사람’, ‘유기(버들고리)를 만드는 사람’, ‘천하고 더러운 사람’이라는 의미만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원래의 화척들(이제는 백정이 된 이들) 입장에서도 억울한 노릇이었다. 농사를 지으라고 해서 땅을 받았지만, 척박한 땅에서 익숙하지 않은 농사를 짓는 것은 굶어 죽기 딱 좋은 일이었다. 게다가 이웃 농민들의 멸시와 따돌림은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그들은 다시 칼을 들었다. 농사보다는 도축이, 쟁기보다는 사냥이 훨씬 수월하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도축을 하고, 버들고리를 엮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름뿐이었다. 이제 그들은 ‘화척’이 아니라 ‘백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도축을 했다.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백정=도축업자’라는 등식은 완전히 굳어졌다.

실록에는 흥미로운 기록들이 등장한다. 성종 때에 이르면 “백정은 도축과 유기 제조를 업으로 삼는 자들”이라는 인식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그들은 도축 기술을 독점하며 자신들만의 이익 집단화되기도 했다. 일반 양민들이 그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게 막았고, 도축을 통해 얻은 경제력으로 때로는 양반들의 비호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적 낙인은 더욱 가혹해졌다. ‘백정’이라는 이름은 이제 욕설이 되었다.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행실이 나쁜 사람을 보면 “백정 같은 놈”이라고 손가락질했다. 그들은 호적에 ‘백정’이라고 명시되어 관리되었고, 거주지는 마을 외곽이나 성 밖으로 제한되었다. 기와집을 짓는 것도, 비단옷을 입는 것도, 심지어 가죽신을 신는 것도 금지되었다. 상투를 틀지 못하게 하여 머리를 풀어헤치거나 벙거지를 쓰게 함으로써, 멀리서도 한눈에 그들이 ‘백정’임을 알아볼 수 있게 했다.

고려의 평범한 농민이었던 ‘백정’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조선의 가장 천한 ‘도한(屠漢, 도축하는 놈)’만이 그 이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5. 세종의 실패가 남긴 교훈

세종의 동화 정책은 결국 언어의 오염과 차별의 고착화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낳았다. '백정'이라는 이름은 평범한 농민의 것에서 천한 도축업자의 것으로 추락했고, 그들은 성 밖이나 마을 외진 곳으로 밀려나 숨죽여 살아야 했다.

하지만 시선을 조선의 심장부, 한양 도성 안으로 돌리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성 밖의 백정들이 멸시 속에 숨어 지낼 때, 도성 한복판에서 버젓이 칼을 잡고 고기를 팔며 부를 축적했던 또 다른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백정이라 불리기를 거부했고, 스스로를 성균관의 식구라 자부했다.

이제 우리는 억압받던 백정과는 또 다른 결을 가진, 권력의 그늘 아래서 기묘한 특권을 누렸던 이들을 만나러 간다. 그곳은 바로 성균관의 담장 밖, 반촌(泮村)이다.

1.3. 유랑의 끝: 칼을 쥔 도한(屠漢)

: 정착 사회의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채, 사냥과 도축 기술을 무기로 생존해야 했던 삶

1. 실패한 농부, 돌아온 사냥꾼

세종의 '신백정(新白丁)' 정책은 원대한 이상이었으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조정에서 나누어 준 땅은 대부분 척박했고, 평생 말타기와 활쏘기만 해오던 이들에게 쟁기질은 고역이었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기존 농민들의 싸늘한 시선과 따돌림이었다. "짐승 잡던 놈들이 농사라니." 그들이 심은 곡식은 농민들의 비웃음 속에 말라죽거나, 서툰 솜씨 탓에 싹조차 트지 못하기 일쑤였다.

결국 그들은 호미를 던지고 다시 익숙한 것들을 손에 쥐었다. 활과 칼, 그리고 버들가지였다.

그들은 농토를 버리고 다시 산으로, 강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정처 없이 떠도는 완전한 유랑은 불가능했다. 조선의 행정력은 점점 촘촘해지고 있었고, 호패법(戶牌法)과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같은 감시망은 그들을 한곳에 묶어두려 했다. 그들은 타협해야 했다. 완전히 정착하지도, 완전히 떠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삶. 그들은 마을과 마을 사이, 성곽 밖, 혹은 다리 밑과 같은 ‘경계의 땅’에 자신들만의 게토(Ghetto)를 짓고 모여 살기 시작했다.

2. 도한(屠漢): 생존을 위한 칼부림

농사를 짓지 않는 그들이 먹고살 길은 예나 지금이나 그들의 ‘피’ 속에 흐르는 기술뿐이었다. 바로 도축(屠畜)과 사냥(射獵)이었다.

그들의 조상은 북방의 초원을 달리던 유목민이었다. 움직이는 표적을 정확히 맞히는 활솜씨와, 거대한 가축을 순식간에 제압하여 가죽을 벗기고 뼈와 살을 바르는 기술은 그들의 유전자 속에 각인된 생존 본능이었다. 농경 민족인 조선의 일반 백성들에게 소는 ‘농사짓는 식구’였기에 감히 죽일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이방인의 피가 흐르는 그들에게 소는 ‘고기와 가죽을 주는 자원’이었다.

수요는 은밀하고도 확실했다. 겉으로는 살생을 금하고 육식을 자제하라 가르치는 유교 사회였지만, 양반들의 잔칫상과 제사상에는 반드시 고기가 올라가야 했다. 누군가는 피를 묻혀야 했고, 그 ‘더러운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은 오직 그들뿐이었다.

그들은 칼을 갈았다. 소의 숨통을 단번에 끊고, 가죽에 흠집 하나 내지 않으면서 벗겨내고, 부위별로 고기를 해체하는 그들의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사람들은 그 기술을 천시하면서도, 고기 맛을 보기 위해 그들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들은 평범한 농민을 뜻하던 ‘백정’이라는 이름을 완전히 빼앗아 버렸다. 대신 세상은 그들을 ‘도한(屠漢)’, 즉 ‘짐승 잡는 놈’이라 부르며 손가락질했다.

3. 버들고리의 슬픔: 유기장(柳器匠)

칼을 쓰지 않는 시간에는 버드나무를 만졌다. 물가에 주로 거주했던 그들에게 버드나무는 가장 구하기 쉬운 재료였다. 그들은 버들가지를 껍질 벗겨 바구니(고리)를 엮었다. 이를 ‘유기(柳器)’라 불렀다.

가볍고 질긴 버들고리는 농가에서 곡식을 담거나 옷을 보관하는 데 필수품이었다. 그들은 직접 만든 고리를 들고 마을을 돌며 곡식과 맞바꾸거나 돈을 벌었다. 하지만 이 또한 천대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만든 물건은 썼지만, 그들과 눈을 마주치거나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다.

“백정 놈이 만든 고리짝 같다.” 질기고 억척스러운 것을 비꼬는 이 말속에는,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던 그들의 고단한 삶이 투영되어 있다. 남자들이 도축과 유기 제조에 매달릴 때, 여자들은 머리에 고리를 이고 행상을 다니거나, 때로는 춤과 노래를 팔고 매춘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그들의 삶은 처절한 ‘생존 투쟁’ 그 자체였다.

4. 섞이지 못하는 섬, 특수부락

조선 중기를 지나며 그들의 거주지는 ‘특수부락’이라는 형태로 고착화되었다. 일반 양민들의 마을과는 떨어진 곳,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곳, 혹은 험한 지형에 그들끼리 모여 살았다.

그곳은 조선 사회 안에 존재하지만 조선의 법이 통하지 않는 ‘이방 지대’였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규율을 가지고 우두머리를 뽑았으며, 관아의 간섭을 피해 독자적인 질서를 유지했다. 양반들조차 그들의 마을에 들어가는 것을 꺼렸다. 그곳은 범죄자의 도피처가 되기도 했고, 역병의 온상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그들은 철저히 고립되었다. 일반 백성들과의 통혼(通婚)은 금기시되었고, 그들끼리만 결혼하는 ‘내혼제(內婚制)’가 굳어졌다. 한번 백정으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아니 자자손손 백정으로 살아야 하는 굴레가 씌워진 것이다.

5. 필요악(必要惡)이 된 사람들

조선 사회는 그들을 혐오했으나, 그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들이 없으면 제사상에 올릴 고기를 구할 수 없었고, 군대가 쓸 가죽 과녁과 화살통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결코 겉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필요악’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이 모순적인 지위를 이용하기도 했다. 도축 기술을 독점함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취했고, 때로는 권력 있는 양반들과 결탁하여 뒤를 봐달라고 청탁하기도 했다. 멸시받으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 가장 낮은 곳에 있으면서도 양반들의 가장 내밀한 욕망(식욕)을 쥐고 흔드는 존재.

이 기묘한 긴장 관계는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한양이 거대 상업 도시로 변모하고 고기 수요가 폭발하자, 도성 안의 도축을 담당하던 또 다른 세력이 시장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그들은 시골 마을의 백정이 아니었다. 성균관이라는 막강한 권력 기관을 등에 업고 한양의 고기 상권을 장악한 ‘현방(懸房)’의 주인들. 이제 우리는 억눌린 백정과는 달리, 특권을 무기로 자본과 권력을 거머쥐었던 한양의 도축 집단, ‘반인(泮人)’을 만나러 갈 차례다.

제2부. 성균관의 그림자: 한양의 푸줏간, 현방(懸房)

2.1. 공자님과 소고기

: 성균관 유생들의 식비와 제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성균관 노비인 '반인(泮人)'에게 소고기 독점 판매권을 준 국가의 아이러니

1. 가장 거룩한 곳에서 나는 피 냄새

조선의 한양, 그중에서도 동북쪽 숭교방(崇敎坊) 일대는 나라에서 가장 신성하고 엄숙한 기운이 감도는 곳이었다. 바로 조선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이자, 공자(孔子)의 위패를 모신 성소(聖所), 성균관(成均館)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매일 아침 조선의 미래를 짊어질 유생들이 의관을 정제하고 경전을 읽는 낭랑한 소리가 담장을 넘었다. 그곳은 '인(仁)'과 '예(禮)'가 숨 쉬는 도덕의 성채였다.

그러나 그 거룩한 담장 바로 바깥, 성균관을 에워싸고 있는 마을인 반촌(泮村)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새벽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 반촌의 골목은 짐승의 비명과 뼈를 가르는 둔탁한 소리로 깨어났다.

"쩍, 쩌억."

