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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고기를 먹는 사유하는 잡식 동물

고기의 history

인류 고기를 먹는 사유하는 잡식 동물    

최초의 인류 아담은 사과만 먹었다. 

뉴욕 타임스는 존 홉킨스 대학의 저명한 인류학자인 앨런 워커(Alan walker)박사의 이야기를 실었다. 그 이야기는 인간의 식사에서 과일이 차지하는 엄천난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의사와 영양학자들에게는 핵폭탄처럼 경악할 일이었다. 워커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우리 인간의 초기 선조들이 주로 먹은 것은 고기가 아니었다. 씨나 새싹, 잎이나 풀도 아니었다. 그들은 잡식주의가도 아니었다. 그들은 주로 과일에 의존해 생존해왔다.” 워커 박사는 치아에 표시된 줄 모양을 연구함으로써 식사성향을 결정하는 놀라운 방법을 발견하였다. 석화된 치아의 연구에서 워커 박사는 “현재까지 어떤 예외도 발견되지 않았다. 1200만년 전의 원시인부터 호모 에렉투스까지 조사된 모든 치아가 과일을 먹은 치아로 나타났다.”고 언급했다.

앨런 워커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전의 인류나 호모 엘렉투스때 까지는 인류는 지금의 침팬지처럼 과일을 주로 먹고 약간의 육식을 즐기는 잡식성있었던 것 같다.    

인류의 진화

우선 인류의 진화를 살펴 보자.

지금으로부터 4, 5백만 년 전, 에너지 폭발에 의해 원시 인류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 후 인류의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가 등장하였고, 250만 년 전쯤에는 뇌가 점점 커지고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호모 하빌리스(Homohabilis: 재간꾼)가 등장했다. 160만 년 전에는 걸어 다니는 호모 에렉투스(Homoerectus: 곧선 사람)가 나타나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중국까지 퍼져 나갔다. 50만 년 전에는 베이징 원인이 나타났고, 10만 년 전에는 인류의 사촌이라고 할 수 있는 네안데르탈(Neanderthal, 호모 에렉투스의 후예)인이 유럽과중동에 등장하였다.4만~5만 년 전부터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Homosapiens: 지혜로운 사람)라는 현대적인 인간으로 변모해 갔다. 유럽에서는 후기 구석기 시대인 4만 년 전에 크로마뇽(Cro-Magnon)인이 나타나 네안데르탈인과 장기간 공존하였다. 그리고 약 4만 년 전부터 인류의 직계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sapienssapiens: 아주 현명한 사람)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호모 하빌리스는 약 150만년에서 200만년전 동아프리카에서 살았는데 주로 식물을 먹었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는 달리 이들은 고기도 가리지 않고 먹었다. 올두바이 협곡 퇵적물에서 다량 발견된 석기는 호모 하빌리스들이 나무뿌리를 캐거나 단단한 열매를 으쌔고 죽은 동물을 잘랐던 도구로 보인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멸종하고 사라져 버린 반면 호모 하빌리스는 계속 진화하였는데 그 이유는 고기를 먹으면서 힘이 강해졌고 크고 복잡해진 뇌를 가졌으며 또 두손으로 무기와 도구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육식 인류의 탄생

이 시기 인류가 살고 있던 아프리카의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숲이 줄어들었고 식물성 먹거리를 구하기 힘들어졌다.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먹거리를 찾기 시작했고 대개 사자나 표범과 같은 육식 동물은 사냥감의 내장 기관과 쉽게 뜯을 수 있는 살코기만을 먹는다. 그들은 인간과 달리 손이 없어서 뼈에서 살을 정교하게 발라 먹을 수 없었다. 뼈에 붙어 있는 살까지 먹으려 하다가는 이빨을 다치기가 쉬웠다. 육식동물들이 포만감을 느끼고 떠나면 이번에는 하늘에서 온갖 새들이 내려왔다. 새들은 사냥감의 뼈에 남아 있는 살을 날카로운 부리로 발라 먹었다. 그리고 나서 인류는 사냥감의 몸에서 남아 있는 단백질 주로 단단한 뼈속의 뇌와 골수를 먹었다. 뼈와 살을 발라내려면 도구를 만들어야 했다. 호모 하빌리스가 최로로 도구를 만든 이유다. 사냥감의 뇌나 살을 먹으면서 단백질 섭취가 늘어나서 뇌가 커졌다. 인류는 점차 몸집이 커졌다.     

