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은영 Jul 11. 2018

할머니의 화양연화

아파트 단지를 지나 마트에 가는데 앞에서 걸어오시던 할머니가 길을 물으셨다. 

이쪽으로 가면 6단지 맞아요?

내가 사는 곳은 과거 주공아파트였다가 재개발이 되면서 건설사 브랜드별로 새로운 신식 아파트가 속속 생기고 있다.  6단지라면 요새 먼지나게 올라가고 있는 길건너 롯데캐슬 부지를 말씀하시는 건가. 


직진하시면 작은 사거리가 나오는데 사거리 지나서 횡단보도 건너시면 돼요. 


알듯 모를 듯 고개를 끄덕이는 할머니의 표정이 석연치 않았다. 가봐야 소음과 먼지로 가득한 공사현장이니 설명하는 나도 난감해졌다. 같이 가드려야 하나. 어딜 찾으시는지 물어도 대답을 얼버무리시길래 나는 조금 힘줘서 말했다. 


거긴 지금 공사 중이라 아무 것도 없어요 할머니. 


할머니는 나를 찬찬히 바라봤다. 멀리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뒤를 돌아보는 것 같기도 한 그런 눈빛. 잠깐 가만히 나를 보시더니 옛날에, 하고 할머니가 입을 뗐다. 길을 물을 때와 달리 목소리에 힘이 실려있었다. 


옛날에 이 일대에 시장이 있었어요. 물건이 좋고 값도 싸서 사람이 아주 많았었는데 시장도 없어지고 꽃파는 시장도 없어져버렸네. 6단지가 제일 컸거든요. 시장 사람들도 많이 살았어. 전부 없어졌네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표현 말고 여기에 더 잘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젊은 날의 기억 한 조각을 들고 더듬더듬 찾아온 곳에 이방인처럼 덩그마니 서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서글퍼졌다. 오늘처럼 비가오는 날에는 비닐 우산을 들고 흙탕물을 조심조심 비껴 걸으면서 채소를 흥정하고 돼지 비계 같은 값싸고 양이 많은 식재료를 사서 가족들의 저녁을 준비했으리라. 집으로 돌아오는 식구들을 기다리면서 동네 사람들끼리 허름하고 맛있는 여름밥상에 둘러앉았을지도 모르겠다. 


폐허가 돼버린 6단지 위에 새로 지어질 아파트에서 또 다른 가족들의 이야기가 생겨나겠지. 광폭한 건축 공사가 이뤄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기억의 무덤에 찾아오셨나보다. 생생한 추억을 갖고 있으되 추억을 소멸당한 할머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집안의 길흉화복이 변화무쌍하게 펼쳐졌을, 아내이자 엄마, 여자로서 가장 단단한 시절을 보냈을지도 할머니의 6단지를 상상하면서 알듯 모를듯 자신없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일 뿐. 


  












 


작가의 이전글 자연스런 관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