도끼가 소의 갈비뼈를 내리치는 소리, 시뻘건 선지(피)가 바닥에 튀는 소리, 그리고 고기를 삶아내는 누린내가 진동했다. 글 읽는 소리와 소 잡는 소리의 기묘한 불협화음. 이것이 조선의 지성을 상징하는 성균관의 두 얼굴이었다.

도덕 군자들이 모인 곳에서 살생(殺生)이라니, 얼핏 보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경(不敬)처럼 보인다. 맹자(孟子)는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한다(君子遠庖廚)"라고 하지 않았던가. 살아있는 생명이 죽어가는 참혹함을 차마 보지 못하는 것이 군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가르쳤던 유교 국가에서, 하필이면 공자님의 사당 옆에서 소를 잡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이 '피 냄새'를 허락한 주체는 다름 아닌 국가(조정)였다.

2. 가난한 성균관과 '자급자족'의 딜레마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고, 성균관 유생들을 우대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의무였다. 조정은 유생들에게 학비는 물론 기숙사비, 식비, 지필묵까지 모든 것을 무료로 제공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왕실의 재정은 늘 빠듯했고, 수백 명에 달하는 유생과 관원, 그리고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들의 입을 모두 나랏돈으로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국가 재정이 파탄 나자, 성균관의 곳간도 비어갔다. 유생들의 밥상에 올라갈 반찬이 부실해지고, 공자에게 바치는 제사상(석전대제)마저 위태로워졌다.

이때 조정이 내놓은 고육지책은 실로 파격적이었다.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 즉 '반인(泮人)'들에게 한양 도성 안에서 쇠고기를 독점적으로 팔 수 있는 권리, '현방(懸房)' 운영권을 내준 것이다.

"너희가 소를 잡아 고기를 팔아라. 그 이익으로 유생들을 먹여 살리고, 제사를 지내며, 너희들의 생계도 해결하라.“

이것은 일종의 거대한 '비즈니스 계약'이었다. 국가는 재정 부담을 덜고, 반인들은 막대한 이권(특권)을 얻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유생들은 안정적으로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조선의 도덕 정치(성리학)가 가장 천시하던 상업, 그중에서도 가장 멸시하던 도축업(살생)의 돈으로 지탱되는 아이러니한 구조가 완성된 것이다.

3. 반인(泮人): 우리는 백정이 아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존재는 바로 칼을 쥔 사람들, '반인(泮人)'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흔히 소를 잡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백정'과 동일시하기 쉽지만, 그들은 백정과는 태생부터 달랐다. 백정이 유목민이나 유랑민 출신으로 성 밖을 떠돌던 '뿌리 없는 천민'이었다면, 반인은 고려 말 성균관이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겨올 때 함께 이주해 온, 성균관의 역사와 함께해 온 '소속감 있는 노비'들이었다.

그들은 성균관 담장 밖, 반촌(泮村)이라는 그들만의 행정구역에 모여 살았다. 그들의 주인은 개인이 아닌 '성균관(국가)'이었고, 그들이 모시는 상전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인 유생들이었다. 반인들은 유생들의 수발을 들고, 심부름을 하고, 때로는 유생들이 벌이는 시위(권당)에 동원되기도 했다.

반인들에게는 자부심이 있었다. "우리는 공자님의 식구다." 그들은 도성 밖의 백정들을 '신백정(新白丁)'이라 부르며 하대했고, 자신들과 철저히 구별 지었다. 백정이 도성 안으로 들어와 고기를 파는 것을 '도둑질(잠매)'로 규정하여 가차 없이 응징했던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4. 현방(懸房): 고기를 매달아 놓은 방

반인들이 운영했던 정육점, '현방(懸房)'은 문자 그대로 '고기를 갈고리에 매달아(懸) 놓고 파는 가게(房)'라는 뜻이다. 우리말로는 '다림방'이라고도 불렸다.

이 현방은 단순한 가게가 아니었다. 18세기 무렵 한양 도성 안팎에는 약 20여 곳의 현방이 있었는데, 이곳들은 한양 시민들이 합법적으로 소고기를 살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오늘날로 치면 서울 시내의 대형 마트 독점권을 특정 집단에게 몰아준 셈이다.

현방은 막대한 현금을 만지는 창구였다. 한양이 상업 도시로 변모하고 고기 수요가 폭발하면서 현방의 수익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반인들은 이 돈 중 일부를 매달 성균관에 '속대(贖代)' 혹은 '속전(贖錢)'이라는 명목의 세금으로 바쳤다. 이 속전은 성균관 재정의 핵심이 되었다.

유생들이 밤새워 글을 읽을 때 켜는 등잔의 기름, 그들이 먹는 국밥의 고기, 심지어 그들이 입는 유복(儒服)의 실밥 하나하나에 반인들이 소의 내장을 가르고 피를 씻어내 번 돈이 스며들어 있었다.

5. 공자님 밥상의 비밀

성균관 식당에서는 매일 소고기국이 끓었다. 유생들에게 제공되는 식사는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국가가 인재를 양성한다는 상징적인 의식(알성시)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 고깃국을 목으로 넘기는 유생들의 마음은 편안했을까? 그들은 알았을 것이다.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이 고기가, 담장 밖 반촌의 노비들이 피를 뒤집어쓰며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 '천한 노동' 덕분이라는 것을.

그래서일까. 유생들과 반인 사이에는 묘한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반인들은 유생을 하늘처럼 모셨고, 훗날 유생이 과거에 급제하여 고관대작이 되면 그 반인을 찾아가 사례하거나 뒤를 봐주기도 했다. 반촌은 성균관의 치외법권 지역이었기에, 정치적 박해를 받는 유생이나 학자들이 반촌으로 숨어들면 반인들이 목숨을 걸고 그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가장 고귀한 '글(文)'과 가장 비천한 '칼(武)'. 이질적인 두 세계는 '소고기'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의 생존을 의탁하며 기묘하게 얽혀 들어갔다. 이것이 바로 조선 후기, 한양 한복판에서 벌어진 거대 비즈니스의 실체였다.

2.2. 현방(懸房), 한양의 욕망을 걸다

: 도성 안 20여 곳의 현방을 장악한 반인들. 그들은 단순한 노비가 아니라, 한양 상권을 쥐락펴락했던 특권 상인이었다.

1. 붉은 고기가 걸린 방

18세기 조선, 한양의 번화가인 종로(鐘路)나 남대문 밖 칠패 시장을 걷다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기이한 풍경과 마주치게 된다. 가게 앞 처마 밑에 날카로운 쇠갈고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그 갈고리마다 시뻘건 소의 다리나 갈비짝이 덩어리째 걸려 있는 곳. 바로 '현방(懸房)'이다.

'매달 현(懸)'에 '방 방(房)'. 글자 그대로 '고기를 매달아 놓고 파는 가게'라는 뜻이다. 민간에서는 고기를 다리(suspend)는 곳이라 하여 '다림방'이라고도 불렀다.

오늘날의 정육점을 떠올리면 오산이다. 당시 현방은 단순한 가게가 아니라, 한양 사람들의 육식 욕망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거대한 권력 기관이었다. 조선 후기 기록인 『만기요람(萬機要覽)』이나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따르면, 한양 도성 안팎에는 약 23~24개의 현방이 성업 중이었다.

이 20여 개의 점포는 단순한 구멍가게가 아니었다.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등 주요 길목과 인구 밀집 지역을 장악한 채, 수도 한양에서 유통되는 모든 쇠고기의 물동량을 통제하는 '육류 카르텔'의 거점이었다.

2. 노비이자 거상(巨商)이었던 사람들

이 붉은 깃발을 내건 가게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앞서 말했듯 성균관의 노비, '반인(泮人)'들이었다.

하지만 현방에 앉아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노비'의 비굴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두둑한 배짱과 계산 속을 가진 '특권 상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기의 가격을 정하고, 물량을 조절하며 한양의 물가를 쥐락펴락했다.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에 상업 행위는 시전(市廛) 상인들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쇠고기만큼은 예외였다. 국가는 오직 성균관 반인들에게만 도성 안에서 소를 잡고 팔 수 있는 '도사(屠肆) 운영권'을 허락했다. 이를 '현방안(懸房案)'이라 하여, 국가가 공인한 20여 곳의 현방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자가 고기를 파는 것은 엄연한 불법, 즉 '난전(亂廛)'이었다.

반인들은 이 독점권을 무기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들은 천민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웬만한 양반이나 중인 부자들을 능가하는 '신흥 자본가'였다. 그들은 자본력을 바탕으로 고리대금업을 하기도 하고, 별감이나 포교 같은 하급 관리들을 매수하여 자신들의 뒤를 봐주게 했다. 심지어 권세 있는 양반 가문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영업을 방해하는 자들을 제거하기도 했다.

3. 거대한 빨대, 속대(贖代)

그렇다면 국가는 왜 이 천한 노비들에게 이런 엄청난 특혜를 주었을까? 공짜는 없었다. 반인들은 그 특권의 대가로 '속대(贖代)' 혹은 '속전(贖錢)'이라 불리는 막대한 세금을 성균관과 각 관청에 바쳐야 했다.

현방은 사실상 국가 재정의 '파이프라인'이었다. 조선 후기, 국가 재정이 고갈되고 성균관 운영비가 부족해지자, 조정은 반인들에게 현방 운영권을 주는 대신 매달 현금과 고기를 상납받는 구조를 만들었다.

기록에 따르면 현방 한 곳에서 바치는 세금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단순히 성균관뿐만 아니라 형조, 한성부, 포도청 같은 권력 기관(이를 삼법사(三法司)라 한다)들도 현방에 빨대(재정 의존)를 꽂고 있었다. 현방 상인들은 이중 삼중으로 뜯기는 세금을 감당하기 위해 더욱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했다.

이 구조는 일종의 '약탈적 공생'이었다.

국가(성균관/관청): "너희에게 독점권을 줄 테니, 우리에게 운영비를 대라."

반인(현방 주인): "돈을 바칠 테니, 도성 안에서 우리만 고기를 팔게 해 달라."

결국 그 부담은 고스란히 고기를 사 먹는 한양 백성들에게 전가되었다. 현방의 고기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독점 상인인 반인들의 횡포는 날로 심해졌다.