최초의 사냥꾼 호모 에렉투스

호모 에렉투스는 협동하여 사냥하는 기술을 발전시켰고 그후 고기를 먹으면서 살았다.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사냥꾼은 호모 에렉투스였다. 호모 하빌리스는 맹수들이 잡은 사냥감의 남은 부위를 얻어 먹었다면 호모 에렉투스는 적극적으로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이과정에서 인류는 나무나 돌로 창과 도끼를 만들었고 몸에서 털이 없어지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많은 털은 사냥에 방해가 되었다. 털이 업어서 오래 달려도 체온이 올라가지 않기 때문에 현존하는 모든 동물 가운데 인류가 가장 오래 달릴 수 있다. 

호모 에렉투스는 불을 사용했다. 불은 자신을 방어하는 무기도 되어 주고 불을 사용하면서 음식을 익혀 먹게 되었다. 현재 인간이 주식으로 먹는 밀,쌀 같은 음식은 자연 상태로는 소화가 거의 안된다. 식물의 강한 세포벽을 깨지 않으면 그 속의 영향소를 흡수 할 수 없다. 또 다른 동물의 사체를 먹으면 여러 세균과 기생충에 감염될 수 있다. 음식을 가열하면 세균의 영향을 줄여 줄 뿐 아니라 쓉기도 쉽고 소화도 잘된다. 동식물의 세포를 감싸고 있는 벽과 막의 강도가 약해지고 세포안에 존재하는 성분의 결합력이 약해져서 소화가 잘 된다. 불에 음식을 익혀 먹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치아가 작아지고 창자가 짧아졌으며 소화 시간도 줄었다. 이렇게 신체의 변한 결과 뇌 용량이 커졌고 창자를 유지하던 에너지가 줄어들면서 뇌에 투입할 에너지가 늘어나 점차 뇌 용량이 커졌다. 또한 인류의 수명이 연장되면서 할아버지들로 부터의 대대로 내려오는 삶의 지혜에 대한 학습효과가 커졌다. 호모 엘렉투스는 후두가 발달해서 우우 짖지 않고 간단한 말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었다. 1926년에 중국 베이징 남서쪽 자우카우덴의 석회암 지대에서 발견된 베이징 원인이 호모 에렉투스다.

정리를 해 보면 호모 에렉투스의 진화단계는 인류가 옷을 입고 불을 사용하며 집을 짓고 살게 됨으르써 추운 기후에 적응할 수 있었다는 점 그 덕분에 인류는 열대지방에서 벗어나 전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인류는 사물을 이름짓는 원시 언어를 발달시킬 수 있었다.또한 집단적 협동을 이용하여 사냥을 했다.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10만년 전쯤 등장해서 한때 네안데르탈인과 공존한 인류인데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다른 인류다. 

이들 역시 수렵과 채집 생활을 했다.

인류는 약 500백만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수렵 채집자로 출발했다. 그후 499만년 동안 그런 상태로 살았다. 그러다가 마지막 빙하기가 지난 뒤 날씨가 따뜻해지자 인류가 잡아 먹는 동물들의 숫자가 갈수록 적어졌다. 고고학에서는 인류가 수렵 채집자였던 기간동안을 구석기 시대라 부른다. 기술적으로 볼 때 구석기 시대에는 인류는 깨서 만든 석기 즉 껜석기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중석기 시대라고 부르는 짧은 과도기가  있었다. 중석기 시대에는 질그릇과 간석기가 발명되고 개가 사육되었다.     

농경, 사육의 시대

육식 동물의 경우에는 대개 먹이가 되는 동물이 줄어들면 포식자의 숫자 역시 줄어 든다. 그러나  사람만은 예외였다. 사름은 다른 어떠한 동물과는 달리 진화의 초기 단계부터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고 주위 환경을 조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먹이 사슬의 정상에서 그 지위를 유지해왔을 뿐 아니라 착실한 인구 증가율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수확이 적은 시기를 대비하기 위한 비상용 식량의 저장은 과거 1만년에 걸친 인구의 대증가를 몰고 온 전환점이 되었다. 

