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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Aug 29. 2018

비오니까 부추전


차가운 것이 세상에 나와 슬슬 제 온도를 찾아가는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차 가운데선 옥수수차가 빨리 쉬는 것 같아서 여름엔 별수 없이 냉장고에 보관하지만 아침운동 나가기 전에 큰 컵에 가득 담아 실온에 둔다. 이렇게 반나절 마시다가 중간에  또 한 컵 미리 꺼내 냉기를 달래둔다.


점심으로 먹을 것들을 미리 꺼내놓았다. 오늘은 엄마가 주신 것을 먹어치워야지. 초록의 실한 기운이 가득한 부추 한 움큼,  작고 비뚤어졌지만 달고 단단한 양파, 사이좋은 뾰족이 홍고추 청고추, 송광사 스님들이 야무지게 감쌌을 연잎밥, 이렇게 큰데 단내까지 폴폴나는 순둥이 참외, 이른 귤과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아로니아가 오늘의 내 점심거리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부쳐먹고 갈아먹고 덥혀먹고 까먹을 건데, 그러자면 뭔가 귀한 일을 해야할 건데, 난감하다. 오늘은 그저 부추전이나 부쳐먹으면서 비를 기다릴 참이건만.


냉동 연잎밥이 제 온도를 찾아가는 동안 부추는 송송, 양파를 얇게 썰고 광에 굴러다니는 감자 한 알을 갈아넣어 부추전을 부쳤다. 구름들이 크게 울먹이더니 바락바락 성을 내기 시작한다. 쏴아 소리와 함께 엄청난 비가 쏟아진다. 이렇게 큰 비가 내릴 때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리움과 불안 사이에서 서성인다. 마치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가 이 비에 발목을 적시며 내게 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산살이 휘도록 성난 비를 참아내며 나를 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움이든 성난 빗줄기이든 마침내 끝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딱히 빗길을 달려올 누군가를 기다린다기보다 비가 멎기를 기다린다. 서두르지 않고 또박또박 기다린다. 지난 시간에 미련을 남기지 않도록 오늘의 기다림을 기억한다. 내가 보내고 있는 이 시간이 비단 기다림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야기가 나아가지 않고, 자꾸 글과 글 사이를 헤매이는 것은 누구의 탓이 아니라 내가 원인이니까 다행이다. 나의 안팎을 톧아볼 일이다.


천천히 제 몸의 냉기를 해체하는 연잎밥처럼 나는 시간의 힘을 믿어보기로 한다. 연잎이 녹고 밥알이 포슬포슬한 생김을 찾을 때까지 부추전 한 장이 시간마중을 나선다. 오늘 점심도 과식 각. 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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