4. "감히 누가 내 구역에서 고기를 파느냐"

특권은 필연적으로 배타성을 띤다. 반인들은 자신들의 구역(나와바리)을 지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가장 큰 적은 도성 밖에서 몰래 고기를 들여와 파는 '사도(私屠, 사사로이 도축함)' 세력, 즉 일반 백정들이었다. 반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이들을 감시했다. 만약 도성 안이나 성저십리(도성 밖 10리) 근처에서 몰래 소를 잡거나 고기를 파는 백정이 발각되면, 반인들은 관아에 신고하는 것을 넘어 직접 그들을 잡아다가 사형(私刑)을 가하거나 고기를 압수했다. 이를 '난전착고권(亂廛捉告權)'이라 불렀다.

"우리는 나라에서 허락받은 성균관 식구이고, 너희는 근본 없는 백정 놈들이다."

반인들은 같은 천민 계급인 백정들을 철저히 짓밟으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했다. 또한, 제사용 고기를 납품하던 봉상시(奉常寺)의 공인(貢人)들이 남는 고기를 몰래 팔려고 할 때도, 현방 상인들은 "상권을 침해한다"며 강력하게 항의하고 고발했다.

한양의 고기 시장은 총성 없는 전쟁터였다. 그리고 그 전쟁의 승리자는 언제나 국가 권력을 등에 업은 현방, 그리고 그 주인인 반인들이었다.

5. 욕망의 대리인

현방은 한양이라는 도시의 욕망이 집결된 공간이었다.

양반들은 체면 때문에 직접 푸줏간에 가지 않고 하인들을 시켜 현방에서 가장 좋은 부위를 사 오게 했다. 중인과 서민들은 푼돈을 모아 현방 앞을 서성이며 국거리 한 근을 흥정했다.

현방 주인인 반인들은 그 모든 욕망을 저울에 달아 팔았다. 그들은 고기를 썰어주며 양반의 위선적인 식욕을 비웃었고, 돈 없는 서민들에게는 야박하게 굴며 부를 쌓았다.

그들은 단순한 도축업자가 아니었다. 조선 후기, 자본주의의 싹이 트던 한양의 한복판에서, 가장 천한 신분으로 가장 강력한 현금 동원력을 가졌던 '괴물 상인'들의 탄생. 현방은 그 모순된 역사의 생생한 증거였다.

이제 이들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특권이 어떻게 부패하고, 결국 어떤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지, 그 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들여다볼 차례다.

2.3. 반인 vs 백정, 그들만의 계급 전쟁

: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 성균관 반인들이 일반 백정(신백정)의 도축을 탄압하고 시장 진입을 막으며 벌인 치열한 이권 다툼

1. 같은 칼, 다른 신분

조선의 신분제라는 피라미드에서 가장 밑바닥을 차지한 이들을 꼽으라면 누구나 주저 없이 ‘도축업자’를 떠올릴 것이다. 양반들의 눈에 그들은 똑같이 피를 묻히고 생명을 죽이는, 천하고 불길한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현미경을 대고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외부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견고하고도 살벌한 ‘그들만의 계급’이 존재했다.

바로 성균관 반인(泮人)과 일반 백정(白丁)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이었다.

한양 도성 안, 반촌에 거주하며 현방(懸房)을 운영하던 반인들의 콧대는 하늘을 찔렀다. 그들은 비록 노비 신분이었으나, 당대 최고의 지성인인 성균관 유생들을 모신다는 자부심, 그리고 국가가 공인한 독점 상인이라는 경제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도성 밖의 백정들은 그저 족보도 없이 떠돌며 밀도살이나 일삼는 ‘근본 없는 야만인(신백정)’에 불과했다.

“어디서 감히 천한 백정 놈들이 신성한 도성 안을 기웃거리는가?”

반인들은 백정과 섞이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관속(官屬, 관청에 딸린 하인)’이라 칭하며, 백정들과는 혼인도 하지 않았고 술자리도 같이하지 않았다. 이 오만함의 이면에는 단순한 자존심을 넘어선, 냉혹한 ‘생존 본능’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양이라는 거대한 고기 시장(Market)을 독점하기 위해서는, 경쟁자인 백정들을 ‘격이 다른 존재’로 타자화하고 배제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2. 고양이에게 생선 도둑을 잡게 하다: 난전착고권(亂廛捉告權)

반인들이 백정들을 짓밟을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국가가 쥐여준 ‘난전착고권(亂廛捉告權)’이었다.

조선 조정은 성균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반인들에게 도성 내 쇠고기 판매 독점권을 주었다. 그리고 한 가지 권한을 더 얹어주었으니, 바로 “허가받지 않은 자가 고기를 팔면 너희가 직접 잡아내어 고발하라”는 경찰권(단속권)이었다. 이것은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는 것을 넘어, 고양이에게 ‘생선 도둑을 심판할 칼’까지 쥐여준 셈이었다.

도성 밖의 백정들이 몰래 소를 잡아 한양 안으로 들여와 파는 행위를 ‘사도(私屠)’ 혹은 ‘잠매(潛賣)’라 했다. 반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이들을 사냥했다. 그들은 현방의 일을 보다가도,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즉시 ‘단속반’으로 돌변했다.

만약 백정이 고기 짐을 지고 몰래 성문을 통과하다가 반인들에게 걸리면 그날은 초주검이 되는 날이었다. 반인들은 백정의 멱살을 잡고 관아(형조나 한성부)로 끌고 가는 것은 예사였고, 그 자리에서 고기를 몽땅 압수하고 몽둥이질을 가하기도 했다. 법적으로는 관아에 고발해야 했지만, 현장에서는 공공연한 사형(私刑)이 횡행했다. 백정들에게 반인은 포도대장보다 더 무서운, 피도 눈물도 없는 저승사자였다.

3. 뺏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숨바꼭질

하지만 백정들도 호락호락 굶어 죽을 수는 없었다. 한양은 거대한 소비의 용광로였고, 18세기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는 끊임없이 고기를 원했다. 현방의 고기는 독점으로 인해 가격이 비쌌고, 때로는 물량이 부족했다. 가난한 서민들과 중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백정들이 몰래 파는 값싼 고기, 즉 ‘사도육(私屠肉)’을 찾았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따르는 법. 백정들은 반인들의 감시망을 뚫기 위해 기상천외한 ‘밀수 작전’을 펼쳤다.

어둠의 경로: 반인들의 눈이 시퍼런 사대문(四大門)을 피해, 그들은 야밤을 틈타 수구(水口, 물이 빠지는 길)나 성벽의 허물어진 틈(개구멍)으로 고기를 밀어 넣었다.

변장의 기술: 고기 짐을 거적이나 똥지게로 위장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때로는 상복을 입은 상제(喪制)로 변장해 곡을 하며 검문소를 통과하기도 했다.

권력의 뒷배: 가장 대담한 수법은 권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힘 있는 세도가나 궁가(宮家)의 하인들과 결탁하여, “이것은 대감마님 댁 제사에 쓸 고기다! 감히 누가 막느냐!”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당당하게 정문을 통과했다. 물론 그 고기의 절반은 대감 댁으로, 나머지 절반은 암시장으로 흘러들어갔다.

한양의 밤거리와 새벽시장에서는 고기 덩어리를 뺏으려는 반인들과 지키려는 백정들 사이에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그것은 생존을 건, 그들만의 치열한 전쟁이었다.

4. 속대(贖代)의 굴레: 왜 그들은 악귀가 되었나?

반인들이 이토록 악착같이, 때로는 악귀처럼 백정을 탄압했던 이유는 단 하나, ‘속대(贖代)’라는 세금 때문이었다.

현방은 매달 정해진 날짜에 성균관과 각 관청에 막대한 현금을 상납해야 했다. 장사가 잘 되든 안 되든, 소가 병들어 죽든 말든, 국가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속대를 채우지 못하면 반인들은 관아에 끌려가 볼기를 맞거나 옥살이를 해야 했다.

반인들에게 백정은 단순한 경쟁자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도둑’이자 ‘원수’였다. 백정들이 싼 고기를 많이 팔수록 현방의 매출은 떨어지고, 세금을 낼 돈은 부족해진다. 내가 맞지 않으려면 남을 때려잡아야 했다.

“저놈들을 잡지 못하면 우리가 죽는다.”

세금의 공포는 반인들을 더욱 잔혹한 감시자로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 더 약한 자들의 숨통을 조여야 했다. 억압받는 천민(반인)이 더 낮은 천민(백정)을 착취하고 린치하는, 이 슬픈 ‘을(乙)들의 전쟁’은 조선 사회의 모순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비극이었다.

5. 승자 없는 전쟁터

이 치열한 싸움의 끝은 어땠을까? 겉으로는 공권력을 가진 반인들의 승리처럼 보였다. 그들은 수시로 백정들을 잡아 가두고 고기를 빼앗았다. 하지만 그것은 상처뿐인 승리였다.

반인들은 독점권을 지키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뇌물을 관아에 바쳐야 했고, 백정들은 생존을 위해 더욱 깊은 음지로 숨어들며 결코 밀도살을 멈추지 않았다. 고기 가격은 춤을 췄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한양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반인이나 백정이나, 결국은 양반들 배만 불려주는 사냥개일 뿐이지.”

누군가의 탄식처럼, 그들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칼을 겨눴지만, 정작 그 칼을 쥐여주고 싸움을 붙여 이득을 챙긴 진짜 주인—국가와 양반—은 뒷짐을 지고 구경만 할 뿐이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벌어진 이 피 튀기는 전쟁은, 조선이라는 사회가 약자들을 어떻게 통제하고 착취했는지를 보여주는 서글픈 자화상이다.

2.4. 속대(贖代)의 굴레: 특권의 대가는 가혹했다

: 매달 막대한 세금을 성균관에 바쳐야 했던 반인들의 고뇌와, 이를 채우기 위해 자행된 병든 소 도축과 강매의 폐단

1. 특권이라는 이름의 빚

"현방의 주인은 앉아서 돈방석에 앉는다." 세상 사람들은 반인을 부러워하며 수군거렸다. 하지만 정작 현방의 장부(帳簿)를 쥐고 있는 반인들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을 옥죄는 것은 바로 국가에 바쳐야 하는 세금, ‘속대(贖代)’였다.

속대란 문자 그대로 ‘죄를 씻기 위해 바치는 돈(속죄금)’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천민인 그들이 신성한 도성 안에서 살생을 업으로 삼고 상행위를 하는 것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바치는 ‘상납금’이었다.