고기는 부패하기 쉽기 때문에 보존이 어렵다. 고기는 금방 상하고 썩은 고기의 독성은 비록 치명적이지는 않더라도 입에 대기 조차 싫어진다. 따라서 고기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사냥해서 도살할 수 있는 동물이 없다면 음식을 건조시켜 보존하는 방법보다는 산 채로 저장하는  행태라 할 수 있는 가축이 훨씬 편리하다. 인류가 수렵인에서 농경민으로 바뀌기 시작한 가장 기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동 지방의 고원지대에서 진정한 사육의 시대가 시작된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시리아, 터키, 이란등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기후가 온화하고 강우량이 풍부해서 관개를 하지 않고도 작물이 자랄 수 있는 곳이며 각종 동식물의 원형이 많이 발견된 곳이다. 밀, 귀리, 보리, 소, 양, 염소, 돼지등의 사육이 시작되었다. 중동에서 사육의 개념이 생겨난 후 널리 퍼져 여러 민족들이 각각 사육을 시작했는데 동남아시아에서는 바나나, 사탕수수, 쌀 여러 종류의 완두콩등을 재배하고 들소,닭, 오리등을 길들였다. 아메리카에서는 옥수수, 감자, 강낭콩, 면화, 담배들이 재배 되었다.         

가족의 기원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여성은 식물 생산의 주역이었다. 육아를 맡았으므로 여성은 남성보다 활동성이 적을 수밖에 없었고 체격이나 힘에서 약했다. 그래서 원시시대의 오랜 기간동안 남성은 주로 야생동물을 사냥하거나 썩은 고기를 찾아 다녔고 여성은 아이를 돌보면서 과일과 씨앗을 줍고 뿌리를 캤다. 최근까지 남아 있는 일부 수렵, 채집 문화권을 보아도 이것은 불변의 분업이다. 그러므로 사육이 시작되었을 때 남성은 가축을 길들이는 역할을 맡았으나 식물 재배를 혁신 시킨 것은 여성이다. 그러나 물건을 나르고 밭을 가는 데 가축의 힘을 이용하면서 남성의 가부장적 지위가 생겨났다. 남자들은 가축의 사육을 맡으면서 점점 더 큰 가축도 사육하게 되었다. 어느날 가축의 힘을 이용하여 땅을 파면 농사에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았고 쟁기가 출현하면서 가축을 모는 남성의 지위가 높아졌다. 여성의 지위는 인류 역사 전체를 걸쳐 대체로 높았는데 동식물을 사육하게 되고 남성이 농사를 맡게 되면서 낮아졌다. 

사회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가족의 기원에서 원시시대의 가족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 사람들이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면서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서 전혀 새로운 사회 관계도 나타났다. .....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에 살던 셈족이나 인도의 펀자브 지역과 갠지스 지역 그리고 중앙 아시아의 아무다리야, 시르 다리야 유역에 살던 아리안족은 말, 낙타. 당나귀, 소, 양, 염소, 돼지와 같은 가축을 길렀다. 가축의 수가 어느 정도가 되면 적당히 돌보아주기만 해도 그 수가 점점 늘어났다. 넘칠 정도로 많은 양의 우유와 고기를 얻을 수 있게 되자, 그때까지 식량을 구하던 방법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식량을 덛는 중요한 수단이어었던 사냥도 단순히 여가를 즐기는 사치가 되어버렸다.”

엥겔스는 가축을 돌보는 데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예제도가 생겼다고 주장했다. 당시 사회의 관습에 따라서 새로운 생계수단으로 등장한 가축은 남성의 소유가 되었다. 가축을 사육하는 것은 사냥감이나 곡물을 비롯한 식량을 손쉽게 구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사육은 부족 공동의 재산이나 개인의 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됨으로써 사회 조직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최초의 가축 개

최초로 사육된 가축은 개다. 유럽인들이 전세계로 진출했을 때 세계 모든 민족들이 개를 기르고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식물 재배가 시작되기 직전에 살았던 중석기 시대 사람들의 집터에서 개 사육의 증거를 찾았다. 인간은 개를 여러 가지로 사용했다. 처음에는 사냥에 이용했다. 그러다가 다른 가축들을 길들이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양과 염소를 사육하는데 개를 이용했다.                

야생동물이 가축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

  전세계적으로 양, 소, 염소, 돼지, 말의 사육이 일반화 된 이유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고고학자 고르동 쉴드는 인간과 가축의 밀접한 관계는 빙하기가 끝나면서 근동지역의 기후가 매우 건조해지고 가젤이 많이 살던 네게브 지역의 사막화가 진행 되던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추정했다. 그런 지역에서는 인간과 동물이 모두 물이 있는 오아시스에 함께 모여서 살아야만했다. 인간은 그렇게 발전된 공생관계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야생동물이 가축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을 살펴 보자. 

