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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Sep 28. 2018

사랑하는 손님


언니. 


미국 간 지 십여년 만에 처음으로 작년에 한국에 왔었잖아. 하필 나는 작은 수술 직후였고 휴가와 수술 일정을 바꿀 수 없었던 건 언니나 나나 마찬가지였지. 한 달 일정이었어. 그 동안 우리집에서 먹고 자고 지낼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던 것도, 하필 그 시간이 내 몸 회복기여서 불편한 마음이 든 것도 언니나 나나 마찬가지였을 거야.


언니가 가고 나서 말이야. 

언니가 처음 미국 갈때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상실감에 몸이 떨리더라. 돌아오지 않겠구나, 라는 자각을 처음했어. 나는 비혼주의자는 아니지만 이대로 싱글로 살게 될 것 같고 앞으로의 삶 한켠에 늘 언니가 있었거든. 작은 나무집을 짓거나 북카페를 차리거나 하는 삶의 틀거리를 짤 때부터 좋아하는 운동과 산책과 음악과 영화 같은 하루살이의 꾸러미를 떠올려볼 때도 언니를 머릿속에 뒀어. 


언니는 내 가족은 아니니까. 

하물며 모든 것을 어떻게 함께 할 수 있겠어. 다만 나는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을 뺀 나머지 것들을 모조리 언니와 함께 할 수 있을 줄 알았지. 통화할 때마다 나는 늘 거기서 있을 만큼 있다가 돌아와 라고 했잖아. 언니는 알겠어 라고 했고. 그 알겠어 라는 말이 나에겐 뿌듯한 확답이었고 언니에겐 한 자락의 가능성이었다는 것을 알고서 몸이 떨렸어. 언니가 난 한국에서 못살것 같아 라고 했을 때 너무 놀라서 언니를 바라봤었지. 정말? 했더니 응 한국 너무 이상해 라더라. 


맞아, 한국은 이상해. 

지랄같은 대통령을 겪었고 목불인견의 인간들이 넘쳐나고 애들은 죽어나고 청년들은 출구없는 불행에 빠져있고 노인들은 쓰레기 취급을 받아. 각자 지져스도 아닌데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넘어가. 고난의 행군도 이런 행군이 없어. 잊지말아야 할 것은 무릇 그 안에서 희노애락이 꿈틀대는 행군일 거라는 거지. 나는 이상한 세월 속에서 이상해져버린 한국을 얘기하자는 게 아니야. 우리가 놓쳐버린 10년을 말하고 싶은 거야. 


우리는 철없이 즐거운 시절만 보냈더라. 

20대에 만나서 30대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지. 우리는 밤을 모르는 꽃처럼 시듦없이 생생한 연애를 했고, 일터에선 크고작은 성공을 거두면서 주목받았고, 앞날을 알순 없지만 이대로라면 딱히 처지는 삶은 아니겠다는 자만에 도취되는 동안에도 인생의 그래프는 상승 중이었어. 놀라운 것은 언니가 미국으로 떠난 직후에 두 사람의 파노라마는 반대방향으로 흘러갔다는 거지. 결국 우리가 다다른 곳은 함께 할 수 없다는 쓸쓸한 확인. 


지난 10년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어.

20대와 30대는 워밍업이었다면 40대와 50대가 인생의 결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가장 다이내믹하고 감각적인 시기에 부재했던 거야. 언니 친구가 나를 처음 보고 그랬다고 했었지. 네가 보면 딱 좋아할 만한 애더라. 그래서 나를 처음 보고 나서 네가 은영이구나 했었잖아. 나도 그랬어. 언니를 처음 보자마자 빠져들었으니까. 사춘기 이후로 내겐 유일무이한 관계맺기였어. 그래 우리는 그렇게, 떼놓으면 죽을 것처럼 붙어있다가 정작 중요한 시절에 각자의 수렁에서 먹먹한 자맥질을 한 거야. 당신이 내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허상을 키우면서 부재를 견뎠던 거야. 


이제 알 것 같아. 

현실을 극복하는 힘은 상상력이더라. 실체는 너무 허약해서 그것만으로는 살아지질 못하더라. 언니가 미국에서 보낸 척박한 10년을 내가 일일이 알지 못하듯이 내가 겪어낸 굴곡들을 언니가 가늠하기 힘들겠지. 우리는 한눈에 반해서 보냈던 10년을 담보삼아 부재한 10년의 공백도 메꿀 수 있을 거라고 상상했어. 하지만 너무 허약해. 상상력은 혼자서는 힘을 발휘하지만 두 사람이 공유하기에는 밑도 끝도 없이 편차가 너무 크지 않겠니. 내 10년을 언니가 모르듯 언니의 10년을 내가 어떻게 감당하겠어. 


우리는 너무 알고 또 너무 모르더라. 

이달 초 위독하신 아버지때문에 급히 한국에 왔을 때도 내가 우겨서 우리집에 묵게 했었어. 일년 만에 다시 얼굴을 보게 되니 우리는 얼마나 반가웠겠어. 그런데 뭔지 모를 갭, 그래 미국 말로 갭. 그게 있더라. 전처럼 나의 질박한 유머를 좋아해주는 언니, 여전히 사랑스럽고 귀여운 언니, 깔끔하고 사려깊은 언니.... 그 언니와 함께 있는 일주일이, 좋았냐 하면 솔직히 힘들었어. 손님같았어. 이 한 마디. 손님같았다는 한 마디가 얼마나 미안하고 아픈지 몰라. 


공항에서 언니를 끌어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 

서로가 모르던 10년을 어떻게든 메워보려는 노력이 울컥해서 우리는 끝내 울었잖아. 그걸로 됐어. 너무 좋아해서 너무 원해서 빈약한 상상력으로 버틴 세월이 무색하게 우리는 세월만큼 닳아있더라고. 그걸 계산에 넣지 않은 채 생생했던 30대에 머물러 있더라고. 이 다음에 또 오면 나는 언니를 애써서라도 손님으로 대할 생각이야. 언제 올지 기약이 없는, 만나니 반가운 사람. 손님. 사랑하는 손님. 부디 너무 멀지 않게 또 와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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