문제는 그 액수였다. 현방은 매달 정해진 날짜에 어김없이 성균관에 현금과 고기를 상납해야 했다. 여기에 더해 형조(刑曹), 한성부(漢城府), 포도청(捕盜廳) 등 이른바 ‘삼법사(三法司)’들도 현방에 숟가락을 얹고 있었다. 범죄자를 잡고 치안을 유지해야 할 권력 기관들이, 도축업자들에게서 나오는 눈먼 돈(속전)을 운영비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현방 한 곳에서 감당해야 할 상납처는 이처럼 이중 삼중으로 얽혀 있었다. 장사가 잘 되는 달이나 안 되는 달이나, 상납금은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시간이 갈수록 관청의 요구는 늘어만 갔다. 현방 주인들에게 매달 돌아오는 상납일은 저승사자가 문을 두드리는 날과 같았다.

2. 매 맞지 않으려면 돈을 만들어라

만약 정해진 날짜에 속대를 채우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관청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속대를 체납한 현방 주인은 즉시 관아로 끌려가 볼기를 맞거나(형장), 옥에 갇혔다. 심지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풀려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현방 주인은 자신의 살을 찢기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현금을 만들어야 했다.

“소를 팔아서 안 되면, 사람을 팔아서라도 채워라.”

정상적인 장사로는 감당할 수 없는 세금. 이 구조적인 모순은 필연적으로 현방을 불법과 편법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 그들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살아남기 위해’ 악마와 손을 잡기 시작했다.

3. 병든 소의 비명: 역우(疫牛)의 유혹

세금을 메꾸기 위해 반인들이 선택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원가 절감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병든 소(疫牛)’가 있었다.

멀쩡하고 건강한 소는 비쌌다. 하지만 병에 걸려 죽어가는 소나, 막 숨이 끊어진 소는 헐값에 살 수 있었다. 원칙적으로 병든 소는 도축이 금지되어 있었고, 땅에 묻어야 했다. 하지만 빚 독촉에 시달리는 반인들에게 윤리 따위는 사치였다.

그들은 밤중에 몰래 병든 소를 들여왔다.“어차피 껍질 벗기고 삶아내면 양반님네들은 모른다.”

그들은 병든 부위를 도려내고, 고기의 색깔을 감추기 위해 핏물을 섞거나 양념을 했다. 심지어 물을 먹여 무게를 늘리는 수법(주수도축)도 서슴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현방에서 파는 고기 중에 병든 소가 섞여 있어, 이를 먹고 탈이 나는 백성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한양의 화려한 고기 파티 뒤에는, 헐떡이며 죽어간 병든 소의 신음과 그것을 알고도 칼을 댈 수밖에 없었던 반인들의 도덕적 타락이 숨겨져 있었다.

4. 강매(强賣): "안 사면 혼난다"

원가를 낮추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들은 매출을 늘리기 위해 ‘강매’라는 폭력을 휘둘렀다.

현방은 독점 상인이었다. 그들은 고기가 필요 없는 사람들에게도 억지로 고기를 떠넘겼다. 특히 힘없는 하급 관리나 작은 상인들이 타겟이었다.“이번 달 우리 현방의 할당량이니 무조건 사가시오.”

고기 가격도 부르는 게 값이었다. 명절이나 제사철이 다가오면 그들은 담합하여 고기 값을 천정부지로 올렸다. 비싸다고 항의하는 손님에게는 “그럼 사지 마라, 딴 데 가서 살 곳이 있나 보자”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더 악랄한 것은 ‘분배’라는 명목의 강매였다. 성균관이나 관청에 고기를 납품할 때, 정해진 양보다 더 많은 고기를 억지로 밀어 넣고 그 값을 쳐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물론 그 고기의 품질은 형편없었다.

5. 피해자와 가해자의 굴레

결국 이 모든 고통의 종착지는 한양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독점 상인인 반인들에게 비싼 값을 치르고도, 병들고 질 나쁜 고기를 먹어야 했다.

하지만 손가락질받는 반인들의 삶 또한 지옥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낮에는 거만한 독점 상인으로 행세했지만, 밤에는 빚장부를 껴안고 한숨을 쉬었다. 19세기 기록인 『현방고』에는 빚을 감당하지 못해 야반도주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현방 주인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국가는 그들에게 ‘특권’이라는 달콤한 사탕을 주었지만, 그 사탕 안에는 ‘속대’라는 맹독이 들어 있었다.

반인은 가해자였는가, 피해자였는가? 그들은 분명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악덕 상인이었지만, 동시에 국가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뜯어먹히는 가장 밑바닥의 먹잇감이기도 했다.

성균관의 담장 아래, 현방의 붉은 등불은 욕망과 착취가 뒤엉켜 타오르는 조선 사회의 가장 뜨겁고도 슬픈 불꽃이었다.

제3부. 각성: 저울처럼 평등하라

3.1. 붉은 점의 낙인

: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호적에 찍힌 붉은 점과 '도한'이라는 멸시는 사라지지 않았다.

1. 1894년, 종이 위의 해방

1894년(고종 31년), 조선 팔도에 천지개벽할 소식이 전해졌다. 갑오개혁(甲午改革). 조정은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하며, 공노비와 사노비 제도를 모두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수백 년간 조선 사회를 짓눌러온 신분제의 족쇄가 법적으로 풀리는 순간이었다.

가장 밑바닥에서 숨죽여 살던 백정들에게도 이 소식은 복음(福音)과 같았다. "이제 우리도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을 수 있다." "내 자식은 더 이상 '백정의 자식'이 아니다."

그들은 평생 머리에 쓰고 다니던 패랭이(천민이 쓰는 모자)를 벗어던지고, 상투를 틀었다. 꼬깃꼬깃 모아둔 돈으로 양반들이나 입던 흰 도포를 사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겉모습만 보면 누가 양반이고 누가 백정인지 구별할 수 없는 세상이 온 것만 같았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을 '대한제국의 신민(臣民)'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라는 법을 바꿨지만, 사람들의 눈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2. 붉은 점(赤點):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

1896년, 정부는 근대적인 호구 조사를 실시하며 새로운 호적(戶籍) 제도를 도입했다. 신분란이 사라지고 누구나 직업과 주소를 적는 평등한 장부처럼 보였다. 하지만 행정 편의라는 명목 아래, 백정들의 호적에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표식이 남겨졌다.

담당 관리들은 백정 출신들의 이름 위에 붓으로 붉은 점(赤點)을 찍거나, 직업란에 ‘도한(屠漢)’ 혹은 ‘도(屠)’라는 글자를 큼지막하게 써넣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아예 별도의 장부(별책)를 만들어 그들만 따로 관리하기도 했다.

“신분은 없애되, 관리는 해야 한다.”이것이 관리들의 변명이었다. 이 붉은 점은 단순한 잉크 자국이 아니었다. “너는 영원히 백정이다”라고 낙인을 찍는 현대판 주홍글씨였다.

이 낙인의 위력은 강력했다. 백정의 자식이 학교에 입학하려 호적 등본을 떼어가면, 학교 측은 이름 위의 붉은 점을 보고 입학을 거부했다. 관청에 민원을 넣으러 가도, 호적을 본 관리의 눈빛이 순식간에 경멸로 바뀌었다. 법적으로는 평민이었으나, 행정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관리 대상’이자 ‘위험분자’였다.

3. 갓 쓴 백정, 매 맞는 평등

법적인 낙인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이웃들의 노골적인 적개심이었다. 일반 평민(양민)들은 자신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백정들을 참을 수 없어 했다.

“어디 천한 것들이 감히 상투를 틀어?”

거리에서 갓을 쓴 백정이 지나가면 양반과 평민들이 달려들어 갓을 찢고 매질을 하는 ‘린치(Linch)’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어떤 지역에서는 “백정은 갓 끈을 검은색이 아닌 짚으로 꼬아 매라”거나 “길을 걸을 때 고개를 들지 말라”는 사적인 규율을 강요하기도 했다.

심지어 식당이나 주막에서도 백정은 밥상머리에 앉을 수 없었다. 돈을 내도 밥을 땅바닥이나 마루 밑에서 먹어야 했고, 술잔을 받을 때도 두 손이 아닌 한 손으로 받으면 “버르장머리 없다”며 뺨을 맞았다.

갑오개혁은 그들에게 ‘자유’를 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혐오받는 존재인지를 확인시켜 주는 ‘거울’이 되고 말았다.

4. "도한(屠漢) 놈"이라는 멸시

조선시대를 관통해온 ‘도한(屠漢)’이라는 멸칭은 근대에 들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사람들은 점잖은 자리에서는 ‘도살업자’라고 불렀지만, 뒤에서는 여전히 “에이, 저 도한 놈”이라며 침을 뱉었다.

‘놈 한(漢)’ 자가 붙은 이 단어에는 인간 이하의 짐승 취급을 하는 혐오가 담겨 있었다. 백정들은 장터에서 고기를 팔 때도 손님에게 굽신거려야 했다. 나이 어린 아이가 와서 “야, 고기 한 근 다오”라고 반말을 해도, 머리 희끗한 백정 노인은 “예, 도련님 여기 있습니다”라고 존댓말을 써야 했다.

고기는 모두가 탐내는 귀한 음식이었지만, 그 고기를 다루는 사람은 여전히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었다. 근대적 위생 관념이 도입되면서 도축장이 정비되고 산업화가 진행되었지만, 도축 노동자에 대한 인식은 위생복을 입은 ‘더러운 존재’에 머물러 있었다.

5. 폭발 직전의 침묵

“나라가 평등해졌다는데, 왜 내 삶은 지옥 그대로인가?”

1900년대 초반, 백정들의 사회에는 깊은 절망과 함께 뜨거운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깨달았다. 임금님이 내려주는 법이나 관리들이 써주는 문서 따위가 자신들을 구원해 줄 수 없음을.

그들은 이제 남이 씌워준 멍에를 스스로 벗어던지기 위해 뭉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쫓겨난 아이들을 위해 야학(夜學)을 세우고, 교회에 나가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설교에 눈물을 흘렸다.

붉은 점으로 찍힌 낙인이 역설적으로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이 된 것이다. 호적 위의 붉은 점은 수치심의 상처였지만, 곧 타오를 저항의 불씨가 되고 있었다. 바야흐로 1923년, 진주에서 터져 나올 거대한 함성, 형평사(衡平社) 운동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

3.2. 형평(衡平)을 외치다

: 1923년 진주 형평사 운동.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다." 백정도 사람임을 선언한 한국 최초의 인권 운동.

