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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현준 Nov 19. 2019

창덕궁 후원






그 옛날, 왕이 걸었을 길을 걸어봅니다.

비록 앞뒤로 백여 명의 관람객이 함께하는 떠들썩한 산책이지만 

그들이 왕을 따르는 신하와 궁녀라고 제멋대로 상상해봅니다.


길을 따라 몇 개의 못이 있고 경치를 감상하기 제일 좋을법한 곳엔 

어김없이 자그마한 누각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비록 서보진 못하지만, 그 언저리에서 왕이 바라봤을 풍경을 하나하나 천천히 둘러봅니다.

이른 겨울을 맞이한 이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결국 끝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얼굴 새빨개지도록 있는 힘껏 버텨봅니다.

한계에 다다랐는지 누렇게 떠버린 얼굴들도 보이네요.


가을을 왜 화려하다고 하나요.

붙잡지 못할 형형색색들이 나는 더 아프고 쓸쓸할 뿐인걸요. 

애써 눈을 피합니다.

나를 떠나지 않을 저 시퍼런 소나무가 오늘은 더 듬직해 보이네요.


숲 깊은 곳에는 돌을 깎아만든 물길 위로 작은 물줄기가 일체의 배신 없이 흐릅니다.

그래서 왕이 가장 사랑했던 곳이었을까요.

폭포처럼 쏟아 내려야 하지만 얼마 남지 않아 졸졸졸 흐르는 물은 애달파 보입니다.


한 시간 반의 산책을 마치고 밖으로 나옵니다. 

회색빛 콘크리트 덩어리와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창들이 왠지 낯설어 보이네요. 

누각 형상의 지붕에 어니언이라는 영문은 기괴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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