영국의 인류학자 프란시스 고턴은 가축화는 엄청난 숫자의 사름들에 의해 반 무의식적인 시도가 수세대에 걸쳐 반복적으로 행해지고 느린 속도로 오랜 시간에 걸쳐 선택이 이루어지고 그중 상당수는 다시 원래의 원신 형태로 되돌아가는 일이 반복됨녀서 오늘날의 가축종이 정착되는 과정을 거쳐왔다고 주장하면서 야생동물이 가죽이 되기 위한 필요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여섯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튼튼해야 한다. 

어린 새끼는 대부분 이유전에 어미로부터 떨어져도 살아 남을 수 있어야 한다. 도한 새로운 먹이 새로운 생활환경 온동, 습도, 전염병, 기생충 등과 같은 여러 조건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천성적으로 사람을 잘 따르고 좋아해야 한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이야기하자면 사회 행동의 구조가 사람의 그것과 훌륭하게 결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다 자란후에도 계속 사람의 영향 아래 있을 수 있도록 절대적인 위계 질서를 토대로 한 행동 양식을 갖는 사회성이 강한 동물이어야 한다. 

셋째, 생활환경에 대한 욕구가 너무 높지 않아야 한다. 

골턴이 말라려 하는 것은 예를 들어 영양이나 가젤 도는 사슴류처럼 당장 도망쳐버리는 식의 습성이 있으면 곤란하다는 의미이다. 적응성이 없는 동물들은 가두어두거나 과밀한 상태에서 사육되면 먹이를 먹지 않거나 번식을 중단할 수 있다.

넷째, 고대인들에게 유용성이 커야 한다. 

원시 공동 사회에서는 보유가 쉬운 식량원 즉 필요한 때면 언제든 고기를 제공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저장 식량으로서의 기능이 일차적으로 요구된다.

다섯째 자유로운 번식이 가능해야 한다. 

골턴이 정확하게 관찰한 바와 같이 이것은 가축화가 성공하기 위한 가장 필수적인 조건일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동물 사육에 가장 적합한 조건을 만들 수 있는 동물원이라는 환경하에서도 얼마나 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그 번식 집단을 유지하기가 어려운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여섯째, 사육이나 관리가 쉬워야 한다. 

이조건은 무리가 흩어지지 않게 잘 모아 둘 수 있고 더욱이 목동 한사람이 무리를 들 볼 수 있을 만큼 성질이 양순하고 식성이 까다롭지 않으며 군거성을 가져야 한다는 세 가지 특성을 필요로 하는 가축종에 해당한다.     

거세

거세는 가축 사육 초기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몸집이 작은 짐승들은 남성이 다룰 수 있었지만 큰 짐승들은 쉽게 다룰 수 없었다. 수소는 물론 이후에 사육되는 숫말이나 몸집이 큰 수퇘지 같은 가축들이 그에 해당한다. 어느날 수컷의 고환을 떼어버리면 더 다루기 쉬워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발정기의 수소가 암컷 주변에서 날뛰는 행동이 바로 성욕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성욕을 제거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환은 몸 바깥에 나와 있어 새끼 때 간단히 떼어버릴 수 있었다. 사육자들은 이내 고환을 떼어버리면 생식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대신 가축들은 성질이 훨씬 유순해졌다. 목축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었다. 암컷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지만 수컷보다 성질이 온순했다. 원시시대의 사육에서 중요한 점은 이렇게 거세 이외에 가축을 우리에 가두고 인간을 낯익은 존재로 여기도록 한 것이다. 그 과정은 아마 상당히 오래 걸렸을 것이다. 풀오 놓으면 야생으로 돌아가는 짐승들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지금 호주에서 살고 있는 들소, 물소, 낙타 등은 옛날 인간에 의해 사육되었던 짐승들이다. 아직도 세계 각지에는 야생마, 돼지, 당나귀들이 있다.     