1. 진주(晋州), 차별과 저항의 도시

1923년 4월의 봄, 경상남도 진주는 묘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진주는 예로부터 '북평양 남진주'라 불릴 만큼 기생 문화와 풍류가 발달한 곳이었지만,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가장 혹독한 신분 차별이 도사리고 있었다. 진주는 백정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고, 그만큼 일반인들의 멸시와 횡포도 극심했다.

백정의 자식은 학교에 입학 원서를 내는 것조차 거부당했고, 백정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비단옷을 입거나 기와집에 살 수 없었다. 나라가 망하고 세상이 개화되었다고 했지만, 진주의 백정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억압이 강할수록 튀어 오르는 반발력도 강한 법. 진주의 깨어 있는 지식인들과 백정 지도자들은 은밀하게, 그러나 뜨겁게 뭉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침묵의 카르텔을 깨뜨릴 거대한 파도가 진주 남강변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2. 1923년 4월 25일, 역사가 뒤집힌 날

1923년 4월 25일, 진주 시내의 한 극장(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강당이라는 설도 있음)에 수십 명의 사내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옷차림은 남루했으나 눈빛만은 형형했다. 그들은 평생 '소 잡는 놈', '도한'이라 불리며 고개를 숙이고 살아야 했던 이 땅의 백정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곁에는 신분 차별 철폐에 뜻을 같이하는 양반 출신의 지식인 강상호(姜相鎬), 신현수(申鉉壽) 등이 함께했다.

이날 그들은 단체를 결성하고 그 이름을 '형평사(衡平社)'라 지었다."저울(衡)처럼 평등(平)하라."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저울처럼, 귀한 사람도 천한 사람도 없이 모두가 똑같은 무게를 지닌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이익 단체의 결성이 아니었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던 천민들이 스스로의 존엄을 선언하고 일어선 '최초의 근대적 인권 운동'의 시작이었다.

3.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그날 낭독된 형평사 주지(취지문)는 오늘날 읽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명문(名文)이다.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愛情)은 인류의 본령(本領)이다. ... 우리도 참다운 인간으로서 살려는 것이 본사(本社)의 취지이다. ... 멸시와 천대를 받는 백정들이여! 과거를 회상하면 종일토록 통곡하고 피를 토해도 부족할 것이다. 비천하고 빈궁하고 약하여 천시되고 스스로 굴하였던 자는 누구였던가? 아! 그것은 우리 백정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외쳤다. 계급을 타파하라.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라. 교육을 장려하라. 그리고 우리도 참다운 인간으로 대접하라.그것은 600년 묵은 한(恨)의 토로이자,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 살겠다는 피 끓는 절규였다.

4. "백정도 사람이다!" 갓을 찢는 자들과 맞서다

형평사의 외침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진주에서 시작된 불길은 서울, 부산, 대구 등지로 번져 1년 만에 전국에 80여 개의 지사가 생겨났고, 회원은 수만 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교회에 나가고, 당당하게 관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하지만 세상의 벽은 여전히 높고 단단했다. 형평사 운동이 확산되자, 이에 반발하는 일반 농민과 보수적인 양반들의 저항(반형평 운동)도 거세졌다. "백정 놈들이 맞먹으려 든다.""짐승에게 인권이 어디 있느냐."

그들은 형평사 창립 행사장이나 야학에 난입하여 몽둥이를 휘두르고, 백정들이 쓴 갓을 찢어버렸다. 어떤 지역에서는 형평사원들을 마을에서 쫓아내거나 집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를 '형평사 습격 사건'이라 부른다.

하지만 백정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맞으면서도 구호를 외쳤고, 피를 흘리면서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학교 정문을 두드렸다. 그들에게 형평사는 단순한 단체가 아니라, 자신들을 지켜주는 유일한 울타리이자 희망의 등대였기 때문이다.

5. 끝나지 않은 울림

형평사 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내부 분열,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1930년대 후반 들어 점차 쇠퇴해 갔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형평사는 한국 사회에 '인권(Human Rights)'이라는 씨앗을 처음으로 뿌렸다. 신분이나 출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상. 그것은 훗날 노동 운동, 농민 운동, 그리고 현대의 인권 운동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뿌리가 되었다.

진주 형평사 운동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우리 사회의 저울은 평평한가? 우리는 또 다른 백정을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100년 전 진주에서 울려 퍼진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라는 외침은, 차별과 혐오가 여전한 21세기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고 묵직한 숙제다.

3.3. 신분을 넘어서: 교회로 간 백정

: 박성춘 장로 이야기. 종교를 통해 신분의 벽을 넘고, 아들을 최초의 서양 의사로 키워낸 기적 같은 이야기.

1.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1890년대, 구한말의 조선은 혼란스러웠다. 신분제는 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귀한 자와 천한 자의 구분이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었다.

백정들은 거리에서 매를 맞았고, 호적에는 붉은 점이 찍혔다. 세상 어디에도 그들을 '사람' 대접해 주는 곳은 없었다.

그런데 아주 낯선 곳에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파란 눈을 가진 서양 선교사들이 전하는 '야소교(기독교)'라는 종교였다.

"하나님 앞에서는 양반도 상놈도, 임금도 백정도 모두 똑같은 자녀입니다."

생 짐승 취급을 받던 그들에게 이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의심했다. 조선 천지에 그런 곳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실제로 백정의 마을을 찾아와 그들의 손을 잡고 기도했고, 더러운 상처를 닦아주었다. 조선의 성리학이 그들을 배척할 때, 기독교는 그들을 '형제'라 부르며 품었다.

2. 곤당골의 기적: 무어 선교사와 박성춘

서울 관철동 곤당골(지금의 종로구 관철동)에는 백정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 살던 백정 박성춘(朴成春)은 여느 백정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1894년, 박성춘은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백정이 병에 걸리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거나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때 곤당골에 교회를 세운 미국인 선교사 사무엘 무어(Samuel F. Moore)가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무어 선교사는 당시 고종 황제의 주치의였던 에비슨(Oliver R. Avison)을 데리고 박성춘의 누추한 집을 방문했다. 임금의 몸을 만지는 어의(御醫)가, 천하디천한 백정의 몸에 손을 대고 치료를 시작한 것이다. 박성춘은 자신의 몸에 닿는 의사의 따뜻한 손길에 전율했다.

"나랏님을 고치는 의사가 내 몸을 만지다니... 내가 사람 대접을 받는구나."

기적적으로 병이 나은 박성춘은 그길로 무어 선교사를 따라 곤당골 교회에 나갔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의 입교 소식은 한양 바닥의 백정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우리도 사람 대접해 주는 곳이 있다더라." 수많은 백정이 박성춘을 따라 곤당골 교회로 몰려들었다.

3. 양반들의 반란: "백정과는 같이 못 앉는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도 신분의 벽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당시 곤당골 교회에는 양반 출신 교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백정들이 들어와 자신들과 나란히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어찌 짐승 냄새나는 백정 놈들과 한자리에 앉아 거룩한 예배를 드립니까? 자리를 따로 마련해 주시오."

양반 교인들은 무어 선교사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무어는 단호했다. "하나님의 성전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자리를 나눌 수 없습니다.“

결국 양반 교인들은 교회를 뛰쳐나가 따로 예배당을 차렸다. 교회마저 쪼개질 위기였다. 하지만 박성춘과 백정 교인들은 묵묵히 기도를 이어갔고, 무어 선교사는 끊임없이 양반들을 설득했다. 3년 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따로 나갔던 양반들이 회개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온 것이다.

그들은 백정들의 손을 잡고 사과했고, 다시 하나가 되어 예배를 드렸다. 이 교회가 바로 한국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승동교회(勝洞敎會)다. 승동교회는 훗날 '백정 교회'라는 별명을 영광스럽게 안고, 3.1 운동의 거점이 되는 등 민족 운동의 중심지가 된다.

4.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의 외침

1898년 10월, 서울 종로 거리에서 만민공동회(관민공동회)가 열렸다. 정부 고관과 백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나랏일을 토론하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민중 대회였다.

이 자리에서 수만 명의 군중 앞에 한 연사가 단상에 올랐다. 바로 백정 박성춘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사람들 앞에서 고개조차 들지 못했을 그가, 당당하게 대중을 향해 외쳤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식한 백정입니다. 그러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다 같은 것입니다. ... 차별 없이 합심하여 나라를 위한다면 우리나라도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그의 연설은 구구절절 옳았고 힘이 있었다. 그 자리에 모인 양반, 관리, 학생들은 백정의 연설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백정 놈"이 아니라 "박성춘 씨"로서, 아니 "대한의 국민"으로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1911년, 박성춘은 승동교회의 장로(長老)로 장립되었다. 조선 왕조 500년 역사상 처음으로, 백정이 사회적 존경을 받는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심지어 왕족 출신 교인들도 박성춘 장로를 깍듯이 모셨다고 전해진다.

5. 아들 박서양: 칼 대신 메스(Mess)를 쥐다

박성춘의 꿈은 자신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아들 박서양(朴瑞陽)에게는 결코 백정의 칼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에비슨 선교사의 도움으로 박서양은 제중원 의학교(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에 입학했다. 그는 1908년 제1회 졸업생으로 당당히 의사가 되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면허 의사 7인 중 한 명이 바로 백정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소의 배를 갈라 고기를 얻었지만, 아들은 사람의 배를 갈라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되었다. 박서양은 이후 모교에서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고, 일제강점기에는 간도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병원을 세워 동포들을 치료했다.

"내 아들은 백정이 아니다. 의사다. 그리고 독립군이다."

박성춘과 박서양의 이야기는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가 어떻게 가장 낮은 자들에게 '인간의 존엄'을 일깨워주었는지, 그리고 그 각성이 어떻게 한 가문과 나라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이들의 노력은 훗날 1923년 진주 형평사 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정신적 토양이 되었다.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믿음은 곧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인권 사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제4부. 공간의 이동: 숭인동에서 마장동까지

4.1. 쫓겨나는 칼

: 일제강점기 현저동에서 숭인동(1925년)으로, 해방 후 다시 마장동(1961년)으로. 도시가 팽창할 때마다 외곽으로 밀려난 도축장의 역사.

1. 도시는 피 냄새를 싫어한다

도시는 거대한 포식자다. 매일 수천 마리의 소와 돼지가 도시의 위장 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도시는 그 포만의 결과(고기)는 사랑하되, 과정(도축)은 혐오한다. 우아한 레스토랑의 스테이크는 환영하지만, 그 고기를 만들기 위해 짐승의 목을 따고 피를 흘리는 도축장이 내 집 옆에 있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서울의 도축 역사는 이 ‘밀어내기(Push)’의 역사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몸집을 불려 나갈 때마다, 도축장은 마치 쫓겨나는 이방인처럼 짐을 싸서 더 먼 곳, 더 외진 곳으로 밀려나야 했다. 칼을 쥔 사람들은 도시가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단백질을 공급했지만, 정작 도시의 구성원으로는 환영받지 못했다.

