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동이크의 소소한 책이야기

by 동이크


학창시절, 나는 그저 수학보다 국어가 좋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다 뒤늦게(아니면 일찍?) 이성에 눈을 떠 펜팔을 하게 되면서 연애편지도 많이 쓰고, 내 마음을 대변해줄 시와 소설을 찾아 읽다보니 어느새 국문학과 학생이 되어 있었다. (당시 휴식 시간은 먼지 나도록 뛰어놀던 친구들과 달리 난 언제나 언어영역 문제 풀기로 시간을 채웠다.)

대학생활 초기, 갈 데라곤 도서관밖에 없어 그곳에서 죽 치고 앉아 있었다. 어떤 날은 100번대 서가에서 하루를 보내고, 또 어떤 날은 800번대 서가(대개 도서관은 800번대가 문학이다)에서 김영하와 김애란 소설가를 발견했다.


이렇게 한동안 좀 '있어 보이고' 싶어서 시작한 독서를 통해 롤랑 바르트와 자크 라캉과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의 책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영화 칼럼을 쓸 때도 '욕망 이론'을 조금 양념처럼 덧붙여 남들과 다른 글을 쓸 수 있었다.) 라캉이 프로이트의 욕망을 욕망했듯이 나는 라캉의 글을 욕망했는지도 모른다. "더 모호하고 더 다의적일수록 더 좋은 것이다"라는 라캉의 말대로 더욱더 나는 어려운 글들을 읽어 내려갔다. 언제가부터 파스칼의 <팡세>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내 가방 속에 두껍고 무거운 애물단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죽치고 앉아 지나간 초인들과 함께 허우적 거리던 어느 날, 무라카미 하루키,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등 이름만으로도 낯선 일본 소설가들의 책 무더기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았다. 이토록 세련된 감성이라면 메마른 내 가슴을 채워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멋들어진 문장과 감성 돋는 라이프 스타일에 자극받은 나는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그거 아니, 밤하늘의 별을 보며 어린왕자가 살던 별은 어딜까"와 같은 제목으로 시작하는 글들을 밤마다 남발하고 있었다.

단순히 책 속에 파묻혀 지내는 걸 좋아했던 나는 지금까지도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밥벌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에요?"라든지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수 있어요?"란 질문에 가장 난감해하고 쉽게 절망한다.


책 읽고 글쓰기가 평생 할 일이라고 생각한 후부턴 좀 여유가 생기긴 했다. 인정받기 위해 어려운 글을 읽고 썼던 지난날 처럼 조급해지지 않기로 했다. 좀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밤을 지새우지 않기로 했다. 맘에 드는 책 한권만으로도 기뻐했던 시절처럼 책을 더 천천히 느리게 읽기로 했다. 학창시절 하루가 멀다하고 도서관에 들러 빌린, 무겁게 들고 다녔던 책들의 무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내 어깨를 가볍게 만들어 준다.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어, 그저 대학 타이틀에 기대며 문제집을 풀던 동창들과 조금 다른 삶을 살게 된 유일한 밑천은 책뿐이었다. 앞으로의 남은 인생도 책에 파묻혀 살겠지. 침침한 눈을 비비며 전자책을 혐오하는 나에겐 더욱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