가축의 소비

신석기 농업 혁명 즉 사육과 경작을 시작하면서 인류는 주로 곡물과 야채를 주식으로 했다. 동식물이 사육되면서 동물보다는 식물의 생산량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식물음식을 먹었다. 육식을 하는 기회는 숫컷이 남아 돌 때였다. 가축 사육자들은 숫컷과 암컷이 엇비슷하고 태어나지만 번식을 위해서는 숫컷 한 마리에 많은 암컷을 가는 편이 훨씬 낫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숫컷을 거세하고 잡아 먹었다. 거세하기 힘든 새의 숫컷들은 그냥 잡아 먹었다.     

야생말이 지금의 말로 진화하기 전까지 말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구석기 시대 중기의 베이징 원인들이 남겨놓은 유적이나 사옹 에 루아르의 유명한 솔뤼트레 절벽 밑에서는 많은 양의 말뼈가 쌓인  화석이 발굴되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사냥꾼에게 쫒긴 수십만 마리의 말들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말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말고기를 먹는 것이 야만적이거나 심지어는 죄악으로까지 여겨지게 된다. 아테네인과 로마인들도 유럽의 기독교인들처럼 말고기에 대해서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재앙이 닥쳤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말고기를 먹었다. 말은 소,말, 양,돼지, 개중 가장 늦게 가축이 된 동물이다. 최초로 말의 가축화가 시작된 신석기 시대 말엽에는 고기를 얻기 위해 사육되었다. 이를 입증해주는 절단된 말뼈가 다른 단편적인 음식 유물과 함께 일부 고고학적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 초기 농민이 말을 물자를 운반하거나 사람이 타거나 수ㅡ레 등을 끄는데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 이전에는 소가 쟁기질을 하는 등의 경작용 동물로 그리고 수레를 끄는 등의 견인용 동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일단 말이 교통 수단으로 정착하게 되자 인간의 생활모습은 크게 달라졌다. 이러한 환경 변화는 놀랄 만큼 늦게 일어나서 유럽에서는 기원전 2000년 남러시아와 서아시아에서는 그보다 겨우 1000년 빠르게 시작되었다. 이렇게 되자 승마의 세계가 열렸다. 말은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고 차츰 기마 기술이 발달하게 됨에 따라 새로운 영토를 정복할 수 있었다.     

양은 원래 고기가 아니라 털을 이용하기 위해 길렀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많은 사람들이 양고기를 먹는다.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많이 사육하는 가축인 염소는 먹을 것을 가리지 않는다. 마그리브와 사하라 지역이 사막화 된 것은 그런 염소들의 무차별적인 식성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람들은 염소고기를 양고기만큼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 맛이 좋은 새끼 염소고기는 좋아한다. 중세에는 소금에 절인 숫염소의 고기로 맛이 진한 수프를 끓여 먹었다.     

소 

마케도니아, 크레타, 아나톨리아에서는 기원전 7000년경 처음으로 소(보스프리미게니우스)를 사육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5000년경의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다른 종류의 소를 사육했다. 그러나 이 두종류의 소는 현재 모두 멸종해버렸다.

페리클레스 시대(BC500)의 페르시아에서는 쇠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지만 미식가였던 다리우스 대왕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휘장을 쳐놓고 소를 통째로 먹었다. 중세 말기까지는 돼지고기를 많이 먹었고 오늘날 우리가 많이 먹는 쇠고기와 양고기는 특별한 식품이었다. 쇠고기를 비롯한 가축의 고기는 소금에 절여서 저장했다가 삶아서 기름이나 식초를 쳐서 먹었다, 소금에 절이거나 말린 고기는 군인과 선원들의 중요한 비상 식량이었다. 

중세의 문헌에서는 도시 사람들이 고기찌꺼기를 많이 먹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당시 먹었던 고기 찌꺼기는 내장, 위, 다리, 분비샘, 혀등이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그런 것을 먹었을 것이다.  맛이 좋은 고기는 상류층의 몫이었다. 중세 유럽에서도 농촌에서 일해주고 우유도 생산하는 소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기 전에는 소를 죽이지 않았다. 늙은 소의 질긴 고기는 찜, 냄비요리, 포토푀의 재료로 섰다. 이런 전통이 18세기에 영국으로 전해져서 전통적인 영국식 스튜와 끓이거나 볶는 쇠고기 요리로 발전했다. 

로스트 비프를 자신들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꼽는 영국인들은 쇠고기를 매우 좋아한다. 전형적인 영국 음식이 되어버린 쇠꼬리 수프는 1774년에 발간된 메농의 요리책 중산층의 음식에 소개 된 것으로 프랑스 혁명 때 이주한 사람들에 의해서 영국으로 전해졌다. 