2. 경성의 끝자락, 숭인동 시대를 열다 (1925년)

개화기 이전, 한양의 도축은 현방(懸房)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제가 들어오면서 상황은 변했다. 위생과 통제를 중시했던 일제는 도축을 한곳에 모아 관리하려 했다.

처음 근대식 도축장이 들어선 곳은 1896년경 서대문 밖 천연동(현 서대문구 천연동)과 합동(현 서대문구 합동) 일대였다. 이후 1909년 무렵, 이 시설들이 통합되어 현저동(현 서대문구 현저동)으로 옮겨갔다. 당시 서대문 밖은 한양 도성의 바로 바깥으로, 도시와 가깝지만 성 안은 아닌 ‘경계 지역’이었다.

하지만 경성(서울)의 인구가 늘어나자 현저동조차 도심과 너무 가깝다는 민원이 빗발쳤다. 결국 1925년, 경성부는 도축장을 동대문 밖 숭인동(崇仁洞)으로 이전한다.

당시 숭인동은 청계천 하류가 흐르는 한적한 교외였다. 동대문이라는 거대 상권과 가까우면서도, 주거지와는 적당히 떨어진 곳. 이곳에 경성부립도축장이 들어서고, 1922년에는 가축시장(우시장)까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숭인동은 명실상부한 ‘경성의 푸줏간’이 되었다.

숭인동 시대는 해방 이후까지 약 30여 년간 이어졌다. 전국의 소몰이꾼들이 동대문 밖으로 모여들었고, 이곳에서 잡은 고기가 전차와 우마차에 실려 서울 장안으로 공급되었다.

3. "냄새나서 못 살겠다" 팽창하는 서울, 밀려나는 도축장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서울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전국의 피난민들이 서울로 몰려들었고, 판자촌이 산비탈을 뒤덮었다. 1920년대만 해도 ‘교외’였던 숭인동은 1950년대가 되자 이미 복잡한 ‘도심’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주택가가 숭인동 도축장 턱밑까지 차올랐다. 주민들은 아우성쳤다. “여름이면 피비린내와 가축 분뇨 냄새 때문에 창문을 열 수가 없다.”“소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겠다.”

위생 문제도 심각했다. 낡은 숭인동 시설로는 폭증하는 서울 시민의 고기 수요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도축 폐수는 도시 하천 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되었다.

서울시는 다시 지도를 펴들었다.‘더 동쪽으로. 사람들이 아직 살지 않는 곳으로. 물(하천)이 있어 피를 씻기 좋고, 교통이 편리한 곳.’

그렇게 낙점된 곳이 바로 성동구 마장동(馬場洞)이었다.

4. 갈대밭과 말 목장의 땅, 마장동 (1961년)

마장동. 조선 시대부터 왕실의 말을 기르던 살곶이 목장(箭串牧場)이 있던 곳이다.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저지대라 홍수가 잦았고, 갈대만 무성한 채소밭이 대부분인 허허벌판이었다.

서울시는 이곳이 도축장 부지로 제격이라 판단했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민원 소지가 적고, 넓은 부지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먼저 1958년, 숭인동의 가축시장(우시장)이 마장동으로 옮겨왔다. 소를 사고파는 시장이 먼저 자리를 잡은 것이다.그리고 3년 뒤인 1961년, 마침내 숭인동의 도축장이 마장동에 최신식 시설(서울시립도축장)을 갖추고 문을 열었다.

이때부터 ‘마장동 시대’가 개막되었다. 현저동에서 숭인동으로, 다시 마장동으로. 칼은 도시가 팽창하는 속도에 맞춰 동쪽으로, 더 동쪽으로 쫓겨났다.

5. 격리된 섬, 하지만 가장 뜨거운 심장

1960년대 초반, 마장동 도축장 주변에는 높은 담장이 쳐졌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도축장은 도시 안에 존재하지만, 심리적으로는 도시와 격리된 ‘섬’이었다.

하지만 이 섬은 역설적으로 서울에서 가장 뜨겁게 펄떡이는 심장이었다. 매일 새벽 전국의 소를 실은 트럭들이 마장동으로 집결했고, 도축장에서 갓 잡은 고기는 서울 전역의 정육점과 식당으로 퍼져나갔다. 도축장 주변으로는 부산물(내장, 피, 가죽)을 처리하는 상인들이 모여들었고, 고기를 떼어다 파는 도매상들이 진을 쳤다.

자연스럽게 마장동은 도축(생산)과 유통(판매)이 한곳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육류 클러스터’로 성장했다. 숭인동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해진 이 산업 단지는, 배고픈 시절 서울 시민들에게 기름진 단백질을 공급하는 전초기지였다.

쫓겨나서 도착한 땅, 마장동. 그곳은 혐오 시설이라는 오명을 쓰고 시작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격리성 덕분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생태계를 키울 수 있었다. 백정의 후예들이 현대적인 ‘기술자’와 ‘상인’으로 변모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4.2. 살곶이 목장의 변신

: 조선시대 말을 기르던 땅(마장동)이 수도권 최대의 고기 공급 기지가 된 지리적 운명

1. 말(馬)이 뛰놀던 갈대밭

서울 성동구 마장동(馬場洞). 오늘날 이곳은 골목마다 붉은 정육점 불빛이 켜지고 고소한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 ‘고기의 성지’다. 하지만 시간을 600년 전으로 되돌린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전혀 다른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바로 말(馬)이다.

마장동이라는 이름은 조선 초기부터 이곳에 말을 기르던 양마장(養馬場)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당시 이곳은 ‘살곶이 목장(箭串牧場)’이라 불렸다.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 흐르는 비옥한 삼각주, 무성하게 자란 갈대와 풀밭은 말들을 방목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왕실의 행차에 쓰일 명마(名馬)들이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던 땅.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매사냥을 즐겼고, 세종대왕이 신하들과 함께 말을 사열했던 곳. 마장동은 본래 생동하는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왕가의 기품이 서린 땅이었다.

2. 버려진 땅의 지리적 운명

하지만 근대로 넘어오면서 말발굽 소리는 끊겼고, 마장동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땅이 되었다. 이곳은 지대가 낮아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상습 침수 구역이었다. 농사를 짓기에도 애매하고, 사람이 살기에는 더욱 척박했다. 해방 직후까지도 마장동은 드문드문 채소밭이 있고 무성한 갈대숲이 우거진, 서울의 변두리 중에서도 가장 한적한 곳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버려짐’이 마장동의 운명을 바꾸었다.

1950년대 후반, 서울시는 도심(숭인동) 한복판에 있는 혐오 시설인 도축장과 가축시장을 옮길 대체 부지를 찾고 있었다. 조건은 까다로웠다.

사람이 적을 것: 민원이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물이 많을 것: 도축에 필요한 물을 쉽게 끌어오고, 피와 오물을 씻어낼 하천이 있어야 한다.

교통이 좋을 것: 전국의 소들이 들어오고, 잡은 고기가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마장동은 이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땅이었다. 주민이 거의 없는 허허벌판이었고, 바로 옆에는 청계천과 중랑천이 흘렀다. 게다가 중앙선 철도와 도로망이 인접해 있어 물류 이동에도 유리했다. ‘버려진 습지’라는 지리적 단점이, ‘도축 산업의 최적지’라는 장점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3. 소(牛)의 시대를 열다

1958년 5월, 숭인동에 있던 가축시장(우시장)이 먼저 마장동으로 이사를 왔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수백 마리의 소들이 옛날 말들이 뛰놀던 갈대밭을 가득 메웠다. 소장수들의 흥정 소리와 소들의 울음소리가 뒤섞이며 마장동의 새벽을 깨웠다.

그리고 1961년, 최신식 시설을 갖춘 시립도축장까지 마장동에 들어섰다. 바야흐로 ‘말(馬)의 시대’가 가고 ‘소(牛)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때부터 마장동의 풍경은 급변했다. 도축장이 돌아가기 시작하자, 그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고기와 관련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도축된 소의 내장과 부산물을 받아다 파는 아낙네들, 고기를 떼어다 서울 시내 정육점에 납품하는 중간 도매상들, 그리고 고된 노동을 마친 인부들에게 값싼 해장국을 파는 식당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국가가 계획한 것은 도축장 하나였지만, 그 주변에 피어난 것은 거대한 ‘육류 생태계’였다. 이것은 마장동 축산물 시장의 시작이었다.

4. 핏물 흐르는 개천, 욕망의 하수구

성장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있었다. 1960~70년대, 마장동은 서울 시민들의 단백질 공급원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더럽고 냄새나는 곳’이라는 오명을 동시에 짊어져야 했다.

당시의 정화 시설은 열악했다. 도축장에서 쏟아져 나온 핏물과 오물은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채 인근 하천으로 흘러들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청계천 하류는 붉게 물들었고, 비릿한 피 냄새가 바람을 타고 주택가로 퍼져나갔다.

“마장동에 가면 피 냄새가 난다.” 사람들은 고기는 좋아했지만, 고기를 만드는 마장동은 기피했다. 택시 기사들도 밤에는 마장동 골목에 들어가기를 꺼렸다. 거친 사내들이 칼을 차고 다니는 무서운 동네, 핏물이 고여 있는 진창길. 그것이 개발 독재 시대, 서울의 식탁을 책임지던 마장동의 민낯이었다.

5. 떠난 도축장, 남은 시장

도시의 팽창은 멈추지 않았고, 마장동 역시 또다시 ‘밀려남’의 위기를 맞았다.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학교가 생기면서, 도축장은 다시금 ‘도심 부적격 시설’로 낙인찍혔다. 결국 1998년, 37년 만에 마장동 도축장은 문을 닫았다.

