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촉은 언어다. 새끼 원숭이가 천 인형에 매달린 채 떨고 있다. 철사로 된 어미는 우유병을 단 채 차갑게 서 있다. 배고픔과 따뜻함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은 생명. 1950년대 중반, 한 심리학자는 이 잔혹한 질문 앞에 새끼 원숭이들을 세웠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먹을 것인가, 안길 것인가.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 실험실의 새끼 원숭이였다.
# 선택 앞에 선 생명들
해리 할로는 위스콘신대학교 실험실에서 갓 태어난 붉은털원숭이를 어미에게서 떼어냈다. 새끼들 앞에 두 개의 대리모를 세웠다. 하나는 차가운 철사로 만들어졌으되 젖병이 달려 있었다.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져 있으되 먹을 것은 없었다. 생존의 논리라면 답은 명확했다. 새끼들은 철사 어미를 선택해야 했다. 배고픔은 생명의 가장 원초적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끼 원숭이들은 배반했다. 생존의 논리를, 당대 행동주의 심리학의 예측을. 그들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천 어미에게 매달려 보냈다. 철사 어미에게 가는 것은 오직 배가 고플 때뿐이었다. 급히 젖을 빨고는 곧장 천 어미의 품으로 돌아왔다. 두려움에 떨 때, 낯선 소리가 들릴 때, 그들은 천 어미를 찾았다. 부드러움에 얼굴을 묻었다. /먹이는 생존을 주었지만, 천은 존재를 주었다./
# 접촉 위안, 사랑의 재발견
이 실험이 우리에게 드러내 보인 것은, 애착이란 단순히 배고픔을 충족시켜 주는 존재에 대한 조건반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믿어 왔다. 아이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이유는 어머니가 음식이라는 보상을 주기 때문이라고. 모든 애착을 강화와 보상의 결과로 환원했다.
그러나 철사 우리 속 새끼 원숭이들은 말했다.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인간은, 아니 영장류는, 어쩌면 모든 고등 포유류는 따뜻함을 필요로 한다고.
접촉 위안, 할로는 이를 "contact comfort"라 명명했다. /살갗과 살갗이 맞닿는 순간, 거기에 안전이 있고 세계가 있다./ 우리는 이제 안다. 생후 초기의 신체 접촉이 뇌 발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포옹받지 못한 아이의 코르티솔 수치가 만성적으로 높다는 것을.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들이 보이는 애착 장애가 단순한 방임의 결과가 아니라 촉각적 결핍의 산물이라는 것을.
할로가 1958년 8월 미국심리학회에서 발표한 "사랑의 본질"이라는 논문은 현대 발달심리학과 신경과학의 토대가 되었다. 애착 이론은 이 실험 위에서 꽃피웠다. 존 보울비는 할로의 발견을 인간에게 적용했고, 메리 에인즈워스는 이를 정교화했다.
# 현대사회의 철사 어미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역설적이다. 풍요는 넘치되 접촉은 결핍되어 있다. 아이들의 배는 채워지지만 품은 비어 있다. 부모는 일터에 있고, 아이는 화면 앞에 있다. /스마트폰은 젖병이 달린 철사 어미다. 콘텐츠를 제공하되 따뜻함은 없다./ 우리는 자녀에게 더 나은 교육을, 더 많은 기회를, 더 안정된 미래를 주고자 애쓴다. 그러나 정작 가장 필요한 것, 무릎에 앉혀 안아주는 시간, 손을 잡고 걷는 시간, 함께 누워 이야기하는 시간은 부족하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성과와 보상의 체계는 정교하되, 정서적 지원은 부재하다. 임금은 철사 어미의 우유병이다. 생존을 위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조직에 애착을 느낄 수 없다. 소진되어 가는 직장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높은 연봉만이 아니다. 인정받는 느낌, 동료와의 따뜻한 연대, 상사의 진심 어린 관심이다. 그러나 현대 조직은 효율의 이름으로 이 모든 것을 삭제해 왔다.
# 고통 위에 세워진 지식
그러나 우리는 할로의 실험에 대해 말할 때, 그 실험이 자행된 방식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할로는 수백 마리의 새끼 원숭이를 어미에게서 강제로 분리했다. 일부는 완전한 고립 상태에 수개월, 심지어 수년간 방치되었다. 이 원숭이들은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입었다. 자해했고, 공격적이 되었으며, 정상적인 사회화가 불가능해졌다. 1970년대 할로는 더 나아가 "절망의 구덩이"라 불리는 수직 격리 장치까지 고안했다. 과학적 발견을 위해 치러진 대가는 컸다.
이 실험은 이후 동물실험 윤리 기준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식은 때로 고통 위에 세워진다. 우리는 그 지식을 사용하되, 그것이 어떻게 얻어졌는지 기억해야 한다./ 또한 할로의 실험은 원숭이를 대상으로 했다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애착은 더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언어와 상징, 문화와 가치관이 개입한다. 천 어미가 주는 위안이 중요하다는 발견이, 다른 모든 양육 방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에 따라, 시대에 따라, 가정에 따라 양육의 형태는 다양하다. 할로의 실험은 하나의 진실을 밝혔지만, 그것이 유일한 진실은 아니다.
결국 우리가 마주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철사 어미인가, 천 어미인가. 우리가 타인에게 주는 것은 생존의 수단인가, 존재의 근거인가. 관계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할로의 새끼 원숭이들은 대답했다. 따뜻함으로, 부드러움으로, 접촉으로. /배고픔은 잠시 견딜 수 있지만, 따뜻함의 결핍은 영혼을 황폐하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더 많은 것을 주는 삶이 아니라, 더 따뜻하게 함께하는 삶이다. 천 어미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지만, 그 품은 세계 전부였다.
<작성 : 조우성 변호사>