프랑스어로 비프테크라고 부르는 비프스테이크는 워털루 전쟁(1815)후 영국군이 파리의 튈르리 궁정에 주둔하고 있을 때 전해졌다. 굽거나 튀긴 스테이크에 감자 칩을 곁들여 먹는 관심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모두 유행했다.    

페니키아, 크레타, 그리스 라틴 알파벳 첫글자인 알레프(⍺)는 가장 중요한 재산인 소의 머리를 상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사실은 고대로부터 전해왔던 소에 대한 경외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돼지

돼지는 양과 염소를 사육하기 시작한 것과 같은 시기에 멧돼지 사육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돼지는 초기 동유럽과 서아시아에서 염소만큼 식용으로는  선호되지 않았다.  반면 같은 시기(문화적으로 중석기 시대)의 유럽 북부와 서부에서는 멧돼지가 붉은 사슴과 함께 주된 식육의 공급원이었다. 2000-3000년후 초기 농민이 동쪽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면서 사육된 돼지를 전파했다. 처음에는 돼지와 소가 가축 양이나 산양보다 더 성공적으로 번성했다. 그 이유는 삼림이 울창한 지세와 지역적 환경이 염소와 같은 동물보다는 돼지와 소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신석기 시대 말엽부터 청동기 시대 초에 이르기까지 양이 가장 보편적인 가축종으로서의 지위를 차지 하기 시작했다. 후빙기 초의 북유럽에서 멧돼지는 광범위한 낙엽수림 지역에 인접한 계곡과 늪지에 대한 뛰어난 적응성 덕분에 그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멧돼지는 성질이 사납지만 어린 새끼는 길들이기가 쉽고 사람의  거주지와 공동으로 생활하는데에도 빨리 적응하기 때문에 초기 신석기 인들이 자신들이 사육했던 토착 개체에 다른 곳에서 얻은 그 귀중한 종을 이종교배 시킬 이유가 충분했다.     

최초의 도축업자

 시민들에게 고기를 공급하던 도축업은 중요한 사업이었다. 중세 이탈리아인들은 짐승을 도축하는 일을 예술이라고 까지 생각했다. 도축업은 오래 전부터 조직화되어 있었고 철저한 감독을 받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런 변화가 중세 이후에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회구조가 고도로 조직화되어 있던 로마의 식육점은 취급하는 고기의 종류에 따라서 쇠고기를 취급하는 보아리이, 돼지고기를 취급하는 수아리이 그리고 가금류와 사냥고기를 취급하는 페쿠아리아로 구분되어 있었다. 

최초의 전문적인 도축업자는 8500년 전에 요르단에 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요르단의 베다 유적지에서는 아래층에 세 개의 점포가 있는 벽돌집이 발굴되었다. 한 상점에서는 엉성한 돌칼과 함께 전문가의 솜씨라고 할 정도로 살을 잘 발라낸 뼈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서 그 상점에서 고기를 잘라 팔았던 것이 틀림없다. 

식용 고기를 잘라서 파는 사람을 뜻하는 도축업자(프랑스어 부세(boucher)에서 유래된 부처(butcher)와 고대 이탈리어의 베카이오(beccaio)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13세기부터였다.

도축업자들은 처음에는 주로 소금에 절인 염소고기를 취급했지만 점차 쇠고기도 팔았다.도축업자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중세의 쇠고기 소비가 얼마나 적었던가를 알 수 있다. 이탈리아어 마첼라이오(macellaio)에서 유래된 것으로 싸구려 여관을 운영하면서 짐승을 도축해서 팔기도 했던 사람들 (maiselier)이라는 말은 도축업이 여관업과 분화되면서 사라졌기 때문에 영어에는 전해지지 않았다.          

참고 문헌 

인간과 가축의 역사 J.C. 블록 새날 

다이어트 불변의 법칙 하비 다이아몬드 사이몬북스 

먹거리의 역사 마귈론 투생-시마 까치

사람의 역사 아서 니호프 푸른숲

역사학자 정기문의 식사 정기문 책과 함께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김영사 

WHY? 인류 이광웅 예림당

네이버 지식백과]인류의 출현 - 우주선 지구호에 주인이 등장하다 (대단한 지구여행, 2011. 8. 1., 푸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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