심장은 멈췄다. 사람들은 마장동 시장도 곧 쇠락할 것이라 예언했다. 고기를 공급하던 도축장이 사라졌으니, 시장도 힘을 잃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하지만 마장동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해졌다. 지난 40년간 축적된 유통 네트워크와 상인들의 노하우는 도축장의 부재를 뛰어넘었다. 전국의 도축장에서 잡은 고기들이 여전히 마장동으로 집결했고, 이곳에서 부위별로 해체되고 가공되어 다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과거 왕의 말을 기르던 땅은, 이제 하루 유동인구 수만 명, 연간 거래액 수조 원에 달하는 수도권 최대의 축산물 허브가 되었다. 혐오 시설이었던 도축장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사람들은 ‘발골(發骨)’이라는 기술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며 마장동을 대체 불가능한 ‘장인들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4.3. 피 냄새가 사라진 자리: 마에스트로의 탄생

: 1998년 마장동 도축장은 문을 닫았지만, 남겨진 상인들은 '발골의 기술'과 '신선함'을 무기로 살아남았다. 혐오 시설에서 '맛집 성지'로 거듭난 공간의 재탄생.

1. 1998년, 멈춰버린 심장

1998년의 어느 날, 마장동의 새벽 공기는 여느 때와 달랐다. 37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뿜어져 나오던 하얀 증기가 사라졌다. 소들의 거친 숨소리도, 쇠사슬이 부딪치는 소름 끼치는 금속음도 들리지 않았다. 거대한 철문이 굳게 닫혔다. 서울시립도축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도시의 팽창은 기어이 마장동의 심장을 멈춰 세웠다. 아파트 숲이 마장동을 포위해 오면서, 도축장은 더 이상 도심에 존재해서는 안 될 '혐오 시설'이자 '부적격 시설'로 낙인찍혔다. 서울시는 도축 기능을 수도권 외곽(부천, 안양 등)으로 분산시키고, 마장동의 도축 시설을 폐쇄했다.

상인들은 망연자실했다. 도축장이 없는 축산물 시장이라니. 그것은 앙꼬 없는 찐빵이 아니라, 엔진 없는 자동차와 같았다."이제 마장동은 죽었다.""고기 떼러 누가 여기까지 오겠나? 다들 도축장 따라 외곽으로 가겠지."

사람들은 마장동의 몰락을 예견했다. 숭인동에서 쫓겨날 때처럼, 이번에도 그들은 짐을 싸서 떠나야 할 운명처럼 보였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떠돌이 백정'의 역사가 현대에 와서도 반복되는 듯했다. 거대한 도시 서울은 그들의 노동(고기)은 탐하되, 그들의 존재(시장)는 끊임없이 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예언은 빗나갔다. 도축장이 문을 닫은 지 20여 년이 흐른 지금, 마장동은 쇠락하기는커녕 연간 이용객 200만 명, 수도권 육류 유통의 60~70%를 책임지는 거대한 '육류 제국'으로 건재하다.

무엇이 그들을 떠나지 않게 했을까? 아니, 무엇이 그들을 떠날 수 없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들 손에 쥐어진 칼, 그리고 그 칼끝에서 나오는 '대체 불가능한 기술'이었다.

2. 도축(Slaughter)은 가고, 정형(Butchery)이 남았다

도축장이 사라진 마장동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는 '업(業)'의 재정의였다. 과거의 마장동이 소의 목숨을 끊는 '살생(殺生)'의 공간이었다면, 도축장 폐쇄 이후의 마장동은 죽은 고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해체(解體)'와 '가공'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전국의 산지 도축장에서 잡은 소와 돼지들이 거대한 지육(枝肉, 머리와 내장 등을 제거한 고기 덩어리) 상태로 냉동 탑차에 실려 마장동으로 모여들었다. 새벽 3시, 마장동의 골목은 다시 깨어났다. 이제 그들이 다루는 것은 살아 울부짖는 소가 아니라, 차갑게 식은 거대한 고기 덩어리였다.

이 지육을 뼈와 살로 분리하고, 다시 부위별로 세밀하게 나누는 작업을 '발골(發骨)' 혹은 '정형(整形)'이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칼질이 아니다. 소 한 마리는 약 39개의 대분할 부위와 120여 개의 소분할 부위로 나뉜다. 등심, 안심, 채끝 같은 익숙한 부위부터 제비추리, 토시살, 새우살 같은 특수부위까지. 뼈와 근육의 결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고기의 온전한 맛을 살려낼 수 없다.

마장동 상인들은 이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마에스트로'들이었다. 그들은 칼 하나로 소의 거대한 척추뼈 사이를 유영하듯 가르고, 종잇장처럼 얇은 근막(筋膜)만을 벗겨내어 붉은 속살을 드러냈다.

"고기는 칼 맛이다." 마장동 상인들의 자부심이다. 기계가 아무리 발달해도, 뼈에 붙은 살을 한 점의 로스(Loss, 손실) 없이 발라내는 것은 오직 숙련된 인간의 손끝 감각으로만 가능하다. 도축장은 떠났지만, 전국의 중간 도매상들과 식당 주인들이 여전히 마장동을 찾는 이유는 바로 이 '기술' 때문이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마장동을 거쳐야만 고기가 가장 완벽한 상품(Specs)이 된다는 것을.

3. '스펙(Spec)'을 맞추는 사람들

현대 사회는 까다롭다. 식당마다, 소비자마다 원하는 고기의 모양과 두께, 지방의 비율이 다르다. 어떤 식당은 '지방 두께 3mm 이하의 삼겹살'을 원하고, 어떤 호텔은 '마블링 스코어 9 이상의 꽃등심, 두께 2cm'를 요구한다. 이를 업계 용어로 '스펙(Spec)'이라 한다.

이 까다로운 스펙을 맞춰줄 수 있는 곳은 대한민국에서 마장동이 유일했다. 수십 년간 칼을 잡아온 마장동의 기술자들은 고객이 원하는 대로 고기를 재단(裁斷)해 주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과거 백정들이 멸시받으며 익혔던 기술의 현대적 진화였다. 옛날에는 "천한 것들이 하는 잔인한 짓"이라 손가락질받던 칼질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 안에서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정밀 가공 기술'로 재평가받게 된 것이다.

마장동의 좁은 골목은 거대한 공장이었다. 컨베이어 벨트는 없었지만, 가게마다 걸린 붉은 조명 아래서 수천 명의 기술자들이 묵묵히 칼을 움직였다. 그들의 손을 거치면 투박한 고기 덩어리는 최고급 스테이크용 고기가 되고, 얇게 썬 불고기감이 되고, 정갈한 선물 세트가 되었다. 도축장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은, 바로 이 치열하고도 정교한 '노동의 밀도'였다.

4. 신선함의 속도전: 콜드체인(Cold Chain)의 심장

마장동이 살아남은 또 다른 무기는 '속도'였다. 고기는 시간과 싸우는 상품이다. 도축된 순간부터 부패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마장동은 지리적으로 서울의 동쪽에 치우쳐 있지만, 물류의 관점에서는 수도권의 정중앙이나 다름없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고기가 마장동에 도착하는 시간은 새벽 2~3시. 이곳에서 경매와 발골 과정을 거친 고기는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서울 전역의 식당과 마트, 정육점으로 배송된다. 이른바 '당일 생산, 당일 배송' 시스템이다.

도축장이 외곽으로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유통의 중심축인 도매시장이 마장동에 남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장동 상인들은 자신들만의 강력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산지에서 고기를 실어 나르는 운송업자, 마장동에서 부위별로 나누는 기술자, 그리고 이를 오토바이에 싣고 서울 골목골목을 누비는 배달원까지.

이 거미줄 같은 유통망은 대기업의 물류 시스템조차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마장동만의 저력이었다. 이를 학자들은 '암묵지(暗默知, Tacit Knowledge)'라 부른다. 매뉴얼에는 없지만, 오랜 경험과 신뢰 관계로 얽힌 사람들만이 공유하는 노하우. 그것이 혐오 시설이라는 낙인 속에서도 마장동을 지탱해 온 뿌리였다.

5. 혐오에서 미식(美食)으로: '고기 익는 마을'의 탄생

하지만 기술과 유통만으로는 부족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불어닥친 대형 마트의 성장과 온라인 쇼핑의 등장은 재래시장인 마장동을 위협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 깊이 박힌 '마장동 = 무섭고 지저분한 곳'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것이 급선무였다.

"피 냄새를 지우고, 고기 굽는 냄새를 채우자."

상인들은 변신을 시도했다. 도매 위주의 시장을 소매와 관광이 결합된 형태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그 신호탄이 2011년 설립된 마을기업 '고기 익는 마을'이었다.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노량진 수산시장처럼, 1층 매장에서 싼값에 고기를 사서 3층 식당으로 올라가 상차림 비용만 내고 구워 먹게 하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그 파급력은 엄청났다.

"투플러스(1++) 한우를 삼겹살 가격에 먹을 수 있다더라."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미식가들과 젊은 연인들, 외국인 관광객들이 마장동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정육점 불빛이 으스스하게 느껴지던 골목이, 이제는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한 맛집 골목으로 변모했다.

상인회는 시장의 환경도 뜯어고쳤다. 비가 오면 질척거리던 바닥을 포장하고, 하늘을 가리는 현대식 아케이드(캐노피)를 설치했다. 가게마다 위생복과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고, '정품, 정량, 정찰'을 내세운 3정 운동을 벌였다.

가장 큰 변화는 '개방성'이었다. 과거 마장동은 외부인에게 배타적인 '그들만의 요새'였다면, 이제는 누구나 와서 고기를 구경하고, 상인에게 부위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맛을 즐길 수 있는 '음식 관광지'가 된 것이다. 피 묻은 앞치마를 두른 상인들의 표정도 달라졌다. 그들은 더 이상 혐오 시설의 종사자가 아니라, 최고의 식재료를 제공하는 '푸드 큐레이터'로서 손님을 맞이했다.

6. 백정(白丁)의 역사, 마장동에서 완성되다

마장동의 현대사를 되짚어보는 것은, 1부에서 시작한 '백정의 역사'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초원을 잃고 한반도에 갇힌 유목민들. 그들은 살기 위해 칼을 잡았고, 농경 사회의 질서 밖에서 '도한(屠漢)'이라 불리며 멸시받았다. 조선시대 반촌의 노비들은 성균관의 담장 아래서 기형적인 특권을 누리며 '속대'의 굴레에 신음했다. 개화기 형평사 운동가들은 "우리도 사람이다"라고 외치며 피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21세기, 마장동. 이곳의 상인들은 더 이상 천민이 아니다. 그들은 벤츠를 타고 출근하는 사장님이기도 하고, 대를 이어 가업을 잇는 장인(匠人)이기도 하다. 그들의 칼질은 혐오스러운 살생이 아니라, 미식의 세계를 여는 열쇠로 대접받는다.

물론 여전히 마장동의 새벽 노동은 고되다. 무거운 고기 덩어리를 나르느라 허리가 휘고, 날카로운 칼날에 손을 베이는 위험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하지만 그 노동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180도 달라졌다.

이제 사람들은 마장동을 '무서운 곳'이라 하지 않고 '성지(聖地)'라 부른다. 주말이면 가족 단위 나들이객들이 시장을 메우고, 유튜브에는 마장동의 발골 영상을 보며 감탄하는 댓글이 달린다.

600년 전, "저들과 섞이기 싫다"며 백정 마을을 피해 다녔던 양반들의 후예들이, 이제는 제 발로 마장동을 찾아와 고기 한 점에 행복해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형평(衡平)'이 아닐까. 법적인 신분 해방을 넘어, 문화적이고 정서적인 화해. 피 냄새가 사라진 그 자리에는, 고기를 매개로 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온기만이 남아 있다.

칼을 쥔 사람들의 손

마장동 시장 북문 입구에는 거대한 황소 동상이 서 있다. 힘차게 땅을 박차고 나가는 그 황소의 모습은, 온갖 멸시와 쫓겨남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 땅의 도축인들을 닮았다.

나는 마장동의 좁은 골목을 걸으며 생각한다. 이 수많은 고깃덩어리 하나하나에 깃든 수천 년의 역사를. 유목민의 야성과 반인의 눈물, 형평사의 외침과 마장동 상인들의 땀방울을.

우리가 무심코 구워 먹는 등심 한 조각에는, 그들이 견뎌온 600년의 세월이 마블링처럼 촘촘히 박혀 있다. 이제 우리는 그 고기를 먹으며, 고기 뒤에 가려져 있던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붉은 피를 묻혀가며 우리의 식탁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흰 옷 입은 장인들의 거친 손을.

그들의 칼끝은 차가웠지만, 그들이 지켜온 삶은 그 어떤 숯불보다 뜨거웠다.

에필로그. 마에스트로가 된 백정

: 칼을 쥔 자들에 대한 시선이 '천대'에서 '존중'으로 바뀌기까지, 우리 사회는 얼마나 성숙해졌는가?

1. 이름의 무게를 벗다

서울 성동구 마장동, 축산물 시장의 새벽은 여전히 치열하다. 하지만 그 공기의 질감은 600년 전과는 사뭇 다르다. 붉은 조명 아래서 날카로운 칼을 쥔 사내의 눈빛은, 쫓기는 짐승의 그것이 아니라 무대 위에 선 연주자의 그것처럼 빛난다. 그는 거대한 소의 갈비뼈 사이를 유영하듯 칼을 움직인다. 뼈와 살이 분리되는 찰나의 순간, 그의 손끝에서는 오직 정교한 ‘기술’만이 남는다.

우리는 이제 그를 ‘백정(白丁)’이라 부르지 않는다. ‘도한(屠漢)’이라며 침을 뱉지도 않는다. 대신 우리는 그를 ‘정형사(整形師)’, ‘발골 전문가’, 혹은 ‘미트 마에스트로(Meat Maestro)’라 부른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단순한 호칭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그 존재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이 바뀌었다는 증거다. 가장 천하고 더러운 것의 대명사였던 그 이름이, 존경받는 장인(匠人)의 이름으로 바뀌기까지, 이 땅의 칼 쥔 사람들은 무려 600년이라는 긴 세월을 피와 눈물로 건너왔다.

이 책은 그 기나긴 여정의 기록이자, 우리 사회가 타자(他者)를 어떻게 배척하고 다시 포용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반성문이다.

2. 600년의 궤적: 이방인, 천민, 그리고 인간

되돌아보면 그들의 시작은 ‘이방인’이었다. 고려 말, 북방의 초원을 달리던 유목민의 후예들이 한반도에 갇혔다. 농경 사회의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그들은 ‘양수척’이라 불리며 물가에 숨어 살았다. 그들이 가진 사냥 기술과 도축 기술은 생존을 위한 유일한 무기였으나, 정착민들에게는 야만적인 습성으로 비쳤다.

조선의 세종대왕은 그들을 ‘신백정(새로운 백성)’이라 부르며 품으려 했으나, 오히려 그 선의는 비극이 되었다. 기존 농민들은 자신의 이름을 더럽혔다며 분노했고, 결국 ‘백정’이라는 단어는 가장 천한 신분을 뜻하는 낙인으로 전락했다.

그 후로 수백 년간 그들은 조선 사회의 ‘그림자’였다. 성균관 유생들의 밥상을 위해 소를 잡았던 반인(泮人)들은, 특권을 누리는 듯했지만 실상은 국가 재정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착취당하는 도구였다. 그들은 ‘속대’라는 세금을 내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악덕 상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근대가 되어 신분제가 사라졌을 때도 차별은 멈추지 않았다. 호적에 찍힌 ‘붉은 점’은 법보다 강한 관습의 족쇄였다. 1923년 진주에서 울려 퍼진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다”라는 형평사(衡平社)의 외침은, 그들이 처음으로 짐승이 아닌 인간임을 선언한 피맺힌 절규였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도시가 팽창할 때마다, 그들의 일터인 도축장은 숭인동에서 마장동으로, 다시 도시 밖으로 쫓겨나야 했다. 도시는 그들이 제공하는 고기는 탐식(貪食)하되, 그들의 존재는 혐오 시설이라 부르며 밀어냈다.

3. 칼의 진화: 살생(Killing)에서 예술(Art)로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억압의 시간은 그들의 칼을 더욱 예리하게 단련시켰다. 사회가 그들을 천대하며 외면하는 동안, 그들은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자신들만의 성역(聖域)을 구축했다. 바로 ‘기술(Skill)’의 영역이다.

과거의 칼질이 단순히 숨을 끊고 고기를 얻는 ‘살생의 노동’이었다면, 현대의 칼질은 고기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창조의 예술’로 진화했다.

오늘날 마장동의 작업장은 수술실을 방불케 한다. 정형사는 소 한 마리의 해부학적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근육의 결, 지방의 분포, 뼈의 굴곡을 손끝으로 읽어내며, 120여 가지가 넘는 부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발라낸다. 그들의 칼끝에서 투박한 고기 덩어리는 ‘꽃등심’이 되고, ‘새우살’이 되고, ‘안창살’이라는 보석이 된다.

이것은 기계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이다. 로봇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물마다 미세하게 다른 뼈의 모양과 근막의 위치를 감지하여 손실(Loss) 없이 발골해 내는 것은 오직 인간의 감각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600년 전 유목민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DNA가, 자본주의의 미식 문화와 만나 ‘대체 불가능한 장인 정신’으로 꽃피운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그들의 칼질을 징그럽다고 피하지 않는다. 유튜브에서 수백만 명이 발골 영상을 숨죽여 지켜보며, 그 정교한 솜씨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신의 손놀림이다”, “예술이다”라는 찬사가 쏟아진다. 혐오의 대상이었던 ‘피 묻은 칼’이, 이제는 경외의 대상인 ‘마에스트로의 지휘봉’이 된 것이다.

4. 미식(美食)의 시대, 다시 쓰는 백정론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우리 사회가 ‘노동’과 ‘직업’을 바라보는 시선이 성숙해졌음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질서 아래서 머리 쓰는 일은 귀하고 몸 쓰는 일은 천하다 여겼다. 특히 생명을 다루는 일은 부정하다 하여 기피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셰프(요리사)가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 전국을 유랑하는 미식의 시대다. 사람들은 깨달았다. 최고의 요리는 최고의 식재료에서 나오며, 그 식재료를 완성하는 것은 바로 생산자의 땀과 기술이라는 사실을.

소비자들은 이제 고기를 먹을 때, 단순히 ‘맛있다’는 감각을 넘어 그 고기를 다룬 사람의 노고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장동의 ‘고기 익는 마을’이나 정육 식당에서, 손님들은 직접 고기를 썰어주는 상인에게 묻는다. “사장님, 오늘 어떤 부위가 좋아요?”“이건 어떻게 구워야 맛있나요?”

이 대화 속에는 과거의 ‘양반과 백정’ 사이에 존재했던 수직적인 위계가 없다. 오직 ‘미식가와 전문가’ 사이의 수평적인 존중만이 존재할 뿐이다. 상인은 더 이상 굽신거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지식을 설명하고, 손님은 그 전문성에 귀를 기울인다. 이 소소한 풍경이야말로, 형평사 운동가들이 그토록 꿈꾸었던 ‘저울처럼 평등한 세상’의 한 단면이 아닐까.

5. 아직 남은 숙제들

물론 모든 차별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이르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어떤 구석에는 육체노동을 경시하거나, 특정 직업군을 비하하는 시선이 잔존한다. 도축장이 내 집 근처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님비(NIMBY) 현상 또한 여전하다. 우리는 결과물(고기)은 사랑하지만, 과정(도축시설)은 여전히 불편해한다.

하지만 희망적인 것은, 이제 그 불편함을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마장동 시장이 현대화 사업을 통해 위생적인 환경을 갖추고, 냄새를 없애며 ‘음식 관광지’로 거듭나려는 노력은 그 증거다.

상인들 스스로의 자각도 변했다. 그들은 자녀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기술만 있으면 평생 당당하게 살 수 있다”며, 2대, 3대째 가업을 잇는 청년 정형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에게 도축과 정형은 더 이상 ‘천형(天刑)’이 아니라, 자부심 넘치는 ‘전문직’이다.

6. 식탁 위의 감사(感謝)

책을 덮으며, 다시 우리의 식탁을 본다. 오늘 저녁 당신의 상 위에 오를 따뜻한 소고기국, 혹은 지글거리는 삼겹살 한 점.

그 고기 한 점에는 600년의 역사가 마블링처럼 촘촘히 박혀 있다. 초원을 잃어버린 늑대들의 야성, 성균관 담장 아래서 숨죽여 울던 반인들의 눈물, 호적의 붉은 점을 지우려 했던 형평사의 외침, 그리고 마장동의 새벽을 여는 장인들의 거친 숨소리까지.

그 모든 시간과 땀이 응축되어 지금 우리의 입속으로 들어온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 고기를 씹으며, 고기 뒤에 가려져 있던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험한 일을 하면서도, 끝내 칼을 놓지 않고 우리네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그들. 붉은 피를 뒤집어쓰며 흰 옷 입은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었던 그들.

이제 우리는 그들을 향해 진심 어린 경의를 표할 수 있다. 그들은 더 이상 백정이 아니다. 우리 삶의 식탁을 지휘하는, 진정한